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크리스의 실험 1
* * *
다음 날 아침,
집을 보러 셋이 나서는 걸 보고, 나는 조금 시간을 두고 여관을 나섰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목표하던 가게 앞까지 빠르게 걸어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들어가려...
"크리스? 오랜만이네요. 그보다 여긴 제가 자주 들르는 상점인데... 흐응, 이미 그에게 함락되어 암컷이 되어버린 건가요?"
다가,
돌연 세상에서 가장 기피하고 싶은 무서운, 끔찍한 목소리가 들려서...
나는 손잡이를 잡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 * *
"크리스가 커피를 왜 사는진 모르겠지만,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그 가게에 들어갈 생각이 아니었다고 어떻게든 얼버무리며 미셸을 근처의 카페로 데려왔다.
하아...
당장 도망가고 싶지만, 지금은 필리아도 없으니 불가능하다.
최대한 비위를 맞춰 주면서, 그녀의 속셈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왜 그러세요? 제 얼굴에 뭔가 묻어 있기라도 한 건가요?"
"아... 안 잡아가요?"
"다른 인퀴지터가 노리고 있는 대상에 손을 대는 건 예의가 아니죠. 따지고 보자면 제가 노리고 있던 크리스를 알자스가 채간 거지만... 애초에 그는 막무가내로 행동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있어요."
휴...
잡아갈 생각은 없다니 약간은 안심이 된다.
그러나 그녀는 날 지독하게 괴롭혔던 전력이 있다 보니, 그다지 대화를 나누고 싶진 않다.
"듣자 하니 그가 여성의 몸으론 서지 않는 마법을 걸었다던데, 차도가 있나요?"
"아뇨."
"쉽지 않겠죠. 웬만한 꼼수론 풀리지 않을 거예요. 특히나 그런 고차원적인 마법을 아무렇지 않게 건다는 건, 알자스는..."
"..."
당신 때문에 시도도 못 하고 있다고! 미셸!!
젠장! 오늘이 마지막 기회인데!!!
"그보다, 그 저주 덕분에 마음은 편하지 않아요?"
"...네?"
"인퀴지터에게 쫓기지 않고 있잖아요. 그 마법을 풀고 나면... 알자스의 손아귀에서 해방되고 나면 다시 제 표적이 될 거예요. 저번엔 어떻게 도망간 건지 모르겠지만, 두 번 속진 않을 거니까."
"..."
인정하긴 싫지만, 맞는 말인 것 같긴 하다.
비록 성욕을 해결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지만,
테레즈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아무 걱정 없이 맘껏 놀았으니까.
게다가 미셸과 다시 만나서, 이렇게 카페에서 수다를 떨 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고...
"크리스, 혹시... 매지션즈를 뒤엎어 버릴 생각은 없나요?"
"뒤엎어요?"
"네. 누가 봐도 매지션즈는 정상적인 집단이 아니잖아요?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도록 강제하는 대신 지나친 복지를 펼치기 때문이니까... 한 번 정도는 썩은 물을 갈아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매지션즈를 뒤엎는 것... 크리스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구하는 게 가능한 건 당신뿐이라고 봐요."
"미셸은 인퀴지터인데 용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네요."
"그야, 저도 매지션즈 출신이니까요."
"......에?"
...
미셸의 말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를 해석하느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니, 그 의미는 바로 파악했지만...
아마도 나의 수치심을 받아들이는 부분이 필사적으로 이해를 거부하고 있었다.
"저도 크리스처럼 운명에 저항하려 했지만, 탈출하지 못하고 결국 받아들여야만 했어요. 가끔은 당시 제 곁에 크리스가 있었다면... 제 운명도 바뀌지 않았을까 하고 망상하곤 해요."
"그...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항을 멈추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걷고 있는 크리스는 정말 대단..."
"미셸, 남자였어요?"
"무... 무슨 소릴! 저는 분명한 여성이에요!!!"
"미안해요. 그... 낭자애...?"
"아니라니까요!!!"
"하지만, 매지션즈는..."
"한때는 그런 추악한 성별이었던 적도 있었지만, 부... 분명 여성이니까... 흑... 흐윽..."
테사의 일도 있었기에 확실히 해두고 싶었지만, 미셸이 울상을 짓기에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인식저해 마법이라거나... 용케 매지션즈를 속여 넘겼거나...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
생각해 보면, 테사와 달리 가슴도 전혀 없는 게 아니고... 애초에...
"크리스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전 일어나야겠어요!"
"..."
화를 내며 일어나는 미셸이었지만, 난 붙잡지 않았다.
끔찍했던 기억들이 더욱더 끔찍해지던 상황에서, 듣던 중 다행인 얘기였으니까!
지나간 건 일단 잊어버리고, 아직 시간은 있으니 미셸이 가자마자 즉시 가게로 향하면...
"그래도... 같이 있자는 제안은 아직 유효해요. 매도하는 크리스도... 나쁘지 않을지도♡ 그러니 저번처럼 즐기고 싶은 마음이 들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그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면 안내해 줄 거예요."
그녀는 내 답을 듣지도 않고, 자신의 커피 값을 두고 떠나갔다.
그녀... 그러니까...
그...
"으아아아!!!!"
미셸이 카페를 나가고, 긴장이 풀리자마자 저번에 괴롭힘을 당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심지어 상대가 여자도 아니었다니!!!
* * *
미셸을 만난 일로 박살 난 멘탈을 겨우 수습하긴 했지만...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가게'에 찾아가기도 싫었던 나는, 결국 오늘의 일정을 포기하고 목걸이를 따라 일행을 찾아갔다.
테레즈 도시 외곽의 외딴 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니, 드넓은 공터가 나왔고...
3층짜리로 보이는 상당히 큰 저택의 앞에 라이디가 나와 있었다.
"라이디!"
"아! 크리스! 마침 잘 왔어요. 여기로 할까 하는데, 어때요?"
"지나치게 좋은 거 아냐? 이 정도의 집을 테사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까?"
"교외 지역이라 인기가 없어서 그런지 그다지 비싸진 않아요. 한 달 정도는 여유롭다고 하네요. 같이 안쪽도 보러 갈까요?"
"아냐, 라이디가 좋다고 할 정도면 더 검토할 필요는 없지. 그보다 필리아랑 할 얘기가 있는데..."
"크리스 님! 필리아를 부르셨나요?"
순간, 옥상 너머에서 필리아가 날아왔다.
"응. 저쪽에 가서 얘기하자."
"크리스, 무슨 일 있는 거예요?"
"별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저 필리아하고 의논해야 하는 거라... 금방 돌아올 테니까."
"아... 알았어요..."
"자, 필리아, 빨리 따라와."
"아앗! 크리스 님!?"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라이디를 애써 무시하며,
나는 근처의 숲으로 필리아를 끌고 갔다.
* * *
"이쯤이면 됐잖아요? 무슨 일이신가요, 크리스 님?"
"그... 그러니까..."
"..."
깊은 숲속까지 끌려온 필리아는 날 제지했다.
그러나, 치밀어오르는 부끄러움에 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도 필리아는 한동안 아무 말없이 침착하게 기다려 주었고,
덕분에 마음을 다잡은 나는 오른손으로 왼손에 마법을 시전했다.
이내 샛노란 빛이 반짝이더니...
어느새 손 위엔 작고 긴...
...
손가락 두 개 정도 크기의...
작은 '물건'이 생겨났다.
"이걸로 저주를... 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로션을 구하질 못했어..."
"...필리아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잘 알겠지만, 그냥 라이디 님과 해버리는 게 낫지 않아요?"
"안돼! 라이디와의 처음은...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단 말야!"
"하지만, 라이디 님이 실망하시지 않을까요?"
"으... 그... 그렇긴 한데..."
라이디에게 들킨다면 분명 실망할 것 같긴 했다.
그래도, 그녀 앞에서 남자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으니까...
필리아 앞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그녀의 도움 없이 실험을 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더는 없었다.
"자위니까 괜찮은 거 아닐까?"
"무... 물론이죠? 그런데... 이걸로 마법이 풀릴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당연히 그걸 바라고 있지?"
"그 경우, 라이디 님과 테사 님이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실 테고..."
"아..."
"그 이후 펼쳐질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몰래 시도하고 싶으시다면 필리아는 비밀을 지켜드리겠지만... 크리스 님, 지금 평생 후회하실지도 모르는 일을 벌이는 건 아닐까요?"
"..."
...
그저 발기부전의 마법만 풀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평소라면 별거 아니라고 치부하고 넘겨도 되겠지만, 크리스 님은 하렘을 차리겠다고 선언했잖아요? 그건 그저 단체로 야한 짓을 하자는 게 아닌... 기쁜 것도, 슬픈 것도 다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요."
...
어떻게든 몰래 해보려고 시도하느라, 그 이후의 일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는데...
"앞으론 지금처럼 혼자... 아니, 필리아와 둘이서만 몰래 무언가를 시도한다는 것만으로도 두 분은 크게 상심하실 거예요. 게다가 언젠간 보여줄 모습인데 부끄러워하실 게 있나요?"
"으으... 알았어. 필리아의 말이 맞는 것 같아..."
"잘 생각하셨어요. 그럼 집으로 돌아가서 모두와 의논해 보도록 하죠!"
"으응..."
그녀의 말처럼 모두를 포용하겠다고 선언한 이상,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든 부끄러움을 꾹 참아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필리아와 함께 우리의 새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