#05
“재희야!”
깜짝 놀란 민철 역시 그녀를 따라 벌떡 일어났다.
재희는 그의 부름을 무시한 채 앞만 보고 걸었다. 하지만 곧 손목이 민철에 의해 강하게 붙들렸다.
“재희야, 그게 아니라니까!”
“놔.”
“너, 괜찮아. 진짜 괜찮아.”
“…….”
순간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알잖아, 재희야. 나 진짜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야……. 너 괜찮아. 진짜 괜찮은 애야…….”
애원하는 듯한 민철의 목소리가 거리 위에 울렸다. 재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괜찮아, 재희야. 괜찮아…….’
효정의 사고가 있던 날, 제 등을 쓸어내리며 부드럽게 위로하던 그 문장이 떠올랐다. 두렵고 무서운 현실에서 절 끌고 나와 애틋하게 절 위로해 주던 민철의 온기가.
6개월 전.
효정이가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에 맞춰, 재희 역시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좁은 골목길 끝에 낡은 계단이 있고, 그 계단 중간에 땅에 반쯤 가라앉은 그녀들의 반지하 집이 있었다.
오래간만에 손잡고 같이 집에 갈까, 하고 전화했는데 효정은 받지 않았다. 그때부터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괜히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다 발견했다.
계단 앞에서 죽은 듯 누워 있는 제 동생 효정을.
며칠 전부터 깜빡거리던 가로등이 기어코 고장 나 계단이 잘 보이지 않아 굴러떨어진 것 같았다.
“효정아!”
재희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효정을 향해 미친 듯 달려갔었다.
몇 년 전의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도 분명 저런 모습으로 차 회장님 집 계단 아래 누워 계셨었다. 그리고 그 뒤로 두 번 다시 움직이지 못하고 죽은 것처럼 누워 있기만 했다.
“효정아, 효정아. 안 돼, 안 돼……. 효정아…….”
재희는 효정의 손을 붙들고 눈물만 왈칵 쏟아 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세상도 같이 흔들렸다. 패닉 상태에 빠져 몸만 덜덜 떨다가 이를 닥닥 부딪치며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전화……. 전화해야 해. 전화…….”
눈물로 눈앞이 흐릿했다. 누구, 누구에게 전화해야 하지. 누구. 누구한테. 초등학생도 아는 119조차 그 순간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재희는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전화번호 목록을 휙휙 내렸다. 낯익은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차강주 상무님.
그리고 그 뒤로는 모든 게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한 것 같기는 한데, 상대가 누구였는지조차 모호했다. 정신적 충격에 따른 일시적인 기억상실이라고 차후에 의사는 말했다. 그 골목에서 신발 한 짝과 가방, 그리고 휴대 전화까지 잃어버렸을 정도였으니.
그날 기억나는 건 몇 가지 없었다. 더러운 골목길에 주저앉아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두려움에 젖은 자신을 위로해 주었던 누군가의 온기.
“괜찮아, 재희야. 괜찮아…….”
귓가에 속삭여지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상대의 품에 안겨 눈물만 흘렸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등을 쓸어내릴 때마다 안도의 숨이 흐트러졌다.
“괜찮아…….”
참 이상하게도, 그 위로에 더 눈물이 났다. 절 따뜻하게 품어 주는 온기가 너무도 오랜만이라. 제가 누군가에게 모조리 기대는 것 또한 너무도 오래간만이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 보니 민철이 있었다. 이제 정신이 들었냐며, 병원 로비 의자에 누워 있는 절 걱정스레 불러 왔었다.
“재희야, 내 목소리 들려? 윤재희!”
재희는 이름이 몇 번이나 불려서야 멍한 시선을 겨우 들었다. 그리고 넋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효정이는? 효정이는 괜찮아?”
“나도 제대로 못 봐서 잘 모르겠는데, 병원 오자마자 정신 차렸었대. 지금 뇌진탕 검사하느라 MRI 찍고 있어. 그냥 혹시 몰라 찍는 거고 어쨌든 위험한 건 없댔어.”
그제야 안도의 숨이 탁 나왔다. 민철이가 효정이 상황을 잘 모르는 게 의아했으나, 제 곁을 지키느라 그랬다고 생각하니 이해가 됐다.
“너였구나…….”
“응?”
“민철이 너였어…….”
우리 효정이, 이제 세상에 남은 내 핏줄은 효정이밖에 없는데.
효정이마저 엄마처럼 잃을까 봐. 효정이가 그날의 엄마처럼 누워 있어서, 그래서 범람하는 혼란에 빠져 있기만 했다.
하지만 민철이가 와 주었다. 효정이를 병원까지 갈 수 있게 처치해 주고, 제 곁에서 계속 위로해 주었다. 효정이 그곳에서 잘못됐다면, 저 역시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민철이는 두 생명을 살려 준 셈이다. 효정이를, 그리고 자신을.
“민철아, 고마워. 고마워, 진짜 고마워…….”
재희는 계속 울기만 했다. 고마워, 고마워. 그 문장만 중얼거리며.
재희의 말을 듣던 민철은 갑자기 차가운 병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붙들고는 절절하게 그녀를 향해 애원했다.
“재희야, 내게 고마우면, 정말 그렇게 고마우면……. 이제 나 받아 주면 안 돼? 내가 네 곁에서 계속 힘이 되어 줄게. 나 몇 년 동안 너만 보고 살았어. 그러니까 이제 좀 받아 주라, 응?”
순간, 우습게도, 그의 말을 믿고 싶어졌었다.
‘재희야, 내가 네 힘이 되어 줄게.’
마음이란 건, 사람이 약해졌을 때 파고드는 거였나. 절 위로해 주던 그 목소리라면, 절 보듬어 주던 그 애정 어린 손길이라면. 이젠 마음 한 조각 내어 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재희는 민철에게 옆자리를 내어 줬다.
어쩌면 조금은 기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쏟아 낼 수 없던 제 외로움과 힘겨움을 그가 알아줄 수 있겠노라고. 강한 척, 꿋꿋하게 살아오던 윤재희도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겠다고.
나약해질 용기, 낼 수 있겠노라고.
재희는 민철에게 손목이 잡힌 채 눈을 감았다. 재희의 꼭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재희야, 너 정말 괜찮아. 괜찮은 애야. 내가 실언했어.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화 풀어, 응?”
괜찮아. 그때와 전혀 다른 의미지만, 모양만은 같았다. 그날의 민철도 지금처럼 괜찮다는 말을 건네줬었다. 더없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한없이 기대고 싶게.
‘아…….’
결핍을 안고 산 본인 같은 애들은 이래서 문제다. 빈틈과 외로움을 파고들던 따뜻함을 잊지 못해, 상대를 딱 자르지도 못한다.
‘게다가…….’
게다가 민철은 은인 아닌가. 제 소중한 동생 효정이를 살려 준 은인. 민철이 아흔아홉 번 잘못해도 가장 힘들었던 그때 내밀어 주었던 한 번의 손길로, 모조리 무죄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팔 놔, 민철아. 아파.”
민철을 차마 내치지도 못하는 나약함이 초라했다. 재희는 생애 처음으로, 외롭고 독하게 큰 지난 시간이 원망스러워졌다.
***
“와, 선배 여자 친구 진짜 너무한다. 선배는 좋은 의도로 말한 건데, 혼자 오해해서 막 화내고. 그렇죠?”
민철의 직장 후배, 박한나가 말했다. 민철은 동조의 의미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맞아, 너무하지 않냐? 자기한테 결혼하자고 한 사람한테.”
요새 민철은 한나에게 답답한 속마음을 자주 풀어놓고는 했다. 재희와 만나며 느낀 서운함과 불만을 마구 쏟아 냈다. 그러고 나면 그나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박한나. 그가 생각하기에 한나는 재희보다는 얼굴은 덜 예쁘지만, 마음은 더 예쁜 것 같은 그런 여자였다. 대화를 나누면 즐겁고, 특히 얘기가 잘 통했다.
“아무튼, 그때 도도하게 휙 돌아서는데 완전 무서웠다니까. 태도 하나는 완전 공주님이야.”
가진 것도 없으면서, 투덜투덜 중얼거리는 민철의 말에 한나가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왜 계속 만나요? 선배가 뭐 부족하다고 굳이 그렇게까지?”
그 말에 민철은 며칠 전 재희를 떠올렸다. 카페 창밖을 바라보던 우아한 눈매, 늘 젖어 있는 것같이 반짝거리는 말간 눈동자.
“음……. 걔가 예쁘기도 예쁜데 좀 사람을 홀린다고 해야 하나? 걔 인생이 좀 불쌍하거든. 사연이 좀 있어. 굴곡진 인생 때문인지 눈빛이 좀 깊고……. 그래서 그 눈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면 막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아.”
한나는 무어가 탐탁지 않은지 괜히 빨대를 잘근잘근 씹었다. 민철은 굳어진 한나의 표정도 모른 채 여전히 재희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조용조용 나긋나긋하면서도 가끔 강단 있게 딱 부러지는 게, 그게 또 매력 있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한나가 빨대를 툭 뱉어 냈다.
“그런데, 선배. 그런 타입은 좀 무섭지 않아요?”
“응? 뭐가?”
재희를 떠올리던 민철의 눈빛이 현실로 돌아왔다. 턱을 괸 한나가 뚱하니 입술을 내밀었다.
“가난한 사람들요. 그런 부류는 그……. 수면 아래에서 발버둥 치는 느낌? 설명하기 힘든 특유의 독기가 있어요. 난 그게 좀 무섭게 느껴지더라.”
“독기, 맞아. 그런 게 있기는 해. 재희 걔도 생긴 건 초식동물 같은데, 가끔은 진짜 독하거든. 힘들게 커서.”
아버지가 유명 의사인 민철과, 어머니가 변호사인 박한나는 유복하게 자랐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둘은 서로 동질감 비슷한 눈빛을 나눴다.
민철이 제 말에 동조하자, 한나는 그제야 웃었다.
“그런데, 선배 크리스마스에 뭐 해요? 여자 친구랑 여행 가나? 저번에 무슨 비행기 표 알아본다고 했잖아요, 연차 붙여서.”
이제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벌써 거리 위에는 연말 분위기가 가득이었다. 민철은 적잖이 음흉한 마음을 품고 재희에게 크리스마스 맞이 여행을 가자고 제의한 바였다. 물론, 그 제안은 무참히 거절당했지만.
“말도 마, 싫대. 내가 돈 다 낸다는데도 싫대. 아무튼, 싫은 것도 많아.”
아, 진짜 자존심 상해서. 민철은 혼잣말처럼 구시렁거렸다. 한나가 툭 제안했다.
“그럼 선배도 복수해요. 그 여자가 그렇게 튕기는데 가끔은 선배도 밀어야지. 가장 중요한 기념일에 혼자 내버려 두는 거예요. 밀당하는 거.”
“밀당?”
민철은 주름진 미간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하기야 내가 너무 끌려다니기는 했어.”라고 혼잣말을 주절거렸다.
***
재희는 인파 사이에 멈추어 서서, 휴대 전화를 향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출근? 갑자기? 왜? 오늘 휴일인데?”
크리스마스라 민철을 만나기로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민철에게 얻어먹기만 해서 크게 쏘려고 아주 비싼 호텔 레스토랑 예약도 해 놨는데.
전화 너머 민철이 미안하다는 듯 답했다.
-갑자기 일이 생겼어.
“일? 무슨 일.”
-그런 게 있어, 넌 말해 줘도 몰라.
“일 언제 끝나? 기다릴게. 저녁에라도 보자.”
-어? 저녁? 좀 곤란한데.
재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바쁘다는데 바짓가랑이 붙들며 매달릴 수는 없는 일이다.
“알겠어. 어쩔 수 없지, 뭐.”
재희는 전화를 끊은 후 홀로 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면 혼자라도 예약했던 호텔 레스토랑에 갈 예정이었다.
한편, 재희가 예약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한 층 더 올라간 호텔 VIP 라운지. 강주는 가라앉은 눈으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벽 한쪽을 꽉 채운 유리 너머, 서울 전경이 아찔하게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