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라이디의 사정 2
* * *
"히얏! 무... 무슨 일이에요 크리스?"
"미안하지만, 교대 시간이 돼서..."
"아, 아아..."
벌써 한 시간이 지났다.
라이디는 결국 소중한 한 시간의 반을 욕구불만을 억누르는 데에 쓰고, 다른 반은 가볍게 가버리는 거로 낭비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차라리 처음부터 할걸...'
회고를 하다가 가버려서 얼굴이 달아올랐을 걸 떠올린 라이디는, 급히 담요를 끌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크리스를 지긋이 바라봤다.
다행히 눈치를 챈 것 같진 않다.
오히려 졸려서 그런지 반쯤 감은 눈을 하고 있어, 라이디의 확신에 힘을 더했다.
놀라서 조금 진정했던 라이디의 그것이 다시 불끈거리기 시작했다.
불침번을 서기 위해 침낭 밖으로 나와야 했지만, 이렇게나 커져 있어선 곤란하다.
그녀는 애써 크리스 생각을 지우기 위해, 그의 주변으로 시선을 돌린다.
시야에 테사의 침낭이 들어온다.
분명 조금 전까지 크리스와 떠들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녀는 침낭 깊이 들어가 곤히 자고 있었다.
라이디는 테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테사.
은발의 예쁘장한 미소녀.
라이디와는 반대로 상당히 슬렌더한 스타일을 지녔다.
그렇다고 가슴이 없거나 한 건 또 아니다.
작은 손에는 충분히, 꽉 들어찰 정도는 솟아 있다.
게다가 골반도 상당히 커서 전체적으로 봤을 땐 밸런스가 출중해 보인다.
그녀의 매력에 대미를 장식하는 건 속이 살짝 비치는 얇은 원피스. 몸의 아름다운 S라인이 고스란히 보인다.
여자인 라이디로서도 보기 민망한 수준인데, 여기에 매료되지 않는 남자가 크리스 말고 또 있을까?
마치 최후의 보루로 크리스를 유혹하기 위해 입은 거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반면 같은 디자인의 원피스를 라이디가 입는다면, 가슴에 맞추기 위해 품이 너무 커져 볼품없을 게 분명하다.
마치 아줌마 잠옷 같은 느낌?
이렇듯 테사는 나올 덴 나오고 들어갈 덴 들어가 있는 데다, 자신의 강점을 잘 알고 어필하는 능력을 지녔다.
취향에 따라선 라이디보다 테사를 선택할 사람도 많을 터였다.
그렇기에 테사는 라이디의 연적으로 치기에 충분했지만, 다행히도 크리스는 테사의 매력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게다가 테사도 무슨 연유에서인지 크리스의 앞에선 틱틱거리고 있어 둘의 관계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라이디에게 있어선 분명 행운이었다.
하지만, 방심할 여지는 없다.
크리스가 테사를 보고 있지 않을 때, 그녀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지기 때문이다.
크리스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테사는 하루 종일 크리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 눈빛의 의미는 분명 '사랑'으로 읽혔다.
그러나, 첫사랑이나 짝사랑 같은 풋내나는 그것은 절대 아니다.
연인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
아니, 연인을 넘어, 마치 오랜 기간을 함께한 사랑하는 남편을 보는 듯한,
그러니까 널 이렇게 바라보는 게 당연하다는 듯한 눈빛.
라이디로선 크리스를 거의 쟁취한 것 같은 황홀한 기분에 빠지다가도, 테사의 확신에 찬 눈빛을 볼 때마다 엄습하는 불안감을 미처 떨쳐낼 수 없었다.
그래서 줄곧 테사에 대한 경계심을 놓지 않고 있었고, 빨리 크리스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쟤 엄청 피곤했나 봐. 눕자마자 바로 잠들어버렸어. 라이디도 더 잘래?"
"아... 아니에요. 크리스도 쉬어요."
"항상 고마워. 너무 무리하지 말구, 피곤하면 푹 쉬고 가자. 알았지?"
"알았어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라이디는 크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쭈뼛쭈뼛하게 서 있는 그는 무언가 원하는 게 있어 보였다.
"무슨 일 있어요?"
"그... 그거 살짝 내려볼래?"
"네?"
'내려보라'는 말에 혹시 들킨 건가 싶어 순간 당황한 라이디였지만, 양손을 얼굴 가까이에서 위아래로 흔드는 제스쳐를 취하는 크리스를 보고 의미를 이해했다.
다행히, 얼굴을 가리고 있는 담요를 내려보라는 것 같았다.
라이디는 담요를 살짝 걷었다.
그러자 크리스는 라이디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잽싸게 자신의 침낭에 달려가 파고들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라이디는 천천히 크리스의 침낭으로 다가갔다.
"저도 굿나잇 키스 해줄게요."
"안돼! 잠 못 잘 것 같단 말야."
"... 후훗, 그런 거라면 알겠어요. 잘 자요, 크리스!"
크리스의 침낭에 같이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러면 절제하지 못하고 저질러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욕망을 철저히 억제하면서 담담하게 말하는 라이디.
괜찮다는 듯이 말한 그녀의 입과 달리, 눈은 침낭 밖으로 빼꼼히 삐져나온 검은 머리카락만 야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테사가 없었다면...'
크리스를 놓고 다툴 경쟁자가 없었다면, 지금 당장 무조건 덮쳤을 것이다!
라이디는 내심 아쉬워하며 모닥불 앞에 앉았다.
어느새 라이디가 불침번을 선지 두시간이 지났다.
이 정도 지났으면 이미 야한 기분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려야 정상이었지만, 라이디의 욕구불만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분명 하자고 애원하면 넘어올 텐데...'
그녀는 몇 번이고 크리스 깨울까 계속 고민했다.
'테사는 깊이 잠들어 있으니까, 저 너머의 나무에 숨어서 하고 오면...'
상상만으로도 흥분해버리는 라이디. 그러나 그녀는 크리스가 원하는 건 뻔히 알고 있었다.
깔끔한 방에서, 아름답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잡고, 크리스가 남자답게 리드하는
연인들의 첫 경험.
반면 라이디는 야성적이고 거친 것이 취향이었다.
본능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것이 훨씬 기분 좋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분위기나 장소 같은 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지만, 평생 기억에 남을 첫 경험에 대한 소망은 이해되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다시 야한 생각으로 깊게 넘어갈 기미가 보이자, 라이디는 고개를 흔들어 애써 망상을 떨쳐낸다.
잡생각을 떨쳐내는 덴 운동만 한 것이 없다.
그렇게 생각한 라이디는 일어나서 검을 뽑아 휘둘렀다.
슉, 슈욱
모닥불의 빛을 받아 노랗게 빛나는 검신이 차가운 밤공기를 가른다.
하지만 라이디의 기분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손에 익지 않은 무기인지라 오히려 어색하고 불편했다.
크리스는 라이디가 검사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사실 그녀의 주 무기는 창이었다.
그저 기사가 되기 위해 검을 연습하고 있을 뿐.
'단단하고 긴... 창... 크리스의...'
무엇을 떠올려도, 그녀의 뇌는 그것을 결국 야한 생각으로 치환해 버린다.
'하아, 어쩔 수 없는 걸까?'
역시 자위로 풀 수밖에 없나 싶었다.
하지만 이건 마치 공개 자위행위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드니, 라이디는 다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으응..."
"꺅!"
'자위할까'라고 생각했더니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는 라이디.
작게 비명소리를 내질렀지만, 다행히 누구도 깬 것 같진 않았다.
'휴, 잠꼬대였구나...'
숨쉬기 불편했는지 크리스가 침낭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던 거였다.
그러나 안심하는 것도 잠시뿐.
그의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앵두 같은 입술이, 백옥같은 피부가
이 세상으로 뛰쳐나와 라이디를 유혹해 간다.
'하으... 크리스...'
그녀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 이대론 분명 미쳐 버릴 것이다.
지금 당장을 어떻게든 넘기더라도, 내일 갑자기 정신을 잃고 테사가 보는 앞에서 크리스를 역강간할지도 모른다.
라이디는 두려워졌다. 그런 짓을 해버리면 영영 크리스가 용서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그건 자위행위를 하다가 들키는 것보다 훨씬 나쁜, 가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라이디는 모닥불을 등지고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크리스 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바로 아래쪽에서 반응이 온다.
정말 이상하리만치 단순한 막대기. 크리스와 야한 짓을 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 커지는 기묘한 작동기제를 지녔다.
그래도 의지로 억누를 수 있으니, 마인드 컨트롤만 잘하면 일상생활에는 그다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인 듯싶었다.
자위행위를 하고 나니, 오히려 더 끓어올라 버린 성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선, 이 녀석을 해결해야 할 것 같아...'
생각을 정리하고 결심한 라이디는, 침을 꿀꺽 삼킨다.
그리곤 팬티를 허벅지까지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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