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여행 시작 1
* * *
"잘 먹었습니다!"
페르낭드를 무사히 빠져나온 우리는 캠프를 꾸리고 저녁을 먹었다.
점심과 마찬가지로 스튜에 빵이었지만, 불평할 처지는 아니다. 엄청 맛있기도 했고.
그리고 가장 큰 소득이라면, 계속 같이 있다 보니 라이디를 대하기 어려웠던 것이 조금은 나아졌다는 점이다.
혹시 여성 공포증 같은 거라면 어쩌나 잠깐 걱정하기도 했지만 기우였다.
역시 내 몸 안엔 10년의 낭자애 생활로도 바꿀 수 없는 상남자의 피가 흐르는 게 분명하다!
좋아, 이젠 인기남 라이프가 시작되는 일만 남았다. 라이디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어서 반하게 만들겠어!
...
그 전에, 쫓아오고 있을 인퀴지터부터 해결해야 하는데... 이렇게 느긋하게 쉬고 있어도 되는 걸까?
"라이디, 정말 괜찮은 건가요?"
가볍게 웃어 보이는 라이디.
새삼스럽지만, 가볍게 웃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저 미모에 반한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 같은데, 나를 바라봐준다는 게 신기하다.
착각은 아니겠지?
"나나에게 언질을 줬으니, 이틀 정도는 괜찮을 거예요."
"그 꼬마애 정체가 뭐야?"
테사가 마침 궁금했던 부분을 물어본다.
"페르낭드 공작 전하의 외손녀딸이에요. 장차 페르낭드를 이끌 크라운 프린세스시죠."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었다고?
미셸에게 협박 비스무리한 것을 한 걸 봐서 무언가 있겠거니 싶었지만, 라이디가 스스럼없이 대하는 걸 보아하니 귀족 자제 정도일 거라곤 생각했다.
하지만 공작이라니!
혹여 공작 전하께서 내가 도서관에서 나나를... 아니, 나나 님을 울린 걸 아시면...
"그거 알아? 크리스가 아까 도서관에서..."
"잠깐!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했었는데 이렇게 되어버렸지? 다음에 도착하는 마을에서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흐음... 나쁘지 않네. 그래서 나나가?"
"나나를 통해 공작 전하께 미셸을 붙잡고 있어 달라고 부탁을 드린 거죠."
나 같은 서민들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붙잡네... 권력자랑 친한 건 역시 좋은 거구나.
왕국 정도의 권력이면 매지션즈에 저항할 수 있을까?
...
마법을 배워서 저항하는 게 더 현실적이겠지.
"그럼 라이디도 높으신 분이야?"
"아니에요, 테사. 얼마 전까지 어머님이 공작 전하의 보좌관으로 일하셨어요. 그러다 보니 가끔 제가 나나를 돌봐주면서 친해진 거에요."
"왠지, 혼자 사는 거 같은데 넓은 집이더라."
"지금은 부모님께서 알마게스트 공국에 가셔서 혼자 지내고 있었어요. 그래서 크리스를 만나게 된 게 얼마나 행운인지 몰라요."
"저요?"
"음... 운명의 상대, 라고 할까요?"
고백한 거 아닌가? 이거 고백하는 거 맞지?
"그... 그러니까..."
"그건 차차 이야기하도록 하고, 지금 두 분은 정확히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된 건가요?"
"난 귀찮으니까 크리스가 설명해줘."
"... 설명?"
"매지션즈에서 나온 이야기 하라고."
고백에 답하고 싶은데!
당황해서 머뭇거리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다음엔 지체 없이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라이디에게 상황을 알려주었다.
"... 인퀴지터에 대항하기 위해 마법을 익히는 게 먼저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마녀를 찾다가 나나를 만나고, 라이디를 찾았고..."
"이렇게 되었죠. 더 은밀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겠네요."
"맞아, 크리스."
핵심을 찌르는 라이디. 그리고 답답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말하는 테사.
도서관에서의 마녀 탐색은 끔찍한 수준이었다는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안다. '나 잡아가 주세요' 하고 광고하는 꼴이었으니까.
하지만 억울하다. 난 두 명의 여인과 인사 정도만... 그것도 앞에서 벌벌 떠느라 제대로 하지도 못했는데...
솔직히 도서관에서 이래저래 떠들고 다닌 테사 네 녀석의 탓이 더 크잖아!
대놓고 내 탓을 했으면 반박이라도 해봤을 건데, 교묘하게 피해 가서 할 말이 없다.
괜히 테사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도 좀스럽고, 속으로 삼킬 수밖에.
"마녀를 찾는 건 위험요소가 많은 것 같아요. 우선 마녀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정도에서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우연이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하아...
테사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셋이 있는 상황에선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이대로 가다간 나만 '인퀴지터에게 들킨 대역죄인'이 되는 분위기다. 자리를 피하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다.
그래도, 이런 상황이 나올 것 같아서 미리 생각해 둔 비장의 수가 있다.
누구나, 특히 테사가 하기 싫어하는 걸 나서서 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작은 부분부터 공략해 나가는 거다!
설거지를 하기 위해, 묵묵히 주변의 식기들을 줍는다.
아아, 라이디는 외모에 걸맞게 식사도 아름답게 하는지 음식을 담았던 그릇들도 정갈한 느낌이다.
반면 테사의 것은 더럽... 게 깔끔하다. 라이디의 식기보다 훨씬 깨끗하다. 이게 사용한 거라고?
그럼 내가 제일 지저분하게 먹은 거잖아?
별거 아니지만, 라이디 앞에서 테사에게 자꾸 밀리는 것 같아서 괜히 서러운데...
"뭐 하고 있어요?"
"설거지 하... 려고..."
라이디가 말을 걸어와서 뒤돌아보니, 고혹적인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작은 분홍색의 입술은 모닥불의 빛을 받아 은은하면서도 진하게 나를 유혹해 온다.
라이디를 대하기 쉽기는 개뿔, 오히려 가까워질수록 숨이 멎을 것만 같다!
"그건 미뤄두고, 너무 늦어지기 전에 할 일을 하죠."
일어서서 결연한 표정을 지은 채 내게 다가오는 라이디.
꿀꺽
마른 침을 삼킨다.
할 일? 설마...
라이디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의 망상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다가온 라이디가 내 어깨를 짚었다.
아아, 드디어
어머니, 아버지.
제가 드디어 어른의 계단을 올라갑니다.
라이디의 입술이
"등 뒤를 맡기려면, 여러분이 뭘 할 수 있는지 알아야겠어요."
"에?"
"그럼 먼저 테사, 어떤 마법을 쓸 수 있죠?"
"나? 나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돼. 너희는 서로만 신경 쓰면 되니까. 그렇지, 크리스?"
"..."
"..."
"그... 그렇지?"
"너 설마, 이름도 까먹은 주제에 내 마법도 까먹은 건 아니겠지?"
"그러니까... 에... 그게... 화 속성...? ......이 아니라..."
"절대, 절대! 안.알.려.줄.거.야! 궁금하면 기억해 내던가!"
순간 당황해서 바로 답을 못했더니, 테사가 눈치채 버렸다. 최후의 수단으로 확률이 가장 높은 거로 찔러 봤는데 아니었나 보다.
솔직히 억울하다. 내 눈앞에서 마법 쓴 것도 아닌데, 까먹을 만한걸 까먹었다고 여자애처럼 삐져 있다.
"그럼 크리스는?"
"그게... 바위를 다루기는 하는데요..."
'미소녀 바위 피규어 만드는 거 밖에 할 줄 몰라요!'라고 말하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
"맞아,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테사처럼 편하게 말해도 돼요."
"그럴까요? ...... 그... 래? 그럼 라이디도..."
"저는 누구에게나 높이는 게 습관이기도 하고, 기사 지망생이니까요."
하긴, 어떤 상대든 높여 말하는 게 기사의 품위에 어울리긴 하다.
그러고 보니 라이디는 몇 살이지?
아마 라이디가 연상일 것 같지만, 지금은 물어볼 만한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 나중에 조금 더 친해지면 물어봐야지.
테사 녀석의 나이 따위는 알 바 아니고.
......
...
나보다 나이가 많다면... 누나...
...
가 아니고 형... 으아아아아아아!!!!!
괜히 생각했다. 멘탈이 부서질 것만 같아! 그냥 모른 척하고 여자애라고 생각할까?
라이디 외에는 최대한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다.
"아무튼, 크리스의 마법 보여줄 수 있어요?"
"그건... 조금... 곤란한 게..."
"괜찮아요. 아무것도 못 하는 저에 비하면 대단한 거잖아요. 자신감을 가져요, 크리스!"
아아
라이디라는 여인은 나에게는 분에 넘치는, 너무 완벽한 존재가 아닐까?
남성적인 모습을 맘껏 어필해도 모자랄 판에, 여성스러운 외모로 여성형의 바위나 만들어야 하는 내 처지에 자괴감이 몰려온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라이디가 부탁하는 걸 들어주고 호의를 쌓는 게 최선인 듯하다.
"10년이나 해놓고 이제 와서 앓는 척은. 닳는 것도 아닌데 빨리해라."
... 라이디와 깊은 관계가 되려면, 저건 언젠가는 버리고 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럼, 라이디를 위해 보여줄게."
"오오!"
기도하듯 손을 모은 채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보는 라이디.
저 외모에 귀여움까지 갖추다니!
그녀라면 무엇이든 이해해 줄 것 같다. 피규어를 보더라도 내 상황을 납득해 주겠지?
그래, 해보는 거야.
손에 마력을 집중해 갔다. 그저 무엇을 만들지 생각하고 발현하면 된다. 몸이 모든 과정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 라이디를 상상해 본다.
......
...
잠깐,
다른 모양의 바위를 만들 수 없을까?
바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내는 걸 연습했다.
사물을 흉내 내는 건 난이도를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널리고 널린 낭자애 모양으로 만들어보곤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었고, 이후 여기저기서 주문이 쇄도해서 여성 조각상, 즉 피규어만 만들어 대는 공장처럼 살아갔다.
거부할 수 있었지만, 거부하지 않았다.
피규어 공장으로서의 삶이 매지션즈에서 하기 싫은 것들을 기피할 수 있는 간단한 수단이 되어주었으니까.
마냥 착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닌 매지션즈에서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이고 가치였으니까.
그렇기에 처음 마법을 익히던 시절 이후론 피규어가 아닌 바위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 이젠 어떻게 만드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미소녀 바위 피규어를 보여 줄 뿐, 더 나빠질 건 없으니 시도는 해 봐야겠다.
무생물, 나무 같은 걸, 아니면 그냥 평범한 바윗덩어리를 소환해 볼까?
아냐, 완전히 다른 걸 시도하다가는 분명 망한다. 안 그래도 소심해 보이는 첫인상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진 않아!
익숙하지만 조금 다른 걸 해야 한다.
피규어를 만들어야 한다. 다만 여성이 아닌 남성을 만드는 거다.
내가 목표로 하는 상남자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훤칠한 키,
듬성듬성 났지만, 마초적인 매력을 더하는 수염,
구릿빛의 근육질의 피부에,
...물론 '그곳'의 자존심도 중요하지!
"뭐 이리 오래 걸리냐?"
"..."
테사의 불평은 한 귀로 듣고 흘린다. 침착하게 기다려 주는 라이디를 위해 더욱 집중한다.
남성의 옷은... 옷이...
기억이 나긴 하지만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10년동안 질리도록 본 낭자애들의 여성스러운 옷만 떠오를 뿐.
어쩔 수 없다. 과감하게 옷은 제외한다. 강행하다 실수하면 드레스를 입은 근육마초 상남자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아까 마을에서 남자들의 패션도 봐뒀어야 했는데...
하지만 지금 돌아갈 기회를 주더라도 마을 처녀들에 눈이 돌아갈 것 같다.
그마저도 라이디의 아름다운 외모가 전부 묻어버렸지만.
라이디...
...
아차!
남자를 만들어야 하니까, 애써 라이디에 대한 생각을 한쪽 구석으로 몰아버렸다.
...
심상은 잡혔다. 제발!
"하앗!"
마법을 시전한다.
...
...... 성공했나?
"그, 저건... 하으... 그러니까..."
"크리스의 취향 잘 알겠네. 조금 역겹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말은 안 할게."
라이디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고, 테사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남성의 상징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거겠지.
옷을 입힐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미소녀 피규어를 만드는 것보단 예술적인 느낌이 들테니까, 최소한 변명의 여지는 있잖아?
처음 시도한 나의 역작에 눈길을 준다.
적당한 키,
보기 좋게 근육이 자리 잡은 신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굵고 우람하고 흉악한 게 달린...
여성의 나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 말았다.
라이디와의 관계는, 내 짧은 인생은 여기서 끝나는구나...
"크흠, 그러니까... 실전에서도 유용한지 볼까요?"
"......"
"크리스, 진짜 사람 같은 조각상이라 놀랐어요. 대단한 능력이잖아요. 기운 내요!"
검을 건네며 다독여 주는 라이디.
분명 특이 취향의 변태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인데, 애써 좋은 말을 해주는 마음씨가 너무 곱다.
"...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저... 저건 크리스의 이상형 같은..."
"아니아니, 남성형으로 만들려다가 실수한 거야. 제발 믿어줘!"
"그런가요..."
생각에 잠긴 듯한 라이디.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같아 너무 괴롭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