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첫 경험 1
* * *
똑똑
"크리스, 자고 있어?"
"아니, 들어와."
야심한 밤.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테사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평소의 것과 별다를 바 없는 속이 비치는 것만 같은 새하얀 원피스가 눈길을 끌었지만, 역시 예쁘고 잘 어울린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럼 실례할 게... 뭐야, 선객이 있었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잠이 오질 않는다고 해서."
"자고 있을 땐 좀 낫네. 그런데... 얘 울었어?"
"응? ...그러게? 딱히 별 일은 없었는데... 곤히 자고 있는 줄 알았더니... 흐음..."
벨마는 옆에서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새근새근 자고 있었는데, 눈가가 촉촉하고 뺨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뭐, 크게 하품이라도 했나 보지.”
"그보다 내일, 어떤 결론을 내릴 지는 정한 거야?"
"아니, 아직 잘 모르겠어."
"원한다면 지금 선택지를 하나 줄여 줄 수도 있는데, 어때?"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니까 꿈 깨. 이대로 저질러버리면 라이디한테 미안하잖아?"
"쳇... 그놈의 라이디 타령은."
테사는 원피스의 어깨끈을 스르륵 내리다가, 내 답을 듣곤 다시 올려버렸다.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감상할 기회가 날아가서 조금은 아쉬웠지만...
여동생 같은 벨마가 옆에 있어서 그런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몰래 테사에게 갈까 싶었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마치 현자타임이 찾아온 것마냥 딱히 하고싶은 생각이 들질 않는다.
...
내일의 일이라...
"처음이라는 거, 테사에게도 중요해?"
"아니."
"...응!?"
당연히 그렇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나와서 순간 벙쪘다.
"크리스는 애써 무시하고 있지만... 사실 크리스의 처음은 라이디가 가져간 게 맞잖아? 그러니 이미 끝난 일이고... 당시엔 별 감흥이 없었는데 막상 그 사실을 곱씹을수록 조금은 시샘이 나긴 해."
"그런가..."
"응. 그래서 괜스레 '나도 크리스의 처음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처음 중 하나라...
...
!!!
그 말을 들으니 순간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어쨌든 처음이기만 하면 되는 거지?"
"응? 응... 그렇긴 한데...?"
"좋아. 내일 마저 이야기하자. 피곤하고 졸려서 자고 싶어. 테사도 얼른 가서 푹 쉬어."
"싫어! 나도 크리스 옆에서 잘래!"
"다음에 같이 자면 되잖아? 셋이 눕긴 좁으니까..."
"벨마는 재워주면서 나만 내치려고? 안되지. 곧 죽어도 오늘은 크리스 옆에서 잘 거니까!"
나는 살짝 한숨을 쉬어 보였지만, 사실 테사와 함께 잠드는 게 싫을 이유는 없다.
결국 못이기는 척하며 조심스레 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벨마를 사이에 둔 채 테사와 나란히 침대에 눕게 되었다.
"후후, 크리스. 이러고 있으니까 마치 가족 같지 않아?"
"이미... 가족... 이야..."
"..."
뒤이어 테사가 무언가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왜인지 너무 피곤했던 나는 듣지 못하고 곧바로 잠에 들어버렸다.
* * *
"좋아요! 대신 앞쪽은 무조건 제 몫이에요. 타협은 불가능해요!"
"라이디,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에... 에...?"
...
뭔가 예상과는 다른데...?
다음 날 아침, 테사와 함께 라이디의 방에 찾아가 어젯밤에 생각해 낸 '아이디어'를 알려주었다.
테사는 동의하고, 라이디는 반대하지만 이 방법 뿐이라고 설득하면 어쩔 수 없이 납득할 거라고 봤는데...
흔쾌히 받아들이는 라이디의 모습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하아? 첫 경험을 뒤로 하라니, 너무 변태같지 않아? ......하지만 그거라도 어디냐 싶긴 하네."
테사는 라이디를 노려보며
"라이디, 분위기에 취해서 뒤쪽까지 새치기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럼요. 물론이에요!"
쏘아붙였고, 라이디는 활짝 웃으며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제가 먼저 해도 괜찮을까요?"
"알았어. 양보해 줄게. 대신 소원 하나 들어줘."
"소원? 어떤 건가요?"
"나중에 알려줄게."
"...이상한 부탁은 아닌 거죠?"
"걱정 마, 라이디라면 가능한 거니까."
"그렇다면야... 알겠어요."
둘의 대화가 마무리되어갔다.
테사는 이내 배고프다며 자리를 비켜 주었고, 나는 라이디와 단 둘이 남았다.
"크리스... 그럼 지금부터...?"
라이디는 이불을 활짝 걷어버리곤,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살짝 부스스한 모습, 어깨끈이 조금 내려간 슬립으로 인해 슬쩍슬쩍 보이는 커다랗고 뽀얀 유방의 자태...
평소와는 달리 너무나 무방비해 보이는 갭에, 모든걸 잊고 꼬옥 안기고 싶은 아름다운 자연과도 같은 매력에...
순간 넘어갈 뻔했지만, 이 악물고 꾹 참았다.
"아니아니! 어서 씻고 옷 입어. 일단 밖으로 나가자!"
"...에? 어딜 가려구요?"
"가 보면 알거야. 벌써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있을 정도니까 얼른 챙겨서 나와. 알았지?"
"크... 크리스!?"
당황한 라이디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하며 외출준비를 하기 위해 내 방으로 돌아갔다.
* * *
잠시 후, 라이디와 나는 테레즈 시내로 향했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고, 함께 시내를 조금 걷다가 옷가게에 들러 쇼핑을 하고...
그러다 아담하면서도 한적해 보이는 카페가 보여, 라이디가 쉬고 가자고 해서 들어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주문한 건 아이스크림, 반면 라이디는 아이스 커피였다.
"크리스, 한 모금 마셔볼래요?"
조금씩 홀짝이는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었더니, 내가 마시고 싶었다고 오해했는지 라이디가 내게 잔을 들이밀었다.
뭐, 목이 조금 마르기는 하니까 넙죽 받아 마셨는데...
"으익!? 크으... 햐아!!!"
홀짝이는 이유가 있었구나!
순간 머리가 띵할 정도로 엄청 차가웠다!
그래도 한참을 온 몸을 비틀며 차가움에 저항했더니 금세 괜찮아졌다.
그리고, 이번엔 라이디가 가벼운 미소를 지은 채 내 쪽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먹여주라는 거지? 알았어. 자, 아~"
"아~ 앙! 으흠~ 달콤해요!"
라이디는 나를 따라하듯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달달함을 표현하다가, 컵을 반 바퀴 돌리고 커피를 마셨다.
정확히 내 입술이 닿은 곳으로 마시다니, 능청스럽기도 하지...
물론 잠깐 나도 고민했었으니까 겨우 눈치챈 거지만...
몰래 컵을 돌리고 마실까 하다가 괜스레 부끄러워서 관뒀지만...
"크리스."
"...응?"
"둘 만의 데이트가 정말 즐거워요! 그런데... 슬슬 여기까지 나온 진짜 이유를 알려주지 않을래요?"
"...모르겠어?"
"네. 무언가 눈치를 채야 하는 거였나요?"
"하아..."
일부러 장난치는건가 싶었지만, 라이디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치다.
"알려줄 게. 절대 놀리면 안 돼. 알았지?"
"그럼요! 절대 놀리지 않을게요!"
천진하게 웃으며 바라보는 라이디의 모습에,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