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벨마 (하) 2
* * *
"언제 이렇게 많이 준비한 거야? 너무 맛있고 감동적이야. 고마워!"
라이디가 저녁으로 호화로운 도시락을 싸 와서, 정원에서 함께 식사하고 있다.
"후훗, 시간을 들인 보람이 있네요. 내일 점심에도 맛있는 거 잔뜩 준비할 테니 기대해도 좋아요. 여기 과일도 드세요! 자, 아~"
"아~ 냠... 이것도 맛있네!"
사랑이 듬뿍 담긴 도시락에, 연인 사이에 먹여주기라니!
너무 행복해!
...
다만, 나의 행복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살짝 거슬린다.
"그런데 벨마는 안 먹어? 배 안 고픈 거야?"
"흐응... 입을 버리기는 싫지만, 스승의 얼굴을 봐서 조금은 먹어줄게."
벨마는 감자튀김을 하나 집어 먹더니 얼굴을 찡그린다.
걱정이 들어서 라이디를 바라봤지만, 다행히도 평온해 보였다.
아마 벨마의 성격이 나쁜 걸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러려니 하는 듯하다.
"스승은 이 여자를 좋아하는 거지?"
"아ㄴ..."
벨마의 뜬금없는 질문에 '아니'라고 즉답하려고 했다.
나 자신을 철저히 여자라고 속이고 있는 상황인데, 라이디를 좋아한다고 하면 여자 사이에 그렇고 그런 관계냐고 이상하다는 듯이 볼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레즈비언이라고 오해를 사는 것보다도 라이디를,
그것도 그녀의 앞에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싫다.
그래서 그냥 질러버렸다.
"맞아. 라이디를 좋아해."
"흠... 스승의 엄청난 잠재력이나 고결한 인품에 비해선 별거 없는 것 같은데, 어째서 스승이 이런 경박한 여자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뭐?"
"맛은 있지만, 영양가는 전혀 없는 이 감자튀김 같은 존재라고 할까? 내가 스승이라면 한 번 따먹고 버렸을 거야. 뭐, 먹을 만하면 노리개로 삼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겠네. 아, 그래서 같이 다니는 건가?"
하아...
빌어먹을 꼬맹이가 선 넘네...
...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귀족 제자님의 심기를 건드릴 순 없다.
이 꼬맹이한테서 어떻게든 마법을 배워야만 인퀴지터를 물리칠 수 있으니까.
라이디와 함께 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삼키며 라이디의 편을 들어 주었다.
"아니야. 라이디는 착하고 예쁘고 요리도 잘할 뿐만 아니라 기사를 지망할 정도로 전투도 뛰어나. 나 같은 범인한테는 과분한 사람이야."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마녀의 강력함을 넘어설 순 없어. 평범한 싸움꾼 정도는 조금만 머리를 쓰면 무조건 이길 수 있으니까 자신감을 가지라고, 스승."
"벨마 님의 말씀에 어폐가 있네요. 근거리에서 1:1로 붙으면 당연히 검사가 유리하죠."
"무슨 소리야? 누구든, 어디서든, 어느 상황이든 항상 벨이 유리한 게 당연하잖아? 이길 자신 없어서 입으로만 나불대는 거야? 역시 스승한테 어울리지 않는 격 떨어지는 여자네."
"......"
라이디는 반박하지 않고 그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나만큼이나... 아니, 훨씬 많이 화가 나 있겠지.
그리고 나랑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꾹 참아가며 속으로만 앓고 있겠지.
나 때문에 라이디도, 테사도 마음고생이 심한 것 같아 걱정이지만...
지금은 그저 참아 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데...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네. 좋아. 특별히 기회를 줄 테니까, 덤벼 봐. 제대로 싸울 줄 아는 마녀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줄 테니까."
"좋아요."
"기세 좋네. 살짝 평가를 올려줄게. 닭껍질튀김 정도? 그 이상은 절대 무리."
"잔뜩 얻어맞고도 그런 소리가 나올지 지켜보겠어요."
라이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아 내려놓고, 검집을 든 채 정원 중앙의 공터로 향했다.
재빨리 따라붙은 나는,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우려를 표했다.
"저기... 라이디?"
"걱정하지 말아요. 어린이 상대로 전력을 다할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벨마가 어떤 마법을 쓰는지 모르는데..."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그저 어른으로서 조금 가르침을 줄 뿐이니까요."
단호하게 말하는 라이디를 계속 막아설 순 없었다.
벨마는 한 번 혼나볼 필요가 있긴 하니까.
"더 가까운 데서 시작해도 되는데?"
"이 정도면 충분해요."
정원의 공터에서 라이디와 벨마가 대치하고 있다.
"시작하죠."
천천히 검집을 치켜드는 라이디.
팔을 높게 들어 올린 자세를 보아하니, 시작부터 진심으로 덤빌 기세다.
"스승, 내가 어떻게 금발 왕가슴을 찍어누르는지 잘 보고 있어."
그러나, 벨마는 살짝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서서 내게 말을 건넬 뿐이었다.
"하압!"
벨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라이디가 쇄도해 들어간다.
벨마는 별다른 저항 없이 접근을 허용했다. 그리고
투쾅!
벨마를 향해 라이디가 검집으로 내려치자,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바위 파편이 흩날렸다.
...
익숙한 장면이다.
간신히 사람의 모양을 만들려고 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바위,
검집을 막아냈지만, 그 대가로 파삭하고 부서져 내리는 모습.
벨마는 내 피규어 소환 마법을 흉내 내고 있었다.
"가슴만 큰 줄 알았더니, 힘도 무식하게 세잖아?"
위기감을 느꼈나 싶지만, 벨마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막을 순 없을 거예요! 핫! 하앗!"
라이디가 휘두를 때마다, 바위가 무참히 부서져 나간다.
그러나 벨마에게 유효타가 들어가진 못했다.
그녀는 라이디의 다음 공격의 궤적을 예측하고,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새로운 바위를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입으로 무언가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 거죠? 흣...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받는 그 뛰어난 실력으로 덤벼 보시라구요!"
"..."
라이디가 도발했지만, 벨마는 그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울 뿐이었다.
바위를 소환하다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그대로 검집에 얻어맞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벨마는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아니, 마치 누가 공격하고 있지 않은 것 마냥 태연했다.
그리고, 이내 벨마의 입이 멈췄다.
"흣!"
역시나, 그 모습을 정확하게 짚어낸 라이디는 급히 거리를 벌렸다.
무언가 온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지만, 벨마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라이디는, 천천히 벨마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검집의 사거리 내에 들어와도 반응을 하지 않자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벨마는 바위를 깔아 공격을 막아낼 뿐이다.
"흡, 공격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건가요? 계속 막고만 있을 건가요?"
"어차피 넌 뚫지도 못하잖아? 한 방에 끝내줄 테니, 기다리고 있어."
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는 벨마.
이번엔 그 시간이 길지 않았고, 주문이 끝나자마자 라이디는 한 발짝 물러섰다.
"하, 헛수작일 뿐이었네요. 이번엔 속지 않아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다가올 마법을 유의하던 라이디는, 망설이지 않고 벨마를 향해 검집을 내지른다.
"좋아, 걸렸다!"
벨마는 양손을 라이디를 향해 뻗었다.
"큭...!"
라이디는 황급히 검집을 들어 몸을 가렸지만...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어느새 벨마의 손에는 과도가 들려 있었고,
그것이 라이디의 목을 겨누고 있을 뿐이었다.
"금발 왕가슴이 멍청하긴 해도 센스는 있네. 하지만 팔이 안 닿아서 확실히 이겼다고 할 수가 없잖아? 쳇, 십 년만 늙었어도!"
"......"
라이디는 아무 말없이 빈 도시락과 검을 챙겼다.
"저기... 라이디?"
그리고, 문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라이디!!!"
"스승, 어디 가? 밤새 벨마에게 마법 사사하려고 저녁 먹은 거 아니었어!?"
눈치도 없이 잔뜩 불만을 표하는 벨마를 뒤로한 채, 나는 라이디를 쫓아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