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96)

 #03

 사무실에 찬물을 쏟아붓는 것처럼 삭막하고 냉랭한 목소리였다. 재희는 그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차강주가 있었다. 그는 이따금 직접 전할 말이 있을 때마다 8층으로 오고는 했는데 그날이 딱 오늘인 모양이다.

 모두 숨을 죽이고 시선을 모았다. 들고 있던 파일을 비서에게 건넨 강주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차분한 음성이 정 팀장을 향해 묻는다.

“요새 합병 건으로 외부인 드나드는 거 모릅니까. 분위기 흉흉하게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정 팀장은 눈을 굴리며 비굴하게 웃었다. 차강주 상무, 이건 뭐 제대로 대응하기도 어려운 상대다. 우선 납작 엎드리는 수밖에. 요새 뜸하더니 하필이면 이럴 때 와서.

“아, 상무님. 아래 팀원에게 업무 좀 가르쳐 주느라…….”

“정 팀장님 목소리가 복도 끝까지 들리더군요. 도대체 무슨 중요한 일입니까. 궁금한데 저도 한번 들어 볼까요.”

“아……. 그게…….”

 정 팀장은 당황한 얼굴로 눈썹을 매만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소리 지른 이유가 너무나 구차했기 때문이다.

 고작 파일 하나 한 시간 반 늦게 받았다고 길길이 날뛴 건 좀 그렇지. 팀장에서 승진해 임원 달고 나면, 필시 저 차강주라는 상무 눈에 들어야 하는데, 부정적인 일로 미리 눈도장 찍는 건 곤란한 일이다.

 정 팀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정 팀장을 서늘한 시선으로 훑던 강주가 난잡하게 풀린 정 팀장의 옷에 손을 올렸다.

“요새 외부인도 많은데 정 팀장님 매무새가…….”

 강주는, 재희에게 소리 지르느라 풀어 놓은 정 팀장의 단추를 잠그고, 넥타이를 매 주었다. 머리카락 한 올 내려오지 않은 단정하고 멀끔한 얼굴이 팀장의 옷매무새도 저처럼 멀끔하게 다듬었다.

“팀장님, 우리 직원이 큰 소리에 불안해하는 것 같아 참견 좀 했는데 혹시 서운하십니까?”

“전혀 서운하지 않습니다, 상무님.”

“그래요. 선강 직원들이 마음 편히 일해야 올해 실적도 더 오르고, 그 실적이 더 올라야 팀장님 실적도 오르고.”

“예, 예.”

 비굴한 정 팀장의 답 뒤로, 강주의 나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슬슬 임원 다시려면 팀장님은 다른 분들보다 더, 제 말뜻 아시죠?”

“아, 네, 네. 압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답하는 정 팀장의 말에, 강주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별다른 인사 없이 등을 돌렸다. 8층 직원들은 파티션 위로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강주의 모습을 훑었다.

 강주가 걸음을 멈춰 도달한 상품 기획 3팀 파트 앞. 똑똑, 파티션이 작은 노크 소리를 냈다.

“유 과장님, UJ코리아 건 샘플 비교 테스트 자료 준비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강주가 8층으로 온 원래 목적이 던져졌다.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던 유 과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네! 지금 협력체 제품 두 개가 아직 안 들어와서 들어온 것부터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제 연말이라 바빠지니까 딜레이 없게 부탁해요. 샘플 늦어질 것 같으면 있는 것만 대충 정리해서 우선 저한테 올리고.”

“네, 상무님!”

 강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8층을 곧장 나갔다. 조용한 사무실 안에 탁탁탁 키보드 울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입 대신 손이 움직인다. 봤어? 정 팀장 깨진 거? 사내 메신저가 불이 났다.

 강주의 개인 사무실 안에서, 재희는 환한 빛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전략 기획 조정실 상무, 차강주. 딱딱한 명패 앞에 앉은 강주가 보였다.

 차강주는 선강 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 주류와 음료, 푸드, 커피를 아우르는 외식 사업 본부의 기획 조정실 상무였는데, 재희 역시 산하 부서인 음료, 주류 쪽 마케팅 2팀에 소속되어 있는 터였다.

 하지만 상무인 그를 주임인 그녀가 사내에서 마주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오늘처럼 따로 불러내지 않는 이상에야.

 재희는, 불러 놓고 아무런 말이 없는 강주를 향해 먼저 입을 뗐다.

“상무님,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언가를 살펴보던 강주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빛을 등진 그가 눈부셔 재희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강주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던지듯 물었다.

“아까는 무슨 소동이었죠?”

“사소한 일이었습니다. 상무님께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작은 일입니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얼핏 신경질이 어린다.

“정 팀장도 그렇고 재희 씨도 그렇고, 내 앞에서 별거 아니라며 입 다무는 게 마케팅 팀 유행인가 봐요.”

“그게 아니라.”

“…….”

“그게…….”

 그는 더 묻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침착하고 싶었지만 침묵이 그녀를 헤집었다. 결국 재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류를 세 시까지 달라고 부탁하셨었는데 다섯 시 반에 드렸습니다.”

“중요한 서류였나요?”

“음…….”

 그리 중요하지는 않은 서류였다. 기실 오늘 주어도, 내일 주어도 상관없는. 하지만 재희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아무리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지라도, 중요성의 경중을 판단하는 건 상사인 정 팀장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강주는 재희의 침묵에서 대충 답을 찾은 듯했다. 그가 느른하게 턱을 괴었다.

“어제 재희 씨 외근 있지 않았나?”

“아, 네. 있었습니다. 그건 어떻게 아셨-”

“그런데 왜 외근 전에 건네지 않았죠?”

 어떻게 알았냐는 재희의 말을 뎅겅 자르고, 강주가 무신경한 목소리로 물었다.

“외근 전에 드리려고 했는데, 불가피한 일로 처리하지 못하고 외근부터 가게 되었습니다.”

“그 불가피한 일이 뭡니까.”

“김인무 과장의 승인을 받지 못했습니다. 미리 전하지 못한 제 탓입니다.”

“미리 전하지 못했다. 재희 씨 성격에 갑자기 서류를 불쑥 내밀었을 것 같지는 않고.”

“…….”

“저번에도 김인무 과장와 마찰 있지 않았나요?”

 그는 끝까지 파고들어 날카롭게 물었다.

 재희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강주는 김 과장과 재희의 관계를, 그리고 이번 일의 전후 상황을 쉽게 꿰뚫어 보았다. 22층에 있으면서 8층 상황은 어찌 그리 꿰고 있는지. 이건 경기도 교육감이 풍천고 1학년 2반 명석이와 철수가 싸웠다는 걸 알고 있는 수준 아닌가.

“제가 보기엔 아무래도 그 김인무 과장이 개새끼, 정 팀장도 개새끼. 그렇게 정리되는 것 같은데…….”

 혼잣말처럼 읊조리던 그는 곧 시선을 들어 재희를 헤집을 듯 응시했다.

“하지만 재희 씨가 입을 꼭 다무니, 모두 재희 씨 잘못으로 할게요.”

“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 내려 서류를 쥐더니 던지듯 말했다.

“그래요, 가 봐요.”

 턱을 괸 채 서류를 응시하는 그의 이마를 향해 재희는 허리를 푹 숙였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무님.”

 마지막 인사와 함께 그녀가 나갔다. 홀로 남은 강주는 가만히 서류만 들여다보다가 결국 종이를 내려놓았다.

 고개를 젖혀 의자에 몸을 푹 기댄다. 나른한 빛이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

 정 팀장은 반쯤 피운 담배를 바닥에 휙 버리더니 발로 꽝꽝 짓눌렀다. 그는 강주가 떠난 후, 홀로 씩씩거리다가 김 과장을 데리고 6층 옥외 정원 흡연실로 나온 참이었다.

“차강주 상무 그거, 여사원들한테 잘 보이려고 나한테 쪽 준 게 분명해. 허구한 날 내려와 기웃댈 때부터 알아봤어.”

 도대체 불편해서 살 수가 없었다. 대충 음료, 유통 쪽에서 몇 년 머물다가 선강 그룹 중앙 컨트롤 타워로 갈 게 뻔한데. 편하게 22층 사무실에나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틈만 나면 내려오느냐는 말이다. 나라님 시찰하는 것도 아니고.

 전화 한 통, 비서 한 번 부르면 끝날 일을 굳이 힘들게 내려와서는 사사건건.

“그놈 그거 왕자병 있어, 여사원들이 지 얼굴 보고 꺅꺅거리는 거 즐기러 내려오는 거야. 내가 딱 알아.”

“맞습니다, 팀장님.”

 정 팀장이 새로 문 담배에 불을 붙여 주며, 김 과장이 동조했다. 정 팀장은 새삼 성이 난 표정으로 김 과장의 머리통을 콱 쥐어박았다.

“맞긴 뭘 맞아, 이 새끼야! 너 때문에 내가 쪽 먹은 거 아냐! 재희 그거 기어오른대서 혼내 주느라!”

“죄송합니다, 팀장님!”

 김 과장이 허리를 푹 숙였다. 정 팀장은 담배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시며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뿜었다.

“윤재희 걔, 그거 어떻게 좀 잘 괴롭혀서 내보내. 좀 예뻐서 예뻐해 줬더니 성희롱이라며 난리를 치고 말이야. 이건 뭐 뻑 하면 노동당에 찌르니 뭐니 지랄을 하니 자를 수도 없고.”

“고용 노동부입니다, 팀장님.”

“알아, 이 새끼야.”

 정 팀장은 쯧, 하고 혀를 찼다. 담배가 오늘따라 쓰다.

 그나저나 오늘 심기 불편하게 해서 죄송하다고 차 상무한테 화분이라도 보내? 미우나 고우나 그 상무 놈한테 잘 보여야 하는데, 괜히 윤재희 때문에…….

 ***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온 재희는 인적 드문 길을 걸었다. 늦게까지 일한 후 기분 좋게 지하철을 탔는데 김 과장의 연락이 절 찾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해외 영업 팀에서 요구한 자료를 줘야 한다나.

 그녀의 소관이 아니기는 하지만, 전화로 하도 난리를 치는 터라 우선 가는 중이었다. 별수 있나. 작정하고 절 괴롭히고 싶다는데.

“왜 갑자기 비까지 오고 난리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얇은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재희는 싸구려 가죽 가방으로 머리를 가렸다. 직장인이 모두 빠져나간 빌딩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빛나는 빌딩 주변에도 이렇게 좁고 허름한 골목은 있다.

 계절이 변했는지 거리 풍경이 일주일 전과는 또 달랐다. 텅 빈 사무실 건물들을 가르며 이리저리 지날 때였다. 문득 재희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이 초라한 거리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홀로 걸어오고 있다. 구김 하나 없는 슈트가 빗물에 살짝 젖어 있다. 아무리 보아도 이런 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재희는 어쩔까……. 고민하다가 상대와 가까워지자,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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