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트랩 매지션즈-41화 (41/114)

〈 41화 〉 벨마 (상) ­ 2

* * *

벨마가 방에 틀어박힌 후, 메이드의 안내에 따라 접객실에서 기다렸다.

늦은 점심도 얻어먹었고 슬슬 저녁 시간이 되어가고 있을 정도지만, 벨마는 식음을 전폐하고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몇 번이고 메이드를 올려보냈지만 돌아오는 건 기다리라는 말뿐.

"저... 그...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벨마 님께 물어봐 주시면 안 될까요?"

"알겠습니다."

귀찮기도 할 법한데, 그저 담담하게 반응한 메이드는 또다시 계단을 올라간다.

"크리스, 이번에도 기다리라는 말이 나오면 그냥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알았어. 그렇게 할게."

기다리는 것도 지치지만... 우리는 특히 테사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으니까.

아직까진 그가 가만히 있어서 다행이지만,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면 될 일도 그르칠 게 뻔하다.

"주인님께서 여러분이 가셔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추후 직접 찾아갈 테니 절대 도시를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한참을 기다리게 해놓곤 지가 뭔데 가라 마라야 빌어... 읍읍!"

역시나!

이 도시의 셀럽이자 천재 마녀에 유력한 귀족 영애이기까지 한 분을 향해, 그것도 그 사람의 집에서 겁도 없이 욕하려고 하는 테사.

황급히 입을 막았으니 망정이지 메이드가 들었다면 큰 사고로 번질 뻔했다.

"그럼 근처의 여관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벨마 님께 전언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라이디, 어서 돌아가자."

고개를 끄덕이곤 재빠르게 우리의 짐을 대신 챙겨주는 라이디.

나는 손가락을 열렬히 깨물어대는 걸 참아가며, 테사를 저택 밖으로 끌어냈다.

­­­

"하아... 어렵네. 이렇게나 푸대접을 해도 신분 때문에 참아야 한다니..."

"저분이 특이한 거지, 귀족분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에요. 그리고 크리스가 너무 많이 참았어요. 화를 내고 와도 벨마 님이 뭐라 할 처지는 아니었어요."

"그런가?"

이 근방의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바이어슈트라스 왕국의 건립을 위해 쫓겨난 자들이라, 국제적으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진 못하는 편이다.

게다가 루트 공화국이 가까워서 더욱더 귀족의 권위가 높지 않은 지역이라는 건 알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매지션즈에서 보냈는지라 그냥 귀족이라는 것 자체가 적응이 잘 안 된다.

"뭐, 그건 이제 잊어버리자. 그보다 고생했어, 테사. 기분전환도 할 겸 맛있는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

굳이 테사를 꼬집어서 물어봤지만, 그는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벨마의 저택을 나선 이후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있다.

그 정도로 벨마를 만난 게 기분이 나빴나?

"저기... 전 볼 일이 있기도 하고, 점심을 많이 먹어서 저녁은 거를 생각이었어요. 크리스, 테사랑 식사하고 오세요."

"볼일?"

"별거 아니에요. 그보다 테사의 기분 잘 풀어주세요. 제가 있으면 방해만 될 테니까."

뒷부분은 작게 속삭이듯 말하곤, 라이디는 곧바로 시내로 멀어져 갔다.

흠... 그녀가 같이 있다고 딱히 테사에게 방해가 된다거나 할 건 없는 것 같은데...

아무튼 이렇게 된 이상, 테사랑 놀면서 나도 기분이나 풀어야 할 것 같다.

"둘만 남았네. 먹고 싶은 거 있어?"

"..."

작게 고개를 젓는 테사.

"그럼 여관에 들어가서 쉴까?"

"도..."

"뭐?"

"도서관에 가고 싶어."

­­­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또 도서관을 찾는 테사의 의견을 존중해 얌전히 도서관에 왔다.

점심을 늦게 먹어서 배가 고프지도 않고, 일단 그의 기분을 풀어주는 게 우선인 것 같았으니까.

루이스의 도서관은, 페르낭드의 도서관보다 대략 다섯 배는 될 법한 거대한 크기였다.

그만큼 비어 있는 책상도 많고, 그래서 여유롭게 쉴 만한 곳이긴 한 것 같다.

테사치곤 나름 쉬기 좋은 곳을 골랐다 싶었는데...

그는 책상을 놔두고 굳이 책장에 기댄 채 바닥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기분 풀리기 전에 건드리기 싫어서 줄곧 별말 않고 가만히 두고 있었지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온 손님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해서 눈치가 보인다.

슬슬 의자에 바로 앉으라고 얘기하는 게...

"저기, 크리스."

"앗!... 응? 왜?"

"나... 지금까지... 그 아이랑 비슷했지?"

"그 아이?"

"벨마."

"글쎄, 비슷한 부분이 있나?"

"미안해..."

"뭐가?"

"..."

평소처럼 장난을 치는 건가 싶었지만, 테사는 금세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사뭇 진지하게 답해주었다.

"아니야, 오히려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왜?"

"매지션즈를 탈출할 때도, 미셸에게 쫓기는 지금도 날 위해 애써주고 있잖아? 내겐 꼭 필요한 소중한 사람이야. 물론 라이디나 필리아에게도 테사가 소중한 건 마찬가지일걸?"

"풉, 역시 크리스는 변태네."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건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드디어 오늘 처음으로 활짝 웃는 테사.

오랜만에 웃는 모습을 보니까, 그의 기분을 풀어주겠다는 목표를 달성하니까 내 기분도 덩달아 풀리는 것만 같았다.

"크리스는 라이디를 좋아하는 거지?"

"응."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할 수 있었다.

"필리아는?"

"필리아도 좋아하지."

딱히 고민할 건 없었다.

"그럼... 나는?"

"......좋아해."

"같은 ‘좋아’지만, 무게감이 너무 다른 거 아냐?"

"...아니야."

평범한 여자아이였다면 라이디나 필리아처럼 좋아했을 것이다.

얼굴이 예쁘고 몸이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말을 거칠게 하곤 하지만, 그게 진짜 속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왜인진 모르겠지만 날 위해 주는 사람이다. 가끔은 라이디보다도 날 챙겨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라이디와의 관계가 연인 사이 같다고 한다면, 테사는...

...

그래, 가족이다.

마치 가족을 대하는 것처럼 편하고, 정겹고...

그래서 더욱더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낭자애다.

그러니 좋아하는 것에서 더 나아갈 순 없었다.

"싫어하지 않는 거면 됐어. 처음에는... 아니야, 잊어버려. 라이디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책 몇 권 빌려서 돌아가자?"

가느다란 은빛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말하는 테사.

평소와는 다른, 우수에 찬 눈빛이 너무 아름답게 보인다.

...

으아아아!

이건 아니야! 정신 차리자 크리스!!

수많은 미녀를 놔두고 낭자애 따위에 눈을 돌릴 이유는 없잖아!

정정한다. 얼굴이 예쁘고 몸이 아름다워서 끌리는 게 맞다.

하지만 절대 외모에 속아 넘어가지 마, 나 자신!

생물학적으로 테사는 남자니까!!!

­­­

벨마를 찾아가 마법 시연을 한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당시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마 제자가 되긴 글러 먹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기다리라는 벨마의 말을 무시하기엔 후환이 두려웠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데 나다니기도 그래서, 그동안 테사와 방에서 책이나 읽으며 뒹굴거리고 있었다.

똑똑­

"크리스 님, 벨마 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기나긴 기다림이 드디어 끝나나 보다.

별안간 벨마네 메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서 문을 열어줬다.

"벨마님, 안녕하셨어요? 혹시, 제자로 받아주시길 부탁드렸던 건은... 어떻게 된... 건..."

...

뭐지?

눈에 띄게 초췌해진 벨마의 모습에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지 메이드에게 부축을 받는 데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가득하다.

"너... 마법 수준 너무 떨어지잖아! 네 녀석 따위를... 내가 제자로 받아 줄 것 같아? 이 천재 마녀 벨 님이 그렇게 한가해 보여?"

"죄송합니다..."

조금 실망스럽지만, 이미 예상하던 바였다.

"뇌가 비었어? 아무 쓸데없는, 겨우 바위를 솟아나게 하는 마법을 그렇게 정교한 수준이 될 때까지 파고드는 멍청이가 어디 있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봐서... 벨마 님보다는 한참 부족하더라도, 제게는 어울릴 만한 선생님을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안돼! 절대 안 돼!!!"

"야! 크리스의 마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렇게 냉담하게 대할 필요는 없잖아?"

결국 지켜보다 참지 못한 테사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하... 후, 대신... 제..."

"도와주지 않을 거면 꺼져."

"테사, 괜찮으니까 진정해."

"제... 제... 젠장, 그러니까... 흑..."

갑자기 벨마는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저기... 벨마 님, 괜찮으세요? 테사, 울려고 하잖아. 얼른 사과해!"

"제...! 제자로 받아! 주세요!"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