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월요일부터 정신이 없었다. 끝도 없이 울리는 전화를 받아 밀린 업무를 처리한 후, 기지개 켤 겨를도 없이 새까만 서류철을 손에 쥐었다. 오후에 있을 외근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재희는 대각선에 앉은 김인무 과장 자리로 가 옆에 가만히 섰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김 과장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과장님.”
“…….”
“김 과장님.”
“…….”
두 번이나 불렀음에도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일부러 무시하는 게 틀림없었다.
평소 김 과장과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몇 달 전 회식 날, 술에 취해 지분거리던 그를 밀쳐 냈더니 창피를 당했다고 느낀 모양이다. 절 먼저 꼬셔 놓고 치한 취급한다며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하소연하다가, 그마저 통하지 않자 아예 앙심을 품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인사는 절대 받아 주지 않기. 서류를 올리면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그대로 뭉개고 있기. 그녀만 빼고 팀 회식 주도하기. 소소하지만 악의적인 복수들. 누군가 자신을 무시하는 일에는 이골이 난 재희였지만, 문제는 그가 직속 상사라는 사실이었다.
“과장님, 기획서 아직 검토 안 해 주셔서, 다시 갖고 왔어요.”
“…….”
“김인무 과장님!”
김 과장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야, 나 귀 안 먹었거든?”
재희는 그를 향해 까만 서류철을 쓱 내밀었다.
“정 팀장님께서 세 시까지 1안 꼭 달라고 하셨거든요. 지방 내려가는 차 안에서 보신다고.”
“그래서.”
“김 과장님이 검토 해 주셔야 제가 드릴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라니. 재희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누른 후 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이 얼마 없다. 김 과장이 산처럼 쌓여 있는 서류 더미를 툭툭 두드렸다.
“나 바빠. 거기 올려놔.”
무덤. 그 서류 더미는 무덤이었다. 온갖 것들 다 쌓아 놓고 군내 날 때까지 묵혀 두는 퀴퀴한 무덤. 저기 올라가면 진짜로 오전 중에는 처리되기 그른 거다.
“급하면 진작 가져왔어야 할 거 아니야. 마음에 안 들면 결재 칸 비우고 올리든가.”
“네, 그럼 칸 비우고 우선 그냥 올릴게요.”
딱 떨어지는 재희의 답에, 김 과장은 텅! 하고 책상을 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말이 되는 소리 해! 너 지금 나 무시하냐?”
결국 큰소리가 났다. 기획 팀, 회계 팀, 법무 팀 다 모인 사무실 안에 쩌렁쩌렁 창피하게.
“내가! 결재하고! 내가! 드리든 말든! 내가! 알아서 한다고! 네가 내 상사야? 어디서 명령하려고 들어!”
김 과장은 우악스럽게 치켜뜬 눈으로 위협하듯 고개를 쭉 내밀었다. 그리고 들으란 듯 욕을 하더니 재희의 어깨를 툭 치고 걸어 나갔다.
“에이 씨발, 기분 잡치게!”
재희는 휘청이다가 책상을 짚고 몸의 중심을 잡았다. 뒤를 돌아보자 주머니 속 담배 케이스를 꺼내는 김 과장이 보였다. 빌딩 밖 흡연실에 갈 생각인 것 같았다.
재희는 손에 든 서류와 김 과장 책상 위 서류 무덤을 번갈아 응시하다가, 서류를 무덤 위에 얹었다.
침착한 척했으나, 재희 역시 속에서 불길이 이는 중이었다.
저거 어떻게 복수하지? 자동차 보닛 열고 계란 던져? 요새 앞머리 휑해지던데 넘어지는 척 붙들고 다 뽑아 놔?
-뚜루루루- 뚜루루루.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회사 차로 걸어가며 민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 불가라는 안내만 나왔다. 재희는 민철의 번호가 뜬 휴대 전화 창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대로 껐다. 요새 민철과 통화하기가 묘하게 꺼려졌다. 특히 그가 회사에 있을 때는.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시각, 민철의 사무실 근처 커피숍.
민철은 휴대 전화를 확인하고는 받지 않고 주머니에 스윽 밀어 넣었다.
“누구예요?”
“응? 여자 친구.”
“여자 친구 있었어요? 몰랐는데?”
민철의 앞에 있던 사무실 후배 박한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배라고는 하지만 민철보다 겨우 한 달 늦게 들어와 동기에 가까웠다.
“사귄 지 얼마 안 됐어.”
자신이 재희를 몇 년 동안 쫓아다녔다는 말은 쏙 빼고, 반쯤 거짓인 말을 민철은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둘은 고객과 그룹 미팅을 마친 후 막간을 이용하여 카페에서 노닥거리는 중이었다. 바쁘기는 하지만 이럴 때 숨 돌리지 않으면 언제 쉬겠냐며.
“예뻐요?”
한나의 물음에 민철은 콧잔등을 긁적거리며 재희를 떠올렸다.
“예뻐, 예쁘긴 진짜 예쁘거든. 근데 좀…….”
“좀?”
“좀 냉정한 구석도 있고, 너무 철벽 치기도 하고.”
한나의 입꼬리에 비웃음이 스리슬쩍 걸렸다.
“아, 그런 타입이구나? 얼굴 믿고 도도하고, 남자 불편하게 하는 타입.”
민철은 굳이 고개 저어 부정하지 않았다. 한나가 음료를 휘적거리며 말했다.
“하긴 예쁘긴 할 것 같아요, 선배 여자 친구.”
“왜?”
“선배, 잘생겼으니까. 잘생긴 사람 주위에 예쁜 사람 있는 건 당연하죠, 뭐.”
민철은 괜히 빨대를 만지작거렸다. 하하하, 하고 바보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
역시 사람도 동물은 동물이다. 동물의 감을 믿듯, 인간의 본능을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쩐지 미팅 내내 너무 불안하더라니.
재희는 뛰듯이 사무실에 들어와 허겁지겁 파일 창을 열었다. 정 팀장에게 가야 할 파일은 결국 전해지지 않았다. 김 과장이 깔고 앉은 것이다. 자기가 확인 후 전해 준다고 말하더니 이렇게.
“통계 수치가 틀린 것 같아서 우선 갖고 있었어. 내 책임 아니다, 어?”
등 뒤에서 김 과장의 이죽거림이 들렸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김 과장이 말했던 오류가 보이지 않았다.
“김 과장님, 수치 맞는데요.”
“그래? 내가 볼 땐 틀렸었는데.”
김 과장은 공유 파일을 열고 체크하는 척 깔짝거리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잘못 봤나 보네. 그래도 한 번 두 번 확인하고 보내 드리는 게 맞지. 실수하는 것보다. 그치?”
“…….”
“그러게 내 전화받지 그랬냐, 내가 전화했잖아.”
아, 그 전화. 한창 미팅 중인데 어떻게 전화를 받나. 미팅 끝난 후 전화를 걸었을 땐 김 과장이 다 씹었었다. 사무실 오는 내내.
재희는 정 팀장에게 파일을 보내고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손바닥 아래에서 픽 웃음이 샜다. 모든 걸 초월한 웃음이었다. 한참이나 김 과장 김 과장……. 입 속으로 그 이름을 질근질근 씹던 재희는 고개를 들고 야근을 위한 시간 외 PC 사용 연장 신청서를 쓰기 시작했다.
김 과장은 김 과장이고, 오늘은 우선 일부터 하자. 내일 덜 혼나려면 일은 다 끝마쳐야지.
조만간 김 과장의 의자에 껌을 붙여 놓을 생각이었다.
어둑한 밤. 창밖으로 반짝거리는 서울 야경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재희는 회사 복도 창문 앞에 서서 전화 너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이제 집에 들어간 거야? 피곤하겠다, 우리 효정이.”
-언니는 아직 퇴근 안 했어?
“응, 일이 좀 밀렸어. 걱정하지 말고 먼저 자. 창문 꼭 잠그고, 문도 꼭 잠그고. 알았지? 혼자 자서 안 무섭겠어?”
-내가 앤가. 언니도 이따 조심히 와.
“응.”
재희는 전화를 끊고 카페 초콜릿 음료와 케이크 기프티콘을 샀다. 그리고 ‘우리 효정이, 파이팅!’이라는 글귀와 함께 동생에게 보냈다. 친구들과 카페를 가려다가 용돈이 부족해서 못 갔다던 효정이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효정이 수험생인데 먹고 싶은 것도 잘 못 먹고. 언니가 미안해.
보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괜찮아졌다.
김 과장, 네가 아무리 그래 봐라. 내가 회사 관두나. 더 열심히 벌어서 내 새끼 기프티콘 사 주지.
***
“내가 재희 씨에게 미리 말했어, 안 했어, 어?”
넥타이를 팍팍 풀어 헤치며, 정 팀장이 외쳤다.
“기획서를 못 줄 것 같으면 외근을 가지 말고 어떻게든 일을 처리했어야지! 업무 우선순위가 뭔지 아직 몰라? 일 그따위로 할 거야?”
“죄송합니다.”
“내 명령이 우스워!”
정 팀장은 벌게진 눈으로 소리를 왁 질렀다.
눈을 내리깐 재희는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최대한 반성하는 모습으로 보이게끔. 어쨌든 정 팀장에게 서류가 올라가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니까. 어제는 김 과장에게, 오늘은 정 팀장에게 처참하게 깨지고 있었다. 그놈의 서류 하나가 사람 참 곤란하게 만든다.
슬그머니 다가선 김 과장이 만류하는 척 정 팀장의 불난 마음에 석유를 부었다.
“팀장님, 안 그래도 제가 어제 통계 수치 때문에 재희 씨에게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고요. 미팅인지 뭔지에 정신 팔려서.”
재희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가 차분하게 사실만 전달했다.
“제가 확인해 본 결과, 통계 수치 어긋난 건 없었고, 다시 체크한 후 바로 정 팀장님 메일로 보내 드렸습니다. 늦어진 건 정말 죄송합니다.”
정 팀장은 그녀의 침착한 답에도 열기를 식힐 줄 몰랐다. 손에 든 종이 서류로 그녀의 어깨를 탁탁 내리친다.
“퇴근 시간 다 되어 주면, 뭐 해. 내가 언제 그때 달랬어? 요새 태도가 왜 이래? 사수도 무시하고, 행실도 아주 건방지고! 이따위로 근무할 거야?”
…아.
그녀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꼬투리를 위한 꼬투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미 절 깔아뭉개기로 작정한 사람 귀에 무슨 말이 들리겠는가.
정 팀장 역시 그녀에게 불만이 많았다. 회식 후 단둘이 노래방을 가자는 걸 거절한 적이 한 번. 팀장과 여사원들끼리만 같이 저녁 먹는 모임을 만들자며 치근덕거린 걸 거절한 게 또 한 번. 그 이후로 뭐 하나 꼬투리만 잡으면 이런 식으로 자근자근 밟고는 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정 팀장의 등 뒤로, 입술 끝을 작게 실룩이는 김인무 과장이 보였다.
좋냐. 그래, 많이 좋아해라. 재희는 머릿속으로 방금 그의 까지기 시작한 앞머리를 한 움큼 뽑았다.
어쨌든 자신은 주임, 철저한 을. 그들은 과장과 팀장, 철저한 갑이었다. 더럽고 치사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을 중의 을, 재희는 눈을 더욱 내리깔고 맞잡은 손을 꽉 쥐었다.
그때, 사무실 입구에서 굳게 침전된 목소리가 던져졌다.
“무슨 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