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테사의 위안 1
* * *
'하...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야심한 밤,
필리아의 오두막에서 빠져나와 올리비에의 숙소로 돌아온 지도 꽤 지난 시각이었다.
그러나, 테사는 침대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쉬이 잠들지 못한 채 그저 나직이 탄식했다.
크리스의 앞에서 치마를 들치고, 팬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말았다.
한밤중이었다고 쳐도 크리스의 반응을 보아하니 분명하게 보인 것 같았다.
다들 '테사가 또 평소처럼 뜬금없는 짓을 한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테사에게 있어선 평소의 그녀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을 저질러 버린 것이었다.
'내가 왜 이러지? 라이디 때문인가?'
열렬히 대시하는 라이디를 보고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건 맞았다. 이대로 가다간 라이디에게 크리스를 뺏길 것 같았고, 어떻게 견제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테사는 이내 생각을 바로잡았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지... 젠장...'
테사는 크리스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것은 지금처럼 달빛이 밝게 빛나던 야밤, 크리스가 매지션즈를 탈출하던 날.
... 이 아닌, 오래전의 일이었다.
어릴 적, 일찍이 테사는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제대로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
게다가 이레귤러의 특성상 돈이 있더라도 좋은 스승을 구하기는 요원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마법인 '인식저해'를 사용해 매지션즈에 잠입했다.
이 세상의 마법을 다루는 자들 중의 절반이 몰려 있는 곳인 만큼, 곁눈질만 해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마법사들에게 들키는 게 아닐까 싶어 조마조마했지만, 생각보다 마법은 잘 먹혔다.
매지션즈의 소굴.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금녀의 구역은 너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 허술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매지션즈의 실상은 형편없었다. 마법사는 온데간데없고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변태들만 득실거리고 있었다.
정말 순수하게 마법을 익히는 자들도 조금은 있다는 것 같지만, 그들의 공간에 침투하려면 들킬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크게 실망한 테사.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책이나 읽고 나가야겠다는 마음에 그녀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책이나 읽고 있던 크리스를 보게 되었다.
무슨 책을 보고 있나 궁금해서, 옆에 앉아서 흘깃 쳐다보며 읽었다.
밥을 먹으러 가길래, 마침 배가 고팠던지라 따라가서 빼앗아 먹었다.
어떤 낭자애의 피규어 주문을 받아 마법을 쓰는 걸 구경했다.
졸리지만 잘 곳이 마땅치 않아서 그의 옆에서 잠들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며칠이 지나도록 그녀는 그의 옆을 지켰다.
매일같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지적인 모습.
남자임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의지를 꺾지 않은 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강인함.
혼자 있을 때 가끔 나오는, 덜렁대는 것 같으면서도 귀여운 의외의 모습까지.
마치 흙탕물 속에서 피어난 작은 꽃과도 같은
크리스 나름의 오묘하면서도 남성스러운 매력이 한창 사춘기였던 테사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렇게 테사는 사랑에 빠졌다.
'그때 정체를 밝혔어야 했는데... 처음부터 밝히면 좋았을걸.'
지금은 늦어도 너무 늦어버렸다.
테사가 그렇게 몰래, 크리스의 곁에서 지낸 지 3년, 일수로 따지면 1000일이 넘게 지났으니까.
그녀는 몇 번이고 나서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마법을 풀고, 자신의 상황을 크리스에게 알릴 뿐.
하지만 망설여졌다.
낭자애로 오해할 것 같았고, 조용히 곁에 있었던 저의를 의심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크리스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지금의 행복이 부서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크리스의 옆에서 살아가던 어느 날, 크리스는 매지션즈를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가끔 바보 같은 녀석, 그때도 그랬었지. 나 없으면 제대로 하는 게 없다니깐.'
그가 열심히 종이에 적어 내려가는 걸, 테사도 옆에서 지켜봤다.
그리고, 이내 결론을 내렸다.
매우 형편없다.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되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짜낸 계획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걸 가지고 탈출하기에는 빈틈이 너무 많았다. 실소가 흘러나올 정도로.
크리스 자신도 허점이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탈출을 감행했다.
아주 작은 확률에라도 걸어 보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꼭 매지션즈를 나가고 싶다는 일념으로 결국 실행에 옮겼다.
탈출 계획을 무조건 성공하게 해줄 행운의 여신이 함께한다는 걸 모른 채.
당연하다는 듯 테사도 그를 따라나섰다. 크리스를 도와 탈출시켰다.
그리고, 테사도 행동했다.
매지션즈 밖에서는 꼭 자신을 드러내겠다고, 옆에서 같이 다니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테사는 크리스의 앞에서 인식저해 마법을 풀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용기를 가지고 앞에 나타났지만
크리스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곤 있었다.
하지만, 테사의 연약한 내면이 무너져 내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내심 조금은 자신의 존재를 알아채 줬으면 하고 있었다.
한 번은 용기를 내서 크리스의 앞에 나타난 적도 있었으니까, 자신을 기억해 주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3년이나 같이 있었으니까 무의식적으로라도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테사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화가 난 테사는 퉁명스럽게 응대해 버렸고, 이제 와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었다.
그리고 결국, 여자로 취급받지도 못하는 지경까지 몰리게 되었다.
'내 팬티 본 거로 자위... 같은 건 할 리가 없지.'
하물며 크리스는 테사를 여자로 보고 있지도 않았으니까, 차라리 라이디를 떠올리겠지 싶었다.
큰 키의 쭉쭉빵빵 금발 미녀.
반반한 얼굴에, 자신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가슴에 크리스는 푹 빠진 것 같았다.
단 하나 테사가 유리한 걸 꼽자면, 라이디는 달려 있다는 것 정도였다.
평생을 낭자애를 혐오했고, 여자를 만나고 싶어 했던 크리스로서는 거부감을 느낄만한 요소다. 라이디의 나신을 보면 크리스의 반응도 바뀔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다만, 특정 상황에선 그것 또한 장점이 될지도 모른다.
크리스가 자신이 일반적인 남자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정한 낭자애가 되어버린다던가, 아니면 그저 성욕을 이기지 못하고 암컷으로 전락해버린다거나 하는 상황 말이다.
이렇듯 라이디도 라이디지만, 더하여 필리아가 야한 꿈을 잔뜩 꾸게 해서 빼줬다고 했다.
필리아.
테사의 눈에는 그녀 또한 새로운 경쟁자로 보일 뿐이었다.
라이디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테사 자신보다 키도 가슴도 훨씬 크다.
성적인 지식도 해박한지 크리스가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이미 야한 짓을 한 사이.
그건 언제든 더한 짓을 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사이라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크리스 취향의 경쟁자가 생겨서 약간은 의기소침해 있던 테사였는데, 그게 둘이 되다 보니 미쳐버릴 지경까지 몰리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의 뜻하지 않은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슬렌더한 체구의 테사로서는 그나마 여성스러움을 강렬하게 어필할 수 있는 부분.
잘록한 허리, 얇은 허벅지,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우고 있는 순백의 속옷.
나에게도 여성의 매력이 있다.
팬티를 보여준 건 그걸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테사였다.
'하아... 모르겠다. 오랜만에 크리스의 옆에서 잠이나 자야지.'
매지션즈에서 함께 했던 크리스를, 그리고 팬티를 노출한 것을 떠올려서 몸이 살짝 달아오른 테사.
하지만 당장 졸음이 몰려오는 게 더 컸다.
테사는 주로 라이디에게 들려 다녀서 힘들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결국 자신에게 마법을 걸고, 크리스의 방에 들어가는 테사.
'으악! ...하고 있잖아? 실화야?'
마법 덕분에 들릴 리가 없었지만, 깜짝 놀란 테사는 입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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