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라이디의 정체 2
* * *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애정행각이라니, 대단하시네요."
"그게... 그렇네요. 하하..."
라이디는 얼굴을 내리깔고 조용히 차만 홀짝이고 있어서, 결국 내가 답했다.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한 건, 오후에 우리가 구해줬던 그 여인, 마르였다.
...
구해준 거 맞나? 오히려 우리가 도움을 받은 것 같은데...
아무튼, 마르의 도움으로 라이디를 겨우 진정시키고, 그녀의 집에 들어가 차를 대접받고,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도움을 받았으니까 지나칠 수 없었어요."
"아까 그자들은 뭔가요? 마을에서 저렇게 당당하게 행패를 부릴 수 있다니, 놀랐어요."
"이름이 딱히 있는 건 아니고, 이 주변에서 통행세를 걷는 폭력배들이에요."
"아아... 들어본 적이 있어요."
그렇게 얘기하니 기억이 난다.
매지션즈에서 탈출할 때를 대비해 루이스 연합 공국에 관한 책들을 훑어본 적이 있다.
이 근방의 마을들은 각 공국의 소유여야 하지만, 정확한 소유권은 명확하지 않다.
바이어슈트라스에서 귀족들을 쫓아낼 때, 도시를 하나씩 분배하는 것만 고려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충 선을 그어 공작령을 할당했고, 도시들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의 경우 소유권이 애매해졌다.
제국 수도의 배후지였기에 살기 좋은 지역은 전부 도시를 이루었고, 마을은 길목이나 산기슭에 조촐하게 자리잡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굳이 마을의 소유권을 챙기려는 공작은 없었다. 가져봤자 그다지 가치는 없는데 의무만 늘어나니까.
결국 도적이 창궐해도, 공국 수준에서 나서질 않으니 처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루이스 연합 공국이 결성되면서 도적들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는데, 맞서 연합을 이루어 대처했다.
그들은 낮은 통행세와 위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골자로 잡았다. 크게 부담이 되지도 않으니 그냥 돈을 내고 말자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결국 괜히 손을 대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나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럼 우리가 도와줄 때 돌아가라고 하신 것도..."
"갑자기 그분들이 튀어나와서 놀란 거였는데, 여러분이 도와주셔서..."
민폐만 끼친 거였잖아!?
우리가 도적들을 전부 소탕할 계획이 아닌 이상, 굳이 벌집을 쑤셔서 좋을게 없다.
특히 이런 곳에서 살아가는 분들이 휘말린다면 일상이 파괴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행위다.
"죄송합니다. 괜히 우리 때문에 피해를 보신 건 아닐까요?"
"돈을 내고 소명하고 왔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엄청 민폐 끼친 거였잖아!!
"그래도 그들이 화가 나 있으니까, 새벽에 조용히 떠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너무 신세 지는 게 아닐까요?"
"모처럼 집에 사람이 있어서 좋은걸요? 그저 푹 쉬고 계세요. 2층의 방들도 편하게 쓰셔도 되고요."
"감사합니다!"
말을 마치고 마르가 주방으로 향하자, 그제야 라이디가 고개를 들었다.
"라이디, 괜찮아?"
"이제 여인들과 편하게 대화할 수 있나 보네요."
기분이 언짢은지 찡그리며 말하는 라이디.
확실히, 라이디와 함께 있다 보니 평범한 여인들 정도는 대화가 어렵지 않아졌다.
"화났어?"
"걱정이 들어서 그래요. 부끄럽기도 하고."
"도적들은 괜찮을 것 같아. 새벽에 떠나면..."
"크리스."
그래...
그걸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닌 거 안다.
"어느 순간부터 생겨나 있었어요... 이런 저라서 싫은 건가요?"
"아니야."
"그럼 왜 화를 내는 거에요?"
"..."
그래...
화가 난 건 라이디가 아니었다.
"크리스!"
"라이디가, 엄청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내게 호감을 느껴서 너무 기뻤어. 하지만 라이디가 날 여성으로 생각하고 끌렸다는 게, 애써 외면하던 현실에 마주하게 되니까, 나는 남잔데..."
"아니에요. 아니에요, 크리스."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가는 라이디.
"많은 사람이 제게 대시해 왔었어요. 잘생긴 사람도, 예쁜 사람도 많았죠. 하지만 하나같이 매력을 느끼지 못했어요. 이런 몸이 문제일 거라고, 그냥 평생 혼자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조용히 내 손을 끌어모아, 두 손으로 맞잡았다.
"네. 하지만 크리스에겐 처음부터 끌렸어요. 같은 여성에게 반했다고 생각해서 혼란스러웠어요. 그런데 여자 같은 남자라고 나나가 얘기해 준 순간, 안도하면서도 더욱 이끌렸어요."
두 눈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제 남성스러운 부분이 크리스의 여성스러운 부분을 좋아하는 건 맞아요. 하지만 훨씬 많이, 제 여성스러운 부분이 크리스의 남성스러운 부분을 더욱더 좋아하고 있어요."
잠깐 숨을 고르는 라이디.
붉은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크리스의 옆에서, 크리스의 남자다운 모습을 바라보며 살아가도 될까요?"
"라이디!"
"크리스!"
라이디에게 다가가 격하게 끌어안았다.
라이디의 정체 같은 건 크게 와닿지 않는다.
페니스 달린 여자일 뿐이잖아? 내가 박혀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여인이 나를 좋아하는 거라면, 남자로 바라봐 주는 거라면 그것만으로 만족한다.
...
다만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려면 더... 더...
한참 많이 커져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하는데...
하아...
"눈꼴시려. 방에 들어가서 해라."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보니 테사가 서 있었다.
쇼핑하고 온 건지, 양손에 종이봉투를 한 아름 안고 있다.
"테사? 무사해서 다행이네요."
"너 어디 있다가 왔냐?"
"내 마법, 알잖아."
별것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하는 테사.
이 녀석… 여전히 우리가 모른다는 거 깜빡한 것 같은데,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 싫으니 물어보진 않아야겠다.
그나저나 위험할 때 버리고 도망가 놓고 참 뻔뻔하기도 하다.
둘만 남아서 쉽게 도망가기도 했고, 라이디는 개의치 않아 하는 것 같으니 망정이지.
그리고 덕분에 라이디와 더 가까워지기도 했고...
…
라이디...
솔직히 아직 조금 혼란스럽다.
하지만 오히려 나랑 비슷하면서도 반대되는 처지라고 생각하니, 더 친근한 느낌이 든다.
그녀에 어울리는 남자가 되는 것. 그걸로 목표가 명확해졌을 뿐.
"그래서, 그 녀석들 어떻게 할까? 다 죽여버리고 올까?"
"테사, 방금 집주인에게 사정을 들었어요. 우린 조용히 떠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야."
진지하게 받아주는 라이디에게 으쓱하며 넘기는 테사.
테사는 항상 라이디의 말이라면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편인 것 같다.
내가 똑같이 하면... 통할 리가 없겠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스레 억울하다.
"혹시 일행분이신가요?"
소란스러워서 신경 쓰였는지 집주인이 돌아와서 물었다.
"응. 배고파."
테사가 오른손에 든 봉투를 집주인에게 건넨다.
"잘됐네요. 저녁 정도는 대접해 드리려고 했는데, 이걸로 해드릴게요."
집주인은 봉투를 받들고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
"앗싸! 크리스, 오늘 저녁은 스튜 아님! 잘했지?"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보이는 테사.
"솔직히 피곤한 하루라서 맛있는 거로 기분 전환하고 싶긴 했는데, 잘했어 테사."
"하지만 저녁까지 대접받다니, 우리가 너무 민폐만 끼치는 건 아닐까요?"
"사실..."
라이디에게 귀에 대고 속삭이는 테사.
"그렇게나 많이? 어디서 난 거에요?"
"후후, 그건 비밀이에요!"
봉투에 돈을 넣었나 보다. 라이디가 놀랄 정도로 많이.
그러면서도 검지손가락을 세워 입에 가져다 대곤, 흥흥거리며 가볍게 춤을 추듯 테이블 주변을 돌아다니는 테사.
우릴 버리고 혼자 도망간 게 미안해서 그런가, 오늘따라 귀여워 보일 수 있는 짓을 많이 한다.
하아...
저게 평범한 여자아이였으면 마냥 귀엽게 보고 있었을 건데.
목소리나 외모나 하는 짓이나 어딜 봐도 여자아이지만, 속은 남...
...
하......
솔직히 겉모습 외엔 볼 일도 없을 텐데
정말 그냥 여자아이인 걸로 생각할까?
"아무튼, 저녁 시간은 멀었으니까 마을 구경하고 올게."
"위험하진 않을까요, 테사?"
"맞아, 나돌아다니기엔..."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나 없는데 먼저 밥 먹지나 마. 그럼 다녀올게!"
두다다다... 끼익 쾅!
왼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테사는, 순식간에 뒷문으로 나가버렸다.
궁금해서 봉투를 살짝 열어봤더니 빵이나 소시지 같은 식자재들이 들어있다. 아마 우리 대신 보급까지 신경 써준 거겠지.
낭자애고 가끔 성격이 까탈스러운 거 빼곤 나름 괜찮은 녀석이긴 한데...
현실 부정하고 여자아이인 걸로 기억을 덮어씌워 버릴 건지는 조금 더 고민해 봐야겠다.
"크리스, 저는 식사 준비를 도와야겠어요. 돈을 드렸다고는 하지만, 마냥 손 놓고 있기는 그래서..."
"그럼 나도 도울게."
"아니에요. 피곤할 텐데, 올라가서 쉬어요."
"하지만..."
"아마 새벽에 출발해야 할 거예요. 크리스가 푹 쉬어주는 게 절 도와주는 거예요."
"알았어.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걱정 마세요!"
라이디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지만, 내가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다.
말마따나 푹 쉬는 게 도와주는 거겠거니 생각하며 2층의 침실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