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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랩 매지션즈-31화 (31/114)

〈 31화 〉 그녀와의 재회는 최악이었다 ­ 3

* * *

"하음... 크리스 님, 필리아는 오랜만에 배불러서 푹 자고 싶은데, 왜 자꾸 깨우시는 거예요... 앗, 으아아아아니!!!"

"뭐야, 왜 놀라는 거야?"

"귀하디 귀한 정액을 땅바닥에 버리다니... 흑... 악마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천벌을 받을 짓이에요..."

겨우 그거였냐!!!

맹렬히 태클을 걸고 싶지만, 도움을 청하는 입장이니 어쩔 수 없이 저자세로 나서야 한다.

"그런 건 언제든 배고프면 줄 테니까, 빨리 도와줘!"

"흐응~ 낭자애인 것으로도 모자라 SM 플레이까지 즐기고 계시네요. 그렇다면 필리아가 이곳저곳 만져줬으면 해서 부르신 거죠? 엉큼하기도 해라!"

"아니, 그게 아니라 인퀴지터한테 붙잡혔으니까 구해 달라는 거야!"

"인퀴지터?"

"날 잡아가려는 나쁜 녀석들이라고 생각해. 아무튼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없을까?"

"라이디 님과 테사 님이 구하러 오시지 않을까요?"

확실히, 마차는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으니까 라이디가 달려오면 충분히 따라잡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한 선택지다.

전쟁에 끌려가면 죽느니 마느니 하는 거 보니 필리아는 그다지 강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미셸에게 붙잡혀 있어 뭘 할 수가 없고, 테사는 아무 쓸모가 없다.

사실상 라이디 홀로 십수 명의 사병들과 미셸을 상대해야 한다.

"그럴 거라고 믿곤 있지만, 내가 지금 도망가는 편이 더 안전하고 확실하잖아. 그리고 나 더는 못 버티겠어. 한시라도 빨리 미셸에게서 멀어지고 싶어!"

"흐음..."

"필리아, 서큐버스의 능력으로 다 재워버리면 안 될까?"

"네다섯 명 정도면 모를까, 병사들이 너무 많아요. 필리아가 크리스 님을 안고 날아 도망치는 게 가장 확실할 것 같네요. 필리아의 모습을 드러내기는 싫지만..."

"그런가..."

날아서 도망가는 건 확실히 통할 것 같긴 하다.

다만 필리아도 나와 비슷한 처지다. 끌고 가려 하는 자들이 있어 몸을 숨기고 있는 상황이다.

당장 내가 살겠다고 필리아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진 않은데...

"혹시, 날개만 꺼낼 순 없어?"

"가능할 것 같아요."

"목걸이가 끊어지거나 하진 않으려나?"

"시도해 볼 가치는 있는 것 같아요. 끊어지면 필리아가 나가서 크리스 님을 안고 가면 되죠."

"그렇네. 다행히도 아직 필리아를 눈치챈 사람은 없는 것 같으니까 바로 시작하자."

"그야 당연하죠. 여긴 크리스 님의 꿈속인걸요?"

"어... 응?"

필리아가 말을 마치자마자, 시야가 흐릿해지며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

"크리스, 기절할 정도로 기분 좋았어요? 제 곁에만 있겠다고 하면 언제 어디서나 해줄 수 있어요. 그러니 인퀴지터가 돼서 같이 다니지 않을래요?"

정신이 들고 보니, 어느새 난 미셸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미셸..."

"네, 말하세요 크리스. 당신의 미셸은 여기 있어요."

"만나서 더러웠고, 제발 앞으로 다시는 마주치지 말아요!!!"

목걸이를 등 뒤로 넘기고, 목줄을 잡아당겼다.

파락­

순식간에 몸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뒤를 돌아보니, 마치 등에서 거대한 검은 날개가 돋아난 것 같이 보였다.

"크리스 님, 꽉 붙잡으세요!"

필리아가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귓가에 엄청난 바람 소리가 맴돌며, 빠른 속도로 마차로부터 멀어져 갔다.

­­­

"으으... 어지러워..."

"크리스 님, 괜찮으세요? 필리아가 너무 빨랐나요?"

"아니야, 이 정도는 참아야지. 고마워, 필리아!"

"헤헤... 필리아 꽤 쓸만하죠? 들어가는 정액의 양보다 훨씬 연비가 잘 나오기도… 앗! 저기 라이디님이 보여요!"

그녀의 말을 듣고 앞쪽을 자세히 보니, 저 멀리서 테사를 업고 뛰고 있는 라이디가 보였다.

그리고, 필리아의 날갯짓 몇 번에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라이디!!!"

"크리스!!!"

그녀는 테사를 내려놓고 달려와, 나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크리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어딜 다녀온 거에요?"

"인퀴지터 미셸한테 납치당했는데, 다행히 필리아 덕분에 빠져나왔어."

"그런... 필리아, 정말 고마워요.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한심하게 납치나 당했으면서 입은 살아가지곤..."

여전히 입이 험한 테사.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그냥 무시했다.

"그보다, 이제 어디로 도망가야 할까?"

"그렇네요. 분명히 이 길로 돌아올 텐데..."

"필리아가 크리스 님을 데리고 다른 마을에 먼저 가 있을게요."

"괜찮은 의견이긴 한데, 날아다니면 주변의 시선이..."

"괜찮지 않아요. 아무리 은인이라고 해도, 묘령의 여인을 크리스와 단둘이 있게 할 순 없어요!"

라이디가 단호하게 거절한다.

평소엔 아름다운 여성이면 거부하지 않는 박애주의자 성향의 나지만, 당장은 나 또한 라이디의 곁이 아니면 싫다.

미셸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나니, 라이디의 거대하고 따뜻한 품속에서 치유받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다.

"그보단, 분명 인퀴지터가 돌아올 테니 한동안 숲에 몸을 숨기는 게 어떨까요?"

"싫어. 침대에서 편하게 자고 싶단 말야. 그냥 올리비에로 돌아가자. 조금 피곤하더라도 크리스한테 인식저해 마법을 계속 걸어둘 테니까."

라이디가 역으로 제안했지만, 이번엔 테사가 반대 의견을 펼쳤다.

테사의 마법이 잘 통한다면 쉽고 편한 방법이긴 하겠지만...

인식저해 마법으로 악마라는 존재를 속인 걸 보긴 했어도, 신뢰할 만한 수준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

...

사실, 테사의 마법보다는 테사 본인에 대한 신뢰가 낮은 것 같기도 하다.

항상 중요한 타이밍에 대형사고를 치니까!

"인퀴지터도 우리가 바로 같은 여관으로 돌아갈 거라곤 생각하지 않을 거고, 만일의 사태엔 나도 인퀴지터라는 걸 밝히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 거야."

"짐도 두고 오긴 해서, 어차피 누군가 올리비에를 들렀다 가긴 해야 돼요."

"그치? 라이디도 동의했으니까 어서 돌아가자!"

"필리아는 다른 의견 없어?"

"저는 크리스 님의 목걸이 안에서 누워 있는 게 제일 좋아서, 뭐든 상관없어요!"

"하하... 그래. 그럼 돌아가는 걸로."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은 테사인데, 묘하게 이럴 땐 결론이 그의 의견으로 정해지는 것 같단 말이지?

뭐, 아무튼 우리는 올리비에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미셸이 따라올 것을 염두에 두고, 쉬지 않고 빠르게 걸어갔다.

­­­

"라이디, 씻고 자야지?"

여관에 도착해 샤워를 마치고 라이디를 찾아왔지만, 그녀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이틀 연속으로 테사를 들고 뛰었으니 쓰러질 만도 했다.

그렇기에 깨우기는 미안해서, 침대에 앉아 지긋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직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진심으로 날 걱정해주는 사람.

얼굴만 예쁜 게 아닌, 마음씨도 한없이 예쁜 사람.

미셸에게 여기저기 얻어맞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아프진 않았다.

탈출을 시도했다가 붙잡히는 순간 느낀, 다시는 라이디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훨씬 고통스러웠으니까.

그녀가 나를 걱정해주는 만큼, 나의 마음속에 그녀가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이제는 떨어져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아니, 상상하기도 싫은,

그저 예뻐서 좋아하는 게 아닌, 너무나 소중해서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항상 고마워요."

조심스레 그녀의 입으로 다가가다가, 멈췄다.

아직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으니까...

진정한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때까지, 그녀를 원하는 애타는 마음을 조금만 더 눌러두고 싶다.

"사랑해, 라이디."

대신,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여전히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곤히 잠들어 있는 라이디.

내 키스에 반응해준 것 같아,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

각자의 방에서 한참을 쉬고 난 후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숙소에 딸린 식당에 모였다.

굳이 라이디는 깨우지 않았다. 그러니 테사, 나, 그리고 후드를 뒤집어쓴 필리아의 셋인데...

이 조합이라면 마법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테사가 필리아에게 달려들기 딱 좋은 상황.

그러나 그는 침묵시위라도 하듯 입을 꾹 닫은 채 조용히 밥을 깨작이고 있다.

계속 마법을 유지하느라 마력을 빨리고 있어서 예민해진 건가?

무거운 분위기에 필리아도 쉬이 말을 꺼내질 못하고 있었지만...

"거기 당신, 페르낭드에서 크리스와 함께 있던 사람 맞죠? 크리스는 어디에 숨겼나요?"

마침 보기 싫은 불청객, 미셸이 찾아왔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정말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아무래도 테사의 마법이 뛰어나다는 건 인정해 줘야 할 것 같다.

"그딴 녀석, 내 알 바 아니야!"

쾅!

테사가 들고 있던 잔을 식탁에 세게 내리치면서 말하기에 깜짝 놀랐다.

보아하니 미셸도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조금씩 꼬시고 있었는데 눈치도 없이 다른 여자랑 눈이 맞질 않나!"

쾅!!

"그 꼴을 보고도 차마 놓질 못해서 잠자코 곁에 있었더니 요리랍시고 맛도 없는 걸 내놓고, 밤새 걷게 해서 고생시키질 않나!"

쾅!!!

"그래놓곤 내 팬티를 보며 몰래 자위까지 하다니, 너무 역겨워!"

콰직!!!!

"그래서 조용히 떠났어. 그 둔감 변태 새끼한테 무슨 일 있는 거야?"

그가 들고 있던 나무잔이 부서져 버렸지만, 테사는 괘념치 않아 했다.

"아... 알았어요. 그 이후로 크리스를 본 적은 없는 거죠?"

"구역질 날 것 같으니까, 내 앞에서 다시는 그 새끼 얘기 꺼내지 마!"

"......"

테사의 반응을 본 미셸은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

"테사... 미셸을 돌려보내 줘서 고맙긴 한데, 너무 심하게 말하는 거 아니야?"

"뭐야, 내가 말한 거 사실이었어?"

"..."

다른 여자랑 눈이 맞은 건 맞지만, 테사가 날 꼬시던 건 아니었고!

백 보 양보해서 맛없는 요리를 줬다고 쳐도 내가 걷게 하지도 않은 데다 그것도 대부분은 라이디가 업어서 갔고!

팬티... 큼... 떠올리면서 자기 위로를 한 건 맞지만 보면서 친 건 아니잖아! 그것도 라이디가 메인이었는데 본 게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떠오른 것뿐이니까...

결국 절반만 사실이잖아!

"아무튼, 아무리 나라도 남에게 계속 마법을 걸고 있기는 힘들어. 페르낭드에서 최대한 멀어져야겠어. 다른 인퀴지터의 관할 지역까지 따라오진 않을 테니까."

어쨌든 엄청난 연기였다. 미셸이 감쪽같이 속아넘어갔으니까.

필리아도 마찬가지였는지, 후드 속으로 살짝 보이는 그녀의 표정 또한 가관이었다. 항상 태연한 그녀도 어안이 벙벙한가 보다.

"뭐 하고 있어? 멍때리지 말고 어서 밥 먹자. 그보다 필리아, 마법에 대한 비밀 말야, 하루 종일 크리스 쥐어짜고 나서 한 번에 얘기해 주면 안 돼?"

그새를 못 참고, 다행히도 그는 평소의 테사로 돌아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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