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라이디의 정체 3
* * *
잠에 빠져든 지 얼마나 지났을까, 왜인지 스르르 눈이 뜨였다.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는 방,
그리고 밝게 빛나는 금색의...
"우악!"
"잘 잤어요?"
라이디가 내 위에 올라타 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글쎄요?"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는 그녀.
이면에 아름다움을 담은 미소를 보고 있자니 잠이 확 달아나는 것 같다.
"사실, 아까 크리스의 답을 듣지 못한 것 같아서요."
"...답?"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잖아요."
"그거야, 알고 있잖아?"
"하지만~ 직접 그 입을 통해서 듣고 싶은걸요?"
눈을 반짝이며 슬쩍 다가오는 라이디.
씻고 온 건지 향긋한 비누 냄새도 풍겨온다. 게다가 못 보던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초록색의, 별 무늬가 없는 마을 처녀들이 입는 수수한 옷.
마르에게서 빌린 걸까?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지만, 새로운 느낌이 들어서 이것 또한...
"예쁘네."
"아이, 그거 말구~"
"그거 말구 뭐?"
"크리스!"
처음에는 대답도 제대로 못 했는데, 조금 편해지니까 자꾸만 놀리고 싶어진다.
그래도 여기선 제대로 답해 줘야겠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나도 라이디에게 첫눈에 반했어. 부끄럽지만, 바로 라이디와 아이를 몇 명이나 가져야 하나 망상까지 했는걸."
"몇 명이 좋아요?"
"흐음... 둘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들 하나, 딸 하나. 역시 그렇죠?"
양손의 손가락을 하나씩 들어가며 말하는 라이디.
"아무튼, 그리고 같이 지낼수록 더욱 좋아지고 있어. 다만 나는 남자니까, 남자로서의 내 모습을 되찾을 때까지는 진정한 나를 알아가는 게, 진정한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
"지금도 충분히 남자다운데..."
"그러니까,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줘. 그리고 그런 거 다 떠나서,"
라이디의 두 손을 맞잡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하고 싶었던 그 말.
조금 떨리지만, 용기를 내 본다.
"라이디, 널 좋아해."
"꺄아~"
내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다.
딱히 멋진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밋밋하게 얘기했는데도 격하게 반응해주니까 좋다.
그녀의 진심이, 정말 그녀도 나를 좋아한다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너무 세게 끌고 가서, 팔이 살짝 아픈데...
"그런 거라면 알겠어요. 기다려 줄게요."
라이디가 몸을 밀착해 온다.
내 가슴팍에 라이디의 말캉한 가슴이 쓸려간다.
본연의 부드러운 느낌과는 대조적으로, 단단하게 선 유두가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며 지나가는 게 옷 너머로 선명하게 느껴진다.
이건 보기에도 예쁘지만 만지면 기분 좋아지는 장난감이라고, 그러니까 제발 만져달라고 애원하는 것만 같다.
아아,
평생 낭자애들 사이에서 금욕생활을 하던 내겐 너무나 가혹한 고문이다!
야한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저 주물럭거려보고 싶을 뿐.
하지만 라이디가 양손을 꽉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어느새 내 머리맡에 대고 누르고 있어서, 전혀 움직일 수가 없다!
"항상 저와 함께할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억누르고 살아왔지만, 운명이 크리스를 만나게 해 준 것 같아요."
더욱 가까이 다가오는 라이디.
그녀의 숨결이 뺨을 타고 올라온다.
몽글몽글하고 따스한 느낌, 싱그러우면서도 여성스러운 냄새.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살짝이라도 움직이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저기, 라이디...?"
"크리스의 남자다운 모습도 좋지만, 저는 크리스의 여성스러운 부분도 좋아해요. 그래서 둘 다 제 거였으면 해요. 크리스의 예쁜 외모가 이 만남을 만들어 준 것이기도 하니까, 너무 싫어하진 말아 줘요."
그건 기쁜데... 아니, 고려해 볼 여지가 있는데...
라이디가 눈을 감는다.
이거 그거지? 그거 맞지?
기다려 준다길래 여기서 더 나아갈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직 마음의 준비가... 이를 닦았던가? 나도 눈을 감아야 하나? 내가 다가가야 하는 건가!?
머리는 핑핑 돌고, 라이디의 모든 것을 제외하곤 그저 심장의 두근거림만이 느껴진다. 조금 생각할 시간을 줬으면 좋겠다. 키스를 한다면 당연히 내가 리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상황에서 멋있게, 라이디가 반할 정도의 첫 키스를 만들어 내고 싶어. 하지만 야속한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날 기다려주지 않고, 그리고, 그리고...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다.
"하으… 그런 의미에서 이건 여성스러운 크리스의 첫 키스를 가져간 거니까, 크리스의 남성스러운 부분에는 노 카운트에요. 크리스가 원하는 진정한 남자가 되면, 그때 원 없이 해줄게요!"
"그... 고마워."
아직 얼떨떨하다. 키스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
입술이 닿아 있던 시간이 너무 짧아서 별 느낌도 없다.
혹시 키스라는 게 원래 이런 건가?
무슨 맛이 난다거나, 특별한 기분이 든다거나 그런 건 딱히 없다.
다만 라이디와 더욱더 깊은 사이가 되었다는 게 실감 날 뿐.
하지만 마음이 전부 라이디로 꽉 채워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너무너무 기쁘다!
"자, 이제 밥 먹으러 내려가요."
"저기, 비켜줘야 나가지...?"
"하지만, 계속 이렇게 있고 싶은데 어떡하죠?"
결국, 한참 더 라이디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나서야 내려갈 수 있었다.
"크리스, 아~앙"
수프, 스테이크, 샐러드, 파스타...
집주인 마르의 손이 큰 건지 아니면 테사가 식자재를 잔뜩 가져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한 가정집의 저녁 식사라기엔 엄청 화려했다.
자고 있던 내내 준비를 했을 것 같은데,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먹기만 해도 되는 걸까?
게다가 그냥 먹는 것도 아니고, 라이디가 먹여 주고 있다!
라이디의 애정이 느껴지니 좋긴 한데, 혹시 기둥서방처럼 보이는 거 아닐까?
아니, 마르가 나를 여자애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동생이에요. 하하..."
마르의 시선이 느껴져서 괜스레 변명해 본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거짓말은.
"배다른 동생이냐? 바보 까만머리."
요새 조금 귀엽게 군다 싶더니, 어김없이 태클을 거는 테사.
"우리 은발 동생도 먹여줄게요. 자, 아~"
"저리 가... 아, 옷에 묻었잖아!"
"뭐 어때요, 옷은 갈아입으면 되잖아요. 자, 채소도 충분히 먹도록 해요."
격렬히 저항하는 테사와 먹이려는 라이디.
하지만 결과는 뻔했다. 테사는 라이디의 완력에 밀려 억지로 먹여지고 있다.
평범한 여자들이 저러는 거라면 보기 좋겠지만...
뭐, 마르가 오해할 수 있으니 테사에게도 그런다 치더라도, 너무 가까이 붙어 있는 거 아니야?
가장 거슬리는 건 테사의 팔이 라이디의 가슴 사이에 선명하게 끼어 있다는 점이다. 저 정도는 아직 나도 해보지 못한 건데!
"어머, 크리스."
"왜?"
"설마 질투하는 건가요?"
"아아니! 아니거든?"
라이디가 음흉한 표정을 짓곤, 테사에게 더욱 가까이 붙는다.
"여러분, 질투하는 크리스 귀엽지 않나요? 가끔 테사에게 붙어있어야겠네요."
"그게 아니라..."
"괜찮아요. 테사는 여자아이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
아무래도 라이디는 테사의 비밀을 모르는 것 같다.
겉으로는 어딜 봐도 여자아이지만 사실은 나와 같은 낭자애라는 걸.
매지션즈에서 같이 나왔다는 것도, 매지션즈가 뭐 하는 곳인지도 알려줬는데...
라이디가 착각만큼 테사는 여자아이다운 행동을 하는 걸까?
그렇다. 라고 말하기에는 내가 여자 경험이 너무 적다.
어릴 적부터 낭자애 사이에서 자랐으니까. 여자랑 대화한 횟수를 손에 꼽을 수도 있을 정도니까...
하아... 내 남자다워야 할 인생은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난 내버려 두고 너 좋다는 크리스나 먹여줘. 그리고 집주인이 불편해하잖아."
결국 라이디를 밀어낸 테사는 핀잔을 주곤, 여자아이라는 말엔 개의치 않고 밥을 먹고 있다.
이 분위기에, 먼저 말하지도 않는데 굳이 낭자애 이야기를 꺼내기도 좀 그렇다.
게다가 말해봤자 테사는 자기가 여자아이라고 주장할 게 분명하니, 나만 이상한 놈이 될 것이다.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하지만 라이디가 저 낭자애랑, 그러니까 속은 남자인 애랑 붙어 있다고 생각하니 언짢다.
아까 여자아이라고 생각할까 고민한 건 취소다.
기억하라, 모든 남자는 경쟁 상대다!
...
생각해보니, 이젠 여자도 경쟁 상대인 것 같다.
하아... 라이디를 놓고 전 인류와 경쟁하게 생겼네...
"호호, 아니에요. 오랜만에 활기찬 분위기에, 세 분이 사이가 좋으셔서 저도 기뻐요."
"그런 놈들이 활개 치고 다니니까 분위기가 뒤숭숭하지."
"맞아, 도적들 때문에 불편하진 않으세요?"
찬물을 끼얹는 테사의 말을 아슬아슬하게 덮어버리는 라이디, 나이스!
"아니에요. 그분들이 무자비하게 뺏어가진 않아요. 그리고 이렇게 소소하게 살아가는 게 우리의 인생이고, 작은 부분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어머..."
"그래도,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그건 여러분 같은 멋진 분들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동경하게 되네요."
"아니에요, 마르도 멋진 분이에요. 절대 자신을 저평가하지 말아주세요!"
"흐응~"
출중한 외모처럼 아름답게 답해주는 라이디와, 칙칙한 내면처럼 대충 넘기는 테사.
라이디를 위해, 마법을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싹 토벌해 버리던가 하고 싶다.
"호호,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다 드셨으면 후식 가져올게요."
마르는 라이디가 대신 가겠다고 일어나기 전에 재빠르게 주방으로 가버렸다.
"테사, 알려줄 게 있는데."
라이디를 바라본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서, 말을 이어간다.
"라이디가 사실..."
"알고 있어. 달려 있는 거지?"
"뭐? 그걸 어떻게..."
"남자다운 성격도 아닌데, 꼬맹이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거든. 어딜 봐도 남자는 아니고, 그러니까."
말끝을 흐리는 테사.
우연히 알게 된 건가? 마법을 쓴 건가?
...
정말 말도 안 되는 가정이긴 하지만,
혹시... 내가 눈치가 없는 거야?
"조촐하지만, 맛있게 드세요."
어느새 마르가 큰 접시를 들고 왔다.
조촐하기는커녕, 이 세상 과일을 다 모은 것 같은 종합세트인데?
"그리고, 봉투 아래에 돈이 들어 있던데..."
"착한 사람한테만 주는 선물이니까, 너 가져."
테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디서 난 건데?"
"그 녀석들한테서 가져온 거."
"뭐? 그건 또 어떻게..."
"비밀. 안알랴줌~"
아마 마법을 써서 털어온 것 같다. 마르에게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굳이 알려주기 싫으니까 둘러대는 거겠지.
그런데 우리도 무슨 마법을 쓰는지 몰라서, 정말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되어버린다는 걸 테사는 알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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