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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랩 매지션즈-6화 (6/114)

〈 6화 〉 여행 시작 ­ 2

* * *

"준비됐나요, 크리스?"

...

오른손에 검이 들려 있다. 언제 집어 든 거지?

"그럼, 갈게요!"

순식간에 라이디가 내지른 검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으악!"

반사적으로 웅크리며 검을 들어 막아섰지만 느껴지는 건 없다.

그제야 올려다보았더니, 라이디의 검집이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아까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집중해요. 방금 크리스의 목이 잘려 나갔어요!"

라이디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냥 착하고 상냥했었는데...

날카롭고 예민한, 마치 잘 벼려진 검과도 같은 느낌에 순간 압도당했다.

검집을 거두고, 돌아가서 다시 자세를 취하는 라이디.

정신이 돌아온다. 전혀 아프지 않지만, 목이 잘렸다니 괜히 기분이 나쁘다.

"다음 합에선 남자다운 모습을 보고 싶어요. 크리스라면 충분히 가능하죠?"

라이디의 말이 뇌리에 박힌다.

그래, 아직 기회는 남아 있다.

최선을 다해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면 아까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을 거야!

나는 조심히 검을 내려놓았다. 쓸 줄도 모르고 거추장스럽기만 하다.

그럴 일은 없어 보이지만, 실수로 라이디에게 상처라도 입힐까 봐 겁나기도 하고.

"호오, 드디어 시작인가요?"

라이디는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짓곤,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무기도 없고 하니, 아까보다 힘을 빼고 봐줄 생각인 것 같다. 아마 적당히 방어만 하는 수준을 보여주는 거라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막는 것 정도론 부족해.

오늘의 실수들을 만회하고 싶다.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려면 허를 찔러야 한다. 라이디를 당황하게 해야 한다.

일말의 가능성을 구상해 내야만 한다.

상대방은 극도로 훈련되었을 오른손잡이 검사.

반면 나는 마법이라곤 살상력을 기대할 수 없는 피규어를 만들어내는 것뿐. 전투에 있어서는 정말 비루한 능력이다.

정공법으론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 트릭을 걸어 유효타를 먹이는 수밖에 없다.

설사 통하더라도 이기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터.

빠르게 전략을 구상해 보았다. 어차피 떠오르는 방법도 몇 개 없다. 개중에서 그나마 먹힐 만한 것들을 추려 시행에 옮기는 거다!

나는 다가오는 라이디의 앞에 바위가 솟아오르도록 했다.

"흣!"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뒤로 물러서서 피하는 라이디, 그리곤 다시 걸어오기 시작했다.

한 번 더, 라이디의 앞에 바위를 솟아오르게 한다.

"그건 통하지 않는다구요!"

라이디는 다시 물러섰다가, 움찔하며 몸을 움츠렸다.

"동시에 두 개도 소환할 수 있었다니, 방심했네요."

"이 정도는 별거 아니지. 아직 보여줄 게 많아."

허세를 부려본다.

하지만 이번 공격이 실패한 것은 너무 큰 패착이다. 확실하게 점수를 딸 수 있었는데!

처음 물러설 때의 거리를 보고, 그 절반 정도의 위치에 두 번째 바위를 소환했다.

물러서는 라이디의 뒤를 바위 소환물의... 그러니까 피규어의 손이 콕 찌르도록 노린 수였다.

라이디의 시야에서 절대 보일 리 없는, 사각에서의 공격.

하지만, 아까보다 움직임이 훨씬 적었다.

보폭 하나 정도로 물러섰던 직전과는 달리, 이번엔 한 뼘 정도밖에 움직이질 않았다.

게다가 라이디의 등에 조금도 닿지 않은 것 같다.

본능적으로 뒤에도 피규어가 솟아나는 걸 느낀 건지, 허리를 젖혀 피했으니까.

내가 라이디의 후퇴 범위를 파악했듯, 라이디는 내 바위 소환 마법을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를 바로 파악한 것 같다.

젠장!

이제 구상했던 수단은 하나 남았다.

이건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곤란한데...

"크리스가 봐준 것 같으니까, 유효타를 당한 거로 하고 다시 해볼까요?"

예상대로, 라이디가 검집을 바로잡고 돌진해 온다.

허를 찔러 뜻밖의 방법으로 당할 뻔하게 하면 라이디의 호승심이 자극될 줄 알았다.

이런 식이라면 생각보다 할 만한데?

하지만 방심은 이르다. 이번에도 라이디의 코앞에 바위를 솟아오르게 했다.

"같은 수에 또 당하진 않아요!"

멈추지 않고 옆으로 피하는 라이디.

같은 수에 또 당할 리가 없지. 내 비장의 카드는 뒤에 있지 않아!

"걸렸다!"

달려온다면, 가급이면 멈추기보다는 피하려 할 것이다.

등신대 피규어를 점프해서 넘어갈 리가 없다. 좌측, 혹은 우측으로 비껴가려 할 것이다. 그것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라이디는 오른손잡이니까, 본능적으로 오른쪽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반반보다는 조금 더 높을 것 같은 확률에 걸고, 첫 번째 바위의 사각에 가려 보이지 않도록 왼쪽 뒤편에 두 번째 바위를 소환해 뒀다.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설사 몸을 던져 피하더라도 그곳에 곧바로 소환하면 반드시 유효타가 들어간다!

"읏, 하아앗!"

라이디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검집을 내질러

부숴버렸다.

"아주 좋은 시도였어요. 하지만, 제가 이길 것 같네요."

"헐, 저거 부술 수 있는 거였어? 쩐다!"

하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테사의 말대로 경이로운 능력이다.

웬만한 마법에도 끄떡없었는데, 너무나 쉽게 부숴버렸다.

맘 놓고 구경하는 입장이면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을 텐데... 당하는 입장에선 전혀 즐겁지 않아!

말 그대로 바위를 깨부숴버린 라이디에 정신이 팔려서, 라이디가 근접하는 걸 허용하고 말았다.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방어를 준비한다.

마치 이 정도는 막을 수 있지 않냐는 듯, 느린 공격이 들어왔다.

피규어를 소환해 가며 막았지만, 합이 진행될수록 라이디가 검집을 휘두르는 속도가 빨라지는 게 느껴진다.

지금은 피규어에 막히면 순순히 다음 공격으로 전환하고 있지만, 라이디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부숴버리고 날 공격할 수 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느낀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그 순간부터 좌절감이 미친 듯이 몰려왔다.

이건 그저 어디까지 가능한지 일방적으로 시험을 당하는 것뿐.

내겐 마법사로서의 어드밴티지가 전혀 없었던 거다.

아무리 전략을 짜더라도 라이디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거였다.

"하압!"

방향을 틀어 머리 위에서 강습해오는 라이디. 이건 막을 수 없다!

포기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내 마법으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걸까...

마법­

처음으로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는 매우 사소했다.

나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싶다는 생각을, 치기 어린 염원을 가이아께서 들어주신 걸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샌가 손바닥 위에 '장난감'이 놓여 있었다.

사각형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샛노란 색의 무언가.

열심히 가지고 놀다가 인퀴지터에게 속아 끌려갔고, 그 이후로는 본 적이 없었다.

피규어를 만드는 데 지쳐서, 하루 내내 탈출할 방법을 구상하느라, 그저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외면했다.

아니,

매지션즈에 끌려 오게 만든 원인이라서, 남자로서의 인생을 망친 원흉이라서 꼴도 보기 싫었다.

...

하지만,

생각해보면 처음 그걸 얻어서 가지고 놀았을 때, 그때가 가장 즐거웠던 것 같다.

장난감... 어떻게 만드는 거였지?

순간, 손끝에서 힘이 응축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이 멀어지는 순간­

"끄으윽..."

눈을 떠 보니, 라이디가 주저앉아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장난감'을 만들어내는 마법이 라이디의 고간을 때린 것 같다.

"라이디! 미안해, 괜찮아?"

"으으..."

"이래저래 사고만 치네. 너도 참 대단하다."

핀잔을 주는 테사가 야속하지만, 어쨌든 기습을 한 거라 할 말이 없다.

"아... 아니에요, 제가 방심한 거니까요. 숨겨둔 마법인가요?"

다행히 라이디가 금방 회복한 것 같다. 아마 남자가 거기를 맞을 때보단 나아서겠지.

"아니야. 위험하다고 느꼈더니 무의식적으로 나온 거라..."

"잘했어요. 전략도 좋고 임기응변도 뛰어나고, 크리스는 역시 멋있어요!"

"헤헤..."

칭찬받았다!

"피규어는 어떻게 부순 거야?"

"부숴질 거로 생각한 건 아니고, 본능적으로 공격했어요. 사람 모양이니까 약점을 공격해본 거예요."

"흐음... 가능성 있네."

테사의 말마따나 확실히 일리가 있다. 같은 모양이니까 약한 부분도 같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물리적인 충격을 주는 갖은 마법들에도 끄떡없던 피규어인데...

약점을 공격한다는 게 그렇게 차이가 큰가?

물론, 매지션즈의 마법사들이 나사가 빠져 있는 걸 수도 있지만.

"그건 그렇고, 테사도 멋있는 모습 보여주지 않을래요?"

"난 태생부터 지금까지 줄곧 예쁘고 멋져.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티가 나잖아?"

쳇, 낭자애 주제에 뻔뻔하다. 마법 덕분에 예쁘장하게 자란 거겠지.

같은 처지인 나로선 할 말이 없지만...

"아쉽지만, 다음번을 기약해야겠네요."

"아, 설거지는 내가 할게."

"고마워요 크리스."

"헤헤..."

1점 더 챙기며 식기들을 챙겨 냇가로 향한다.

오늘은 그래도 반타작은 한 것 같다.

말을 더듬고 테사에게 밀리는 모습만 보여주다가, 라이디와의 대련에서 허를 찌르는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흐흐...

다만 마지막에 라이디를... 게다가 하필 그곳을 공격해서...

너무 미안한데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부위가 부위다 보니 괜히 말 꺼내는 게 더 어색하다.

어디든 다른 곳이었으면 멋지게 역전한 것처럼 포장할 수도 있었을 텐데!

흐음...

그보다 여자도 거길 맞으면 아픈 걸까? 남자만 무진장 아픈 거면 조금 억울한데.

라이디가 꽤 빨리 회복하길래 갑자기 궁금해졌지만, 라이디에게 물어본들 답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

오만 생각을 다 하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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