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상무님, 안녕하세요.”
텅 빈 동공이 그녀를 향해 시선을 올렸다. 조금 놀란 듯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뜬 그는, 그녀를 마치 신기루 보듯이 멍하니 응시했다.
“이제 퇴근하시나 봐요.”
재희가 어색하게 안부를 묻자 그는 억양 없이 답했다.
“네, 재희 씨는.”
“아, 저는 할 일이 갑자기 생겨서요.”
그는 젖은 머리를 찬찬히 쓸어 올리며 픽 웃었다. 단단하고 쭉 뻗은 손마디 사이로 아무렇게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이번에도 그 김 과장이에요?”
젖은 목소리가 물었다.
재희는 뺨 위로 툭 떨어지는 물방울을 느끼며 말을 쉬었다. 역시. 그냥 밤에 다시 회사를 간다고 했을 뿐인데, 대번 상황을 알아차렸나 보다. 하긴, 그 사람과 정 팀장 빼고는 절 밤낮으로 괴롭히는 사람이 없기는 하지. 할 말이 없어 그의 뒤만 힐끗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차는 어떻게 하시고? 비 맞으면 감기 걸리실 텐데…….”
늘 비서니, 운전기사니, 하는 이들을 달고 다니는 그 아닌가.
강주는 대답 대신 재희를 빤히 바라만 봤다. 그러다 희미하게 입술 끝만 올려 웃고는 혼잣말처럼 답했다.
“알잖아요, 비 오는 날 나 병신 되는 거.”
노란 가로등 아래,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이 흐릿하게 빛났다.
재희는 흔들리는 눈으로 입술만 물었다가 뗐다.
아직도구나. 아직도 그때처럼.
입술만 꼭 깨물고 침묵하는 재희를 향해, 강주는 한 걸음 다가섰다. 재희는 저도 모르게 한발 뒤로 물러섰다. 어쩌면 비 오는 밤이 주는 묘한 긴장감 때문에, 어쩌면 그날 있었던 그 일 때문에.
제게서 멀어진 재희를 보며, 새까맣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가 물었다.
“이렇게 어두운 골목에 둘만 있으니……. 무서워요?”
순간 그의 모습 뒤로 과거의 그가 겹쳐졌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주먹을 뒤로 숨긴 채, 위태롭게 절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강주 오빠가.
2장. 너는 속이며
효정은 거울을 보며 휴대 전화 너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오빠! 진짜 괜찮아요. 언니가 아시는 분 택시 아예 빌려 왔어요. 그거 타고 갈 거예요.”
쾌활한 효정의 말에, 남자의 나직한 답이 휴대 전화를 타고 돌아왔다. 효정은 휴대 전화 너머 들려오는 남자의 말에 환히 웃었다.
“네! 안 떨고 시험 잘 볼게요!”
그때, 현관문 밖에서 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효정아, 이제 나와. 아래 아저씨 오셨대.”
“응, 언니!”
효정은 뒤이어 전화기에 대고 외쳤다.
“그때 나 다쳤을 때도 그렇고……. 역시 우리 기억하고 챙겨 주는 건 강주 오빠밖에 없다니까. 고맙습니다!”
효정은 전화기에 대고 감사 인사를 외치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현관을 나섰다. 오늘은 수능. 그간의 노력을 모조리 쏟아부어야 할 날이었다.
며칠 전, 언니와 보고 온 엄마 앞에서도 약속했다. 좋은 성적 받아서, 좋은 대학 가서, 좋은 데 취직하겠노라고. 그래서 언니한테 받은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몇 배로 돌려주겠다고.
그때, 죽은 듯 누워 있는 엄마의 속눈썹이 살짝 움직였었다. 언젠간 정말 우리 엄마 깨어날지도 몰라. 그 생각에 느낌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왠지 시험도 잘 볼 것만 같았다.
***
재희는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연말이라 다들 바쁜 걸까. 자신도 꽤 늦게 퇴근했다고 생각했는데, 세무 회계 사무실이 즐비한 건물들은 아직도 낮처럼 환했다. 그게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모두 저처럼 수면 아래 다리를 발발 움직이는 것 같아서.
재희는 민철의 사무실 인근 카페에서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시는데, 환한 얼굴로 들어오는 민철이 보였다.
“재희야! 네가 웬일이야? 나 찾아오고? 고맙게.”
“그냥, 얘기 좀 하려고. 목소리 들으면서.”
그의 행적이 요새 묘하게 찝찝하기도 했고. 더불어 회사에서 자꾸 절 괴롭히는 김 과장과 정 팀장 얘기도 하고 싶었고.
찬 바람이 불고 회사가 고달프니 자꾸만 엄마가 떠올랐다. 무조건 내 편인 사람, 힘들다고 칭얼거리면 위로해 주며 꼭 끌어안아 주던 엄마. 난 본인이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기댈 곳 하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가끔은 꼿꼿하게 서 있기 힘들었다.
“그래? 내 목소리 듣고 싶었어? 나 보고 싶었어? 어?”
헤벌쭉 웃으며 묻는 민철의 말에 재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 민철아, 나 요새 회사에서 김인무랑 정 팀장이란 사람이-”
요새 회사에서 웬 이상한 과장 놈이 시비를 건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민철은 재희의 말을 끊고 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맞다. 회사 얘기 꺼내니까 생각나네. 고객사 채권 자료 맞추라고 엑셀 자료 줘서 내가 검토했더니, 갑자기 장부랑 안 맞는다는 거야. 넌 잘 모르겠지만, 그게 실장부랑…….”
재희는 멍하니 민철의 얼굴만 응시했다. 그의 혼잣말 같은 얘기가 죽 이어졌다. 오늘은 나도 속상한 거 얘기하고 싶었는데.
눈만 끔뻑이며 한참이나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곧 민철이 상쾌한 얼굴로 웃었다. 온갖 불평을 재희에게 다 털어 내니 속이 시원한 모양이다.
“우리 재희한테 속상한 거 말하고 나니 좀 낫네. 역시 네가 최고야.”
“…….”
헛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한 달 전에 애들 수능이었다더라?”
“응.”
재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효정이 수능 끝난 지가 언젠데. 수능이 끝난 효정은 수능 표를 들고 친구들과 영화 할인이니 음식점 할인이니 하는 혜택을 즐기고 있었다. 그 들뜬 모습이 퍽 귀여워 떠올릴 때마다 흐뭇했다.
재희는 턱을 괴고 창밖을 응시했다. 잠잠한 눈이 잎을 떨군 가로수를 훑는다. 겨울이었다. 수능 날도 유난히 춥더라니, 수능이 지나니 더 추워졌다. 길을 걷는 사람들 얼굴 위에도 하얗게 굳은 찬기가 서려 있다.
효정의 수능을 잊은 민철이지만 사실 서운함조차 없었다. 무슨 기대를 했어야 서운하지. 저렇게 일방적이고 이따금 서운하게 하는 민철을 차마 내치지 못하는 이유는…….
민철이 콧잔등을 긁으며 머쓱한 듯 웃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너 이제 좀 편해지겠네.”
“편해지다니?”
멍하니 밖을 응시하던 재희가 시선을 돌렸다.
“수험생 뒤치다꺼리하는 게 좀 힘드냐. 네가 엄마도 아니고. 걔 학원비 대랴, 용돈 대랴, 신경 써 주랴 얼마나 힘들었냐.”
“…….”
“설마 효정이가 학자금까지 대 달라고 하는 건 아니지? 그 정도는 이제 자기 이름으로 대출받아야지.”
재희는 커피 잔을 꽉 쥐었다.
“아니, 내가 해 줄 거야.”
엄마가 사고를 당한 후, 제 삶에 남은 건 효정이 하나였다. 이따금, 엄마 꿈을 꾸어 눈물로 얼굴을 적신 채 눈을 뜨고는 했다. 만약 제 곁에 새근새근 자는 효정이 없었더라면, 그 가혹한 현실을 이겨 내지 못했을 거다.
그런 효정이에게 못 해 줄 게 뭐 있나. 모든 걸 다 털어서 효정이를 준대도 아깝지 않다.
“우리 재희가 현실을 모르네. 재희야, 너 이제 돈 모아야지, 동생 뒤만 발발 쫓아다니면 어떡해. 내가 걱정돼서 그래.”
“네가 왜 내 걱정을 해.”
뾰족한 재희의 말에 민철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런 후 넌 뭘 모른다는 표정으로 상체를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얘가 진짜 순진한 소리만 하네? 내가 왜 걱정을 안 해? 너 나랑 결혼하려면 결혼 자금 모아야 할 거 아니야. 언제까지 동생한테 발목 잡힐래?”
“…….”
어이가 없어 재희는 답을 쉬었다.
히죽 웃는 민철이 눈을 굴렸다. 왼쪽 전등, 오른쪽 창문을 휙휙 이동하는 눈동자를 보아하니 무언가를 계산하는 모양이었다.
“집은 내가 해 올 수 있거든. 근데 주위 보는 눈은 있으니까 네가 혼수는 해야지.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대기업 사원인데. 우리 엄마 아빠 주위 눈도 있고.”
“…….”
“솔직히 네 배경이 그렇게 유달리 선호되는 그런……. 그런 건 아니잖아? 쉽게 말해 고아나 다름없고 부양할 동생도 있고……. 그래도 난 괜찮아. 네가 내게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러니까 넌 그냥 체면치레할 정도만 돈 모아서-”
재희는,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민철의 말을 툭 잘랐다.
“내 배경이 뭐.”
황당을 넘어서 어이가 없었다. 결혼이라니. 생각도 한 적 없는데 다짜고짜 말을 꺼내서는, 뭐? 네 배경이 선호되는 건 아니라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부모 없다시피 살며 황량한 삶을 독하게 견딘 여자. 누가 결혼 상대자로 생각하겠나. 하지만 재희 자신은 민철에게 제 처지에 대한 평가를 부탁한 적이 없다.
“어? 왜 그래, 재희야. 갑자기 막 목소리 깔고…….”
“그래, 나 가난해. 근데 그게 왜. 네가 왜 내 인생을 평가해. 네가 뭔데.”
점점 부아가 치밀었다. 재희 본인이 언제 민철에게 결혼해 달라고 매달린 적이나 있었나. 제 인생을 불쌍하다 평가하며 사람을 바보 취급하라고, 언제 허락했느냐는 말이다.
만약 화내면 민철은 생각할 거다. 가난한 애의 자격지심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화가 났고 자존심이 상했다. 비록 그의 말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내가 언제 너한테 결혼해 달라고 빌었어? 동정해 달랬어?”
“재희야, 그게 아니라. 말이 그렇단 거지, 난 그냥 너랑 결혼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 거야.”
재희는 코웃음을 쳤다. 결혼하고 싶어 그렇다더니. 절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의식중에 절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는지 모조리 뒤집어 보여 줬으면서.
그래, 민철과 제 상황이 많이 다르기는 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떵떵거리며 산 민철 같은 사람은 이런 삶에 공감도, 이해도 하지 못할 테지. 바라지도 않는다. 본인 역시 그의 삶에 공감할 수 없으니까.
상류 삶을 동경한 적도, 원한 적도 없다. 그러니 동정과 연민 또한 없길 바란다. 난 스스로 당당하니.
“정민철, 너 이제 연락하지 마.”
재희는 담담한 말로 선을 긋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