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낼수 없는
#01
프롤로그
“살 곳 없으면, 내 집으로 와요.”
강주는 마치 저녁 식사에 초대하듯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의중을 희미하게 더듬던 재희가 뒤늦게 물었다.
“…왜요?”
“외로워서.”
고민의 흔적은 조금도 비치지 않는 목소리.
바르르 떨리던 재희의 속눈썹이 천천히 내리깔렸다. 몸이 외로워, 그 커다란 곳에서 홀로 보낼 밤이 외로워 내게 손을 뻗는다면……. 난 그의 손을 잡아야 할까.
잠시 후 재희는 시선을 들어 그를 마주했다. 모두를 내려다보는 것같이 오만한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들이닥쳤다.
강주의 제안이 달콤한 독약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감히 그를 거부할 수 없는 스스로 역시, 사무치게 알고 있다.
재희는 허세를 부리듯 턱을 치켜들었다.
“제 방은 한강 보이는 곳으로 주셨으면 좋겠어요. 거실 옆에 있는 제일 큰 방요.”
“좋을 대로 해요. 하지만 아마 재희 씨가 그 방에서 잘 일은 없을 거예요.”
“왜요?”
턱을 괸 강주가 고개를 기울이며 다정히 웃었다.
“난 내 침대 위에서만 재희 씨와 뒹굴 거고, 그 후엔 함께 잘 생각이거든.”
“…….”
“매일 섹스할 거란 뜻이에요. 날마다 재희 씨 안에 처박고 쌀 거라고. 그러니 재희 씨가 그 방에서 잘 일은 없어요.”
난잡한 말만 내뱉는 그의 얼굴은 더없이 깨끗하고 단정했다.
재희는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떤 말을 하든 자신은 그의 말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설령, 그 관계가 거짓이라 할지라도.
1장. 탐낼 수 없는
재희는 묵직하게 열리는 현관문 사이에 들어섰다. 햇살이 쏟아지는 창밖, 유유히 흐르는 한강 위로 유람선이 달팽이처럼 미끄러졌다.
정적을 가르며 재희는 찬찬히 걸음을 옮겼다. 대리석 바닥 위에 기다랗게 그림자가 늘어졌다. 볕과 그림자의 경계선에서 머뭇 걸음이 멈춘다.
나른한 잠에 빠져 있는 한 사람. 투명한 커튼 아래 드리운 햇살, 매끄러운 피부 위에 깔린 부드러운 빛. 촘촘한 속눈썹 끝에 걸린 반짝임.
문득 한숨이 났다.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선 너머 걸린 아름다운 명화처럼 그는 잠들어 있었다.
차강주, 오르지 못할 나무.
오래전 첫사랑.
과거, 이루지 못한 감정은 앙금처럼 마음속에 부스러기를 남겼다. 물론 포기한 지 오래지만. 그림자 속에 서 있는 자신과 빛 속에 누운 그는 사는 세계가 달랐다.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건널 수 없는 심연이 파여 있는 기분이다.
무릇 그가 재벌가 후계자라서, 자신이 그 재벌가 가정부의 딸이라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건 아마.
“아……!”
재희는 순간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인기척을 느낀 듯 그가 천천히 눈을 떴기 때문이다.
둘의 시선이 사고처럼 닿았다. 느릿하게 드러난 그의 눈동자가 아름다운 짐승처럼 빛났다. 재희는 숨을 들이켜며, 뒤를 돌았다. 멱살이 잡혀 현실로 휙 끌려 돌아온 것 같았다.
그의 고요하게 침전된 눈빛이 그녀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아직도 날 욕심내느냐고.
“곤히 주무셔서 못 깨웠어요. 혹시 놀라신 건 아니죠?”
재희는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거리며 황급히 등을 돌렸다.
그와 늘 다른 세계에 머무르는 것 같은 건, 이렇게 한 공간에 있음에도 늘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바로 저 눈빛 때문이었다.
“오늘은 갈비찜 갖고 왔어요. 냉동하면 맛이 없을 텐데 어떻게 할까요?”
냉장실 문을 열며 혼잣말처럼 묻자 그의 권태로운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냥 거기 놔요.”
재희는 힐끗 뒤를 돌았다. 침대 끝에 느슨하게 걸터앉은 강주가 보였다. 강주는 눈을 내리깐 채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나른한 짐승처럼 우아하고 정적인 움직임. 흘러내린 이불 위로 감추지 못한 상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햇빛을 받아 굴곡이 그대로 보이는 복근과 복사근, 만지면 튕겨 나올 것같이 탄력 있는 근육으로 뒤덮인 매끄러운 몸.
재희는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
“분위기 좋지? 여기 유명해져서 예약 안 하면 못 와.”
“응, 예쁘네.”
재희는 민철의 생색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민철. 재희의 맞은편에 그는 그녀를 3년이나 따라다니다가 ‘그날’을 계기로 그녀의 옆자리를 꿰차는 데 성공한 남자였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스킨십 한번 한 적 없다. 말하자면 애인이라기보다는 살가운 친구 위치에 가깝다고 하는 게 어울릴 사이였다.
재희는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둥둥 떠다니는 오리 배가 평화로워 보였다. 재희를 따라 목을 쭉 빼고 오리 배를 보던 민철이 슬쩍 운을 뗐다.
“재희야, 오늘 나랑 늦게까지 있을 거지?”
“나 오늘 효정이랑 저녁 먹기로 했어, 미안.”
민철의 의도를 안다. 재희는, 동생 효정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며 돌려 거절했다. 요새 들어 민철이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1박 여행을 가자는 둥, 밤에 함께 있자는 둥.
민철의 입이 툭 나왔다.
“넌 주말에도 늘 그 상무인지 뭔지 하는 놈 집에 가느라 바쁘면서, 오늘 저녁까지 그러냐.”
“미안.”
재희는 우선 사과부터 건넸다.
민철이 말하는 ‘상무인지 뭔지 하는 놈’은 강주였다. 제 첫사랑이자, 선강 그룹 회장 외동아들인 차강주 상무. 어린 시절부터 연이 있는 탓에 주말마다 반찬을 주러 그의 집을 방문하곤 했는데, 그 점이 민철은 늘 불만인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왜 너네 집 반찬만 먹냐? 대기업 상무면 돈도 많을 텐데.”
“그러게.”
“너네 엄마가 그 집 가정부였다고 했지? 그래서 네 반찬만……. 아, 이거 좀 실례인가.”
실수를 했다는 듯 민철이 재희를 살폈다.
가정부의 딸, 대를 이어 반찬을 조달하는 처지. 그리 듣기 좋은 타이틀은 아니다. 하지만 재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 부끄러운 거라고.
“맞아. 어릴 때부터 우리 엄마 반찬 먹어서, 내가 만든 것도 입맛에 맞나 봐.”
뒤이어 침묵이 가라앉았다. 괜히 머쓱한 민철이 큼큼 목을 울릴 때, 테이블 위로 접시 몇 개가 올라왔다.
“주문하신 토마토 해산물 파스타와 샐러드, 스테이크 나왔습니다.”
민철이 주문한 스테이크와 샐러드, 그리고 토마토 해산물 파스타였다. 재희는 제 앞에 놓인 붉은 파스타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고개 들어 직원을 향해 말했다.
“메뉴 잘못 나왔어요.”
재희의 메뉴는 알리오 올리오였다. 새우가 들어가지 않은, 알리오 올리오.
당황한 직원이 허둥지둥 주문을 확인했다. 둘을 지켜보던 민철이 파스타 접시를 가볍게 당겼다.
“그냥 먹자, 이거 맛있어 보이는데.”
재희 얼굴이 굳었다. 마주한 민철의 눈빛에 어린 감정을 재희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또 예민하게 구는 거야?’ 하지만.
“민철아, 나 새우 알레르기 있어.”
그녀에게는 새우 알레르기가 있었다. 그의 말처럼 맛있어 보여 그냥 먹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미 민철에게는 두 번이나 상기시켰던 사실이었다. 이젠 새우 알레르기가 있다는 말을 그에게 다시 하는 것조차 구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민철은 어깨를 으쓱하며 종업원을 올려 보았다.
“그렇다네요. 알리오 올리오로 다시 주세요.”
잠시 후 알리오 올리오가 새로 나왔다. 민철은 스테이크를 이미 반쯤 먹은 상태였다.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민철이 말했다.
“그런데, 재희야. 넌 참 운이 너무 없다.”
“…….”
파스타를 돌돌 말던 재희의 손이 멈췄다.
“재수가 없다고 해야 하나? 다른 사람은 안 그러는데 유독 너만 막 메뉴가 잘 바뀌고 안 맞는 일이 생기고, 그치? 아니면 네가 그냥 예민한 건가?”
파스타를 꼭꼭 씹어 넘긴 재희가 민철을 향해 시선을 들었다. 농담이랍시고 하는 그의 말이 갈고리처럼 마음에 박힌다.
“내가 왜 재수 없어? 난 멀쩡히 주문했고, 잘못 요리한 건 이 식당인데.”
늘 들었던 말이었다. 아빠는 없고, 엄마는 아프고, 고아나 다름없는데 부양해야 할 여동생까지 있다. 인생이 왜 이리 굴곡졌냐며 모두 그녀를 향해 혀를 찼다.
민철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괜스레 크게 웃었다.
“야, 취소, 취소. 너 재수 없지 않아. 아주 재수 있어. 뽀뽀도 안 해 주는 여자 친구 아끼고 모셔 주는 날 만난 거 자체가 아주 재수 있는 거지!”
“…….”
“혹시 삐진 거 아니지?”
재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내저었다. 저렇게 뻔뻔하게 나오는데 말을 더해 뭐 하나.
넌 참 운이 없는 것 같아, 민철이 했던 말이 씁쓸하게 일어났다. 너무 자주 들어 이젠 마음속에서 낡아 빠진 말인데도, 참 새삼스럽게. 하지만 차마 민철에게 끝내 냉정히 대할 수 없는 이유는.
재희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움직였다. 아마 ‘그날’의 민철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진작에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말실수쯤은 넘겨 주는 게 옳지. 효정이와 내 은인, 고마운 사람이니까.
***
“응? 오늘 점심 같이 먹자며.”
재희는 맨션 입구를 지나치며 민철에게 말했다. 휴대 전화 반대편에서, 민철이 어쩐지 조금 어색한 목소리를 냈다.
-아, 후배가 상담할 게 있다고 해서 만나기로 했어.
“후배? 무슨 후배? 우리 학교 후배?”
-아니, 직장 후배.
재희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직장 후배? 이번에 갓 회계사가 된 민철에게 직장 후배가 생길 일이 있나? 하지만 재희는 우선 넘어갔다.
“응, 알겠어. 그럼 다음에 봐.”
-고마워, 재희야.
여전히 어색한 말투로 민철이 답했다. 재희는 전화를 끊자마자 가방에 대충 밀어 넣고는, 지문 인식 판에 엄지를 갖다 댔다. 곧 문이 무겁게 열렸다. 숨을 죽이고 안을 조심조심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가구가 그다지 없는 널따란 집은, 작게 말해도 목소리가 꽝꽝 울리는 것만 같았다. 안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오늘은 어디를 나가기라도 했나 보다. 이방인처럼 주방에 들어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 빈 집처럼, 냉장고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언니, 그런데 강주 오빠는 왜 계속 우리 반찬 먹는대?’
문득 효정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정말 왜 그럴까. 상무님은 왜 계속 우리 집 반찬을 먹는 걸까. 불쌍해서? 한때 같은 지붕 아래 살던 가정부 식구를 향한 동정심? 그것도 아니라면.
“뭐, 아무렴 어때.”
그의 의도가 어떻든 뭐가 문제랴. 그는 돈을 주고, 자신은 돈을 받고. 깔끔하고 떳떳한 거래다. 착착 냉장고를 채우는데 뒤에서 사무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왔어요?”
정감이라고는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낮고 조용한.
재희는 깜짝 놀라 반찬 통을 와르르 무너뜨렸다.
“엄마야!”
“엄마 아닌데.”
농담인지 아닌지 모호한 목소리가 건조하게 던져졌다. 황급히 뒤를 돌자 가운을 입은 채 소파에 느슨하게 앉은 강주가 보였다. 씻고 나온 모양인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말간 물방울이 그의 뺨 위로 눈물처럼 타고 흐른다. 섬세한 이목구비 안에 박힌 특유의 오만함. 목덜미 아래,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가운 틈으로 단단한 가슴팍이 슬쩍 비쳤다. 청초해 보이는 외양에 야릇한 분위기가 감기니 묘하게 선정적이다.
재희는 화끈거리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잡채랑 새우 말이 갖고 왔어요. 새우 말이는 오븐용 접시에 담아서 랩 씌워 놓을게요. 랩만 풀고 돌리면 돼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꾹 눌렀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강주가 곁눈질로 보였다. 어디 가려는 걸까. 숨소리 하나, 발소리 하나가 참으로 신경 쓰이는 남자다.
모른 척 접시를 들고 있으려니 등 뒤로 그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강주의 부드러운 저음이 이어졌다.
“괜찮아요?”
“네?”
재희는 괜찮냐는 질문의 뜻을 파악할 수 없어 부자연스럽게 그를 돌아봤다. 대리석 상판에 기댄 그가 절 나른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미약한 피로가 감겨 있는 눈 아래, 묘한 색기가 배어 있다. 그 얼굴로 그가 무심히 다시 물었다.
“재희 씨, 새우 그렇게 만져도 괜찮냐고.”
“…네?”
부드러운 소리에 홀려, 그의 말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재희의 얼굴에 닿아 있던 시선이 느릿하게 내려와 그녀의 손에서 멈췄다.
“알레르기 있잖아요.”
“아…….”
만지는 건 괜찮은 건가, 그는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재희는 근질거리는 손가락을 한 번 꼼지락거렸다. 그가 바라보는 건 단지 손가락일 뿐인데 묘한 긴장이 치밀었다.
“예전에 그러지 않았었나.”
차분한 문장이 다시 영문 없이 던져졌다.
“뭐가요?”
“새우 들어간 애피타이저 먹고 그 뒤로 아무것도 못 먹었었던 것 같은데.”
손에 닿았던 그의 시선이 다시 느릿하게 타고 올라 그녀의 입술에 멈췄다. 고개를 슬며시 기울인 그가 자신의 입술을 느릿하게 훔치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재희 씨 입술도 엄청 부었었고…….”
나른한 목소리가 달콤하게 감긴다.
재희는 그의 시선이 닿은 입술을 달싹였다. 침을 꼴깍 삼키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그가 매만지는 건 분명 강주 본인의 입술인데, 이상하게 재희 자신이 긴장됐다. 마치 그의 노골적인 시선이 절 더듬는 것 같은 야릇한 기분이다.
무감정하면서도 깊게 일렁이는 것 같은 그의 눈빛. 재희는 차마 그를 계속 마주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질끈 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접시를 잡은 손끝이 잘게 떨렸다.
“먹는 게 아니면 괜찮아요. 요리할 땐 비닐장갑 쓰고, 지금은 젓가락으로 집잖아요.”
재희가 대충 얼버무리자 그제야 강주는 자리를 떠났다. 무심히 흐트러지는 마지막 말만 남긴 채.
“그래도 앞으로 새우 요리는 하지 말아요. 안 먹어도 되니까.”
주방을 한가득 채우던 그라는 존재감이 사라졌다. 재희는 그제야 호흡을 크게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