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친구 1
* * *
오늘은 집안이 한적하다.
아직도 돌아가지 않은 벨마는 시내에 볼 일이 있다며 외출했다. 테사는 일자리를 알아보러 갔고, 필리아는 테사를 따라 나갔다.
으음... 흐음...
그러고보니 필리아와의 관계가 조금 냉랭한 것 같다.
평소엔 먼저 살갑게 다가와 장난을 치곤 하는 그녀였는데, 요즘은 말수도 부쩍 줄었고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도 않는다.
무언가 언짢은 게 있는 것 같지만, 당장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으니까 일단은 두고 볼 수밖에...
아무튼, 그리고 라이디는 용병 일을 알아본다고 했다.
기사가 꿈인 그녀지만, 루이스 연합 공국에는 기사단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겠지.
몇몇 도시들은 가끔 수비대의 지휘를 맡을 기사를 모집하기도 하지만, 타국 기준으로 견습 기사 수준인 별볼일 없는 직책이다.
내색을 하진 않지만, 기사로서 우대받을 수 있는 알마게스트나 바이어슈트라스 같은 강국에 가서 도전하고 싶겠지...
여러모로 내가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아서 이 곳의 임대가 끝나기 전에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해 봐야 할 것 같다.
...
어차피 그런 것들이야 아직 한참 멀었으니, 모처럼 조용한 집안에서 오랜만에 휴식을 만끽해 볼까!
“주인님, 이틀간 즐거우셨는지요? 라이디 님과 테사 님이 부재중이시니, 오늘의 시중은 메이가 담당하겠습니다.”
...라고 생각했는데, 조용히 집안을 청소하고 있던 메이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
“시중?”
“밤시중을 말씀드리는겁니다.”
“...밤시중?”
“오늘 주인님의 성처리를 메이가 해드리겠다는 뜻입니다. 메이의 의무 중 하나이니까요.”
하아...
이 작고 조용한 소녀가 무슨 말을 하는거람?
매번 이상한 소릴 하곤 하는데, 이참에 제대로 상황 정리를 해야겠다.
“그런 의무가 있다곤 들어본 적이 없는데? 게다가 넌 어린애잖아?”
“메이는 어린애가 아닙니다.”
“지금 몇 살이니?”
“주인님, 메이에겐 나이가 없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가동일수로 4년 3개월 정도입니다만.”
...
......?
4살일 리는 절대 없고, 14살인데 잘못 말한건가?
역시 빼도박도 못하는 미성년자 확정이잖아!
“미안하지만 메이가 스스로 옳은 판단을 내리고 결정할 수 있는 성인이 될 때까지 야한 일은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때까진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해주면 좋겠어.”
“하오나 메이는 안드로이드이기에...”
“무슨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안 돼. 그리고 나도 오늘은 일정이 있어서 이제 나갈 예정이야.”
“예? 라이디 님을 배웅하실 때 분명 집을 지키시겠다고...”
“그러려고 했는데 나도 돈을 벌어야겠어서, 음... 책을...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고 올 거야.”
“...”
침묵하는 메이.
내 말을 드디어 이해한 건가?
“...혹시 메이가 싫으신겁니까?”
“아니아니, 그런 건 절대 아냐! 싫은 건 아니지만...”
메이도 이 집의 다른 미녀들에 꿀리지 않을 정도로 상당한 미인이다.
작고 여린 몸에 비해 차분하고 성숙해 보이는 얼굴의 갭이 있지만, 그것 또한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올 정도니까.
하지만, 난 미성년자에게까지 손을 댈 정도로 굶주리지 않았다.
...
사실 배부르다 못해 터지기 직전이라 죽을 것 같고!
그러니 쉬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뿐이지만!!!
“메이는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외형이나 성격도 취향대로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 안드로이드에겐 나이라는 인간의 잣대를 적용할 필요가 없는 법이니, 부디 시중을 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안 돼.”
“허락해 줘...”
“그렇게 애타게 부탁해도 안 돼.”
”데헷☆ 오빠아~ 허락해주면 안 되는 거야~?”
...
하아...
이상한 말투까지 써가며 자꾸만 붙잡으려고 하길래...... 조금 귀여운 것 같긴 하지만
그냥 메이를 무시하고 현관으로 가버렸다.
“아! 맞아, 메이.”
“네, 주인... 아니, 오빠~! 드디어 메이의 봉사를 받고 싶어졌어? 메이 최선을 다 할테니까~☆”
“내 뒷머리좀 묶어서 올려줄래?”
* * *
도서관에 도착했다.
...
여기서 어제 테사와 야한 짓을 했었지...
새삼 부끄러워졌다.
마법으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일종의 노출 플레이를 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서 성별역전 플레이까지...
...
으아아!!!
잡념은 걷어버렸다. 그러려고 어제와는 최대한 다른 코디로 온 거니까.
머리도 묶어 올리고, 모자도 눌러썼으니 알아볼 사람은 없을 터.
적당히 공부하다가, 마을 구경하다가... 다들 돌아올 때 즈음 돌아가는 거야!
그래서 이전부터 읽어보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던 마법 아이템에 관련된 책을 가져와 읽기 시작했다.
어디보자... ‘마법 아이템. 마도구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 태생적 의미는 조금 달랐다’라...
흐음...
대충 보아하니 쓸데없는 내용이 꽤나 많은 것 같다.
그러니 휘리릭 넘겨가며 볼만한 부분을 탐색해야겠...
"귀여운 소년! 무슨 책 읽으러 왔니?"
“네? 저 말씀이신가요?”
"뭐야, 여자애였잖아? 칫..."
“에... 에? 아니거든요!?”
“그럼 남자아이니?”
“아... 그건...”
밝은 갈색 머리의 여성이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보고 있다.
뭐 하는 사람이지?
다짜고짜 여자애라고 하길래 발끈했지만, 미셸이나 알자스가 아닌 다른 인퀴지터일 수도 있으니 일단 남자라는 사실을 밝히진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이 얼굴을 보고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초면에 실례라고요!”
...
대놓고 부정하긴 싫어서 에둘러 표현했다.
“미안미안! 그 외모에 남자아이였으면 정말 환상적이었을텐데... 흐흐... 상상만 해도 꼴ㄹ... 아, 아무튼 방해해서 미안해.”
그녀는 다짜고짜 사과하곤, 답을 듣지도 않은 채 돌아...
가나 싶었는데...
"맞아! 귀여운 소녀, 그럼 혹시 또래 남자 친구들 중에 너처럼 귀엽게 생긴 애 없니?"
"하, 저 성인이거든요?"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와 키가 비슷하다는 걸 보여주었고
“아? 아아... 미안해, 어여쁜 소년인가 싶었던 것 때문에 정신이 팔렸었네.”
다행히 그것 만으로 성인임을 납득한 것 같다.
하아... 왠지 뭔가...
점점 비참해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그보다 왜 갑자기 찾아와서 남자냐고 물어보신 거죠?”
“음... 아직 우리가 비밀을 공유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잖아?”
...
인퀴지터인가 싶어 경계하고 있었는데 별볼일 없는 사람인 것 같다.
“네네, 안녕히 가세요. 책이나 마저 읽을 게요. 그럼 이만.”
슬슬 짜증나기 시작해서 관심을 끊고 자리에 앉으려고 했는데, 순간 그녀가 내 팔을 붙잡았다.
“무슨... 아직 볼 일이 남았어요?”
“너, 생각해 보니 쓸모가 있을 것 같은데? 날 조금만 도와주지 않을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