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벨마 (하) 1
* * *
"......네?"
"벨의 슬럼프를 해결할 수 있는 건 멍청한 언ㄴ... 아니, 스... 스승뿐인 거 같아...요... 부디 제... 제자로..."
"제자로... 받아주라고요? 그러니까... 제가 스승을 하라고요?"
"두 번 말하기 싫으니까, 알아먹었으면 빨리 수락하라고!!! ...요!"
"하지만 전 마법을 잘하지도 않는 데다, 벨마 님께 알려드릴 것도 없어서..."
"그만! 암튼 벨을 제자로 받아! 지금 당장 받아주지 않으면 여기서 죽어버릴 거니까!!!"
"..."
처음엔 농담인가 싶었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대는 벨마를 보니 웃음기가 싹 가셨다.
아무리 어린애라곤 하지만 방심할 수 없는, 진짜 저지를 것만 같은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알았어... 알았어요! 스승이 되어 줄 테니까 진정해요!"
"...정말 제자로 받아주는 거야? ......에요?"
"응. 그리고 어렵게 대할 필요 없어요. 부디 크리스라고 편하게 불러줘요."
"크리스... 스승이 되어 주는 대가로 벨한테 바라는 게 있겠지? 돈이라던가 권력이라던가... 뭘 원해? 뭐든 준비할 테니까!"
"대신 저한테도 마법을 알려주세요. 그리고 부디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다뤄주세요."
그건 마법을 알려줘야 할 사람이라서라기보다는... 사심이 잔뜩 담겨 있지만.
성격이 좀 나쁘긴 해도, 벨마는 장차 자라면 초특급 미녀가 될 게 분명해 보이는 귀족 영애다.
이대로 허무하게 잃는 건 그의 남편이 될 사람에게도, 국가적으로도 지대한 낭비인 게 뻔하잖아?
"피, 진짜 자살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바보지만 착한 스승이라 다행이네. 이 계약, 벨의 스승이 되어주는 거 절대 물리기 없는 거야! 그리고 아무리 변변치 못해도 스승이니까, 벨한테 하대하는 걸 허락해 줄게!"
다시 본연의, 싸가지없는 모습을 되찾은 벨마.
그래도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묘하게 흐뭇한 감정이 일었다.
자기한테 관심을 가져달라고 칭얼대는 여동생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런데, 이럴 거면 꼬맹이가 스승을 하고 크리스한테 궁금한 거 알려주라고 하면 되는 거 아냐?"
뒤에서 잠자코 보고 있던 테사가 궁금했는지 한마디 거들었다.
"생각이 짧네. 혹시 뇌에 주름이 없어? 아니면 척수반사로 말이 튀어나오는 거야?"
"...뭐?"
"하아... 한심하네. 여기서 벨이 자초지종을 알려주면 더 비참해질 테니 스스로 알아내 봐. 금붕어보다 못한 지능이라도 열심히 굴리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아니, 금붕어라기보다는 은붕어가 어울리려나? 아무튼 생각이 났든 얻어걸려서든 간에, 이유를 알아내기만 하면 가볍게 박수 정도는 쳐 줄 테니까."
"베... 벨마! 테사랑 조금 의논하고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줘."
정말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황급히 벨마를 방 밖으로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
"테사, 괜찮아?"
"괜찮겠냐? 어린애만 아니었으면 이미 죽빵을 갈겼어."
"잘 참았어. 그저 어른이 참아야지 어떡하겠어. 그보다 곤란하게도 루이스에서 며칠 더 있어야 할 것 같네..."
"그럼 하루 이틀 만에 마법을 배울 줄 알았어? 난 도서관에서 책이나 실컷 읽다 올 테니까, 저거한테 배운 거 나한테도 알려줘."
"도서관? 벨마의 저택에선 꽤 먼 곳이잖아. 그 정도로 멀리 떨어지면 인식저해 마법이 잘 작동할 수 있을까?"
"맘씨를 곱게 쓰고 싶어도, 난 절대 저 빌어먹을 꼬맹이랑 같이 있기 싫단 말야. 그러니까 선택해. 내 옆에서 조용히 훈련하던가, 아니면 알아서 잘 사리던가!"
"스승, 저 은붕어가 괴롭히는 거야? 벨이 쫓아내 줄까?"
테사의 호통에, 벨마가 문을 열고 다시 들어왔다.
“아냐. 별 일 아니니까.”
"스승이 무슨 걱정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이 주변에선 날 당해낼 사람이 없으니 걱정하지 마. 약골 스승은 이 벨마 에르겐 님이 성심성의껏 지켜줄 테니까!"
"하하. 꼬맹이한테 보호받을 수 있다니 부럽네, 크리스. 한동안 내가 필요할 것 같진 않으니까, 배우는 거 끝난 뒤에도 내 얼굴이 기억난다면 찾으러 와."
말을 마치자마자 테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서버렸다.
"스승, 방해꾼도 사라졌으니 이제 출발하자."
"잠깐! 라이디에게도 알려줘야..."
"아... 금발 왕가슴? 어디에 있는데?"
"잠깐 외출했어."
"피이, 그 가슴 크고 멍청하게 생긴 여자 기억하고 있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집으로 데려와."
"알겠습니다."
벨마의 명령에 '피이'라고 불린 메이드는 내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됐지? 이제 출발하자, 스승."
"기다려줘. 짐은 챙겨야..."
"피이가 알아서 가져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쯧쯔... 이래서 평민들은..."
귀족의 불같은 성화에, 평민은 잠자코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 그래서 도합 30권을 다 읽고도 모자라 세 번 더 정주행하고, 몇 번이고 심상을 확인하고, 그제야 피규어를 만들 준비가... 아니, '아내를 맞이할 준비'가 됐다고 하더라고. 그쯤 되니 너무 지쳐서 결과물은 그냥 대충 만들었는데, 자기가 생각하던 완벽한 여인이 강림했다고 호들갑을 떨더라. 정말 별난 녀석이었다니깐?"
"헤에, 스승의 마법은 그때도 대단한 경지에 올라있었구나! 역시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집념이, 자칫 광적이라고 보일 수도 있을 만한 성공에 대한 집착이 있어야 한계를 넘을 수 있는 거네!"
"그... 그런가?"
벨마의 요청으로, 나는 매지션즈에서 피규어 공장장으로 살아가던 때의 일화들을 얘기해주고 있었다.
물론 낭자애라는 걸 들키긴 싫으니 적당히 각색하고 있지만...
이런 게 정말 도움이 될까 싶은 별거 아닌 이야기들인데도. 벨마는 제멋대로 미화해서 해석하고 있다.
"이번엔 벨이 알려줄 차례야. 지금까지 다른 여섯 속성의 마법을 모두 실패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바위 속성을 테스트해 보자."
"후... 알았어."
...
......
하기 싫다.
태생부터 많지도 않던 자신감은 바닥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한없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벨마가 각 속성의 가장 기초적인 마법들을 사사해 줬지만, 제대로 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흡... 하앗!"
...
그리고 방금, 이건 절대 실패하지 않겠지 싶어 마지막까지 아껴두었던 바위 속성의 마법조차 실패했다.
"스승은 정말 재능이 없네. 대체 어떻게 마법사가 된 거야?"
"쳇... 미안하게 됐네요. 이젠 나도 모르겠단 말이야. 그리고 마법사가 아니고 마녀잖아."
"그건 중요하지 않고. 아무튼, 이 정도로 스승이 마법을 익히기 어려워하는 건 사실 재능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
"그럼?"
"그 바위 폭파하는 오리지널 마법... 이름이 있었나?"
"......"
이름이 있긴 한데...
굳이 말하기는 싫다.
"그거 여차여차 익히긴 했지만, 생각보다 잘 안 된다고 했잖아? 일반적인 마녀들은 아무리 처음 배우는 마법이라도 그렇게까지 못하진 않아. 이 정도면 거의 마법을 못 쓰는 사람이라고 할 정도인걸?"
"그래?"
아무튼 마법을 쓰고는 있었으니까, 내 상황이 그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다.
물론 매지션즈에선 발에 채는 게 마법사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마법사들'과는 교류의 벽을 쌓았기에 남들이 얼마나 잘 배우네 못하네 하는 건 들은 바가 없었다.
"반면 피규어를 만드는 마법. 그건 매우 기초적인 마법이 발전한 거지만, 웬만한 마법들은 다 기억하고 있는 벨로서도 처음 보는 수준일 정도로 매우 정교한 마법이야. 고위급 마법을 익힌다고 해도 대체로 마법의 위력을 높이려고 하지 정교함을 높이려고 하진 않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하지. 오히려 바위 소환 마법만 10년간 갈고 닦은 스승이 이상한 거라고."
"하하..."
벨마가 나를 엄청나게 올려치기 하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비유하자면 스승은 고급 레스토랑의 요리사라고 볼 수 있어. 정말 평범한 재료만으로 엄청 호화스러운 요리를 만들어내는 일류 쉐프인데, 어느 날 갑자기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만들어내라고 하면 당황하다가 실수하는 격이지. 반면 최고급 재료를 건네 주고 요리를 시켜도, 그것들을 당장 어떻게 써야 하는 지 모르는 거고."
"흠..."
"결국 벨과는 정반대의 상황인 거야. 하지만 크리스의 스승으로선 벨을 대체할 수 있는 마녀가 많지만, 벨은 스승을 놓치면 끝이니까..."
"뭐?"
"...잊어버려. 이대로 마법도 익히지 못하고 동정 졸업도 실패할 한심한 크리스가 너무 불쌍해서 벨이 특별히 스승으로 받아줬을 뿐이라는 거야!"
똑똑
갑자기 저택의 뒷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문이 열리고, 정원으로 나온 메이드가 벨마에게 말했다.
"주인님, 라이디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