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만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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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정도 걸었을까,우리는 매지션즈 근처의 도시 페르낭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예상보다 일찍 추격자들에게 쫓기느라 길을 잃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는데,다행히 테사가 길을 잘 골라 목표하던 곳으로 오게 되었다.
곧바로 여관에서 푹 쉬고 점심시간 즈음하여 시내를 둘러보러 나왔다.
페르낭드는 서남쪽 평야 지대에서 남부지방 최대의 항구였던 올가로 상품을 운송하는 길목의 한가운데에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하지만 라디안 제국이 수차례 분열되는 과정에서 제국에 대한 견제의 일환으로 다른 교역로들이 활성화되기 시작했고,올가항을 중심으로 하는 교역로 자체가 쇠퇴해 버렸다.
그러다가 바이어슈트라스 왕국이 독립할 때 강제로 독립 당했다.바이어슈트라스가 차지한 제국 본토 동쪽 지방을 다스리던 공작들을 내쫓기 위해,인구는 많지만 쓸모없는 이 근방의 도시 하나하나를 공국으로 지정하여 분배했다.이렇게 생겨난 공국들은 독자적으로 자생하기 어려웠기에,한데 모여 루이스 연합 공국을 이루게 되었다.
척박한 산지가 많은 데다 제도 힐베르트의 배후지였다는 것을 제외하곤 당시로선 특출난 이점이 없는 지역이었고 그래서 독립 초기에는 부침이 있었다.
그래도 적당한 수준까지 인구 유출이 이루어지기도 했고,제도 근처인지라 학자나 마녀들이 많이 있었던 점을 십분 활용하여 국가의 기간산업을 교육 분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특히 마법 아이템의 주 생산지로 주목받게 되었다.
하지만 마녀들이 많은 루이스 연합 공국에서도 공격 마법을 사사해 줄 마녀를 찾기는 쉽지 않다.닐스 해방전쟁 이후로 줄곧 전투 계열 마녀들이 홀대받다 보니 씨가 말랐으니까.
물론 이 근방에는 제국 시절에 세를 구축했던 마녀들의 가문들이 여럿 자리 잡고 있고,그들은 여전히 전투 마법을 전승해 오고 있다.그러나 그들을 찾아가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매지션즈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테사는 찾아가서 적당히 마녀인 척하자고 했지만 단칼에 거절했다.인퀴지터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그딴 녀석과는 위험의 정도가 다르다.혹여나 걸리면 테사는 나 잡으려고 잠복근무 중이었다는 둥 핑계를 댈 테고,결국 나 혼자 잡혀갈 게 뻔하다.
그러니 그나마 발각될 걱정을 덜어낼 수 있는,은거하고 있는 마녀를 찾을 방법을 구상해야 하는데...
자꾸만 주변에 시선이 간다.
정확히는 지나가는 여자 사람들에게 시선이 간다.
뭣도 모르던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사실상'여자'라는 생물체를 난생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냥 평범한 마을 처녀들인데,여성스러운 맵시만 보여도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린다.게다가 그들이 내 시선을 눈치채고 흘깃 쳐다보고 가는 것 같아서 더욱더 부끄럽다.
하지만 눈을 뗄 수가 없다.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던 성숙한 여인들이 당장 눈앞에 있는데,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어쩔 건데!
"크리스,도서관으로 가보자."
"...아...뭐?도서관?"
"응.도서관."
마녀를 찾아야 하는데 도서관이라니,정신이 팔려 잘못 들었나 싶었다.
도서관.
도시에나 있을 법한 시설인지라 어릴 적에는 그런 곳이 있다는 것도 몰랐지만,매지션즈에 들어간 초기엔 지겹도록 들락날락했던 곳이다.
책에 열중하고 있으면 잠시 매지션즈의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평생을 투자해도 다 읽을 수 없을 정도의 빼곡히 쌓여 있는 마법에 관한 책.그것들은 내가 낭자애가 되려고 온 것이 아닌,마법을 배우러 왔다는 사실을 상기 시켜 준다.
그래서 분위기 때문에라도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지만,슬슬 배가 고프기도 하고 어렵게 탈출한 직후인지라 한동안은 책과 거리를 두고 싶은데...
"기껏 나왔는데,겨우 도서관이 가고 싶어?"
"응.마녀를 찾아야 하잖아.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건 어린아이,노인 그리고 마녀뿐이야."
"......"
테사에게 이렇게 엉뚱한 면모가 있었나?
마법에 관한 책들은,사실 마법을 쓰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어떤 마법에 대해 아무리 상세히 적혀 있어 봤자, 어떻게 쓰는지 알 수가 없다.
좋은 스승에게 직접 전수받거나,뛰어난 재능으로 비슷하게 발현하거나,밑도 끝도 없는 고생 끝에 우연히 터득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야 책의 내용이 아주 조금씩 의미를 지니기 시작한다.
대충 정리하자면 어떤 마법을 익히는 데 있어95%정도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 자체에 있고,책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다만 나머지5%를 채울 수 있는 수단 중의 하나가 책일 수 있는 것이다.
점차 도서관에 가지 않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마법에 관한 책이래 봤자 정말 심층적으로 파고드는 논문뿐이다.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당장 쓸모가 없었다.
그러니 매지션즈의 도서관이나 큰 국가의 국립도서관 정도가 아닌 이상에야 마법 관련 전문 서적을 구비해 둘 이유가 없다.더하여 굳이 이런 시립도서관에서 한가하게 죽치고 있는 마녀도 있을 리가 없다.
아무 말 없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대놓고 쳐다봤는데도,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어 이쪽에 눈길조차 주질 않는다.이미 마음은 도서관에 가 있는 것 같다.
별수 있나.무슨 말로 설득해도 듣지 않을 테니 얼른 갔다 오는 게 나을 것 같다.
점심시간이라서 그런지,도서관 내부는 한산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큰 건물이었지만,내부는 예상보다도 훨씬 넓다.
1층은U자 형태의 로비에 더하여,안쪽에는 책을 가져와 편하게 읽을 수 있게 책상들이 배치되어 있다. 2층에는 책장이 빼곡하게 들어섰다.게다가 일반적인 건물들보다 유리창도 많고,하얀 대리석이 바닥에 쫙 깔려 있어 전체적으로 밝고 상쾌한 느낌이 든다.건물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오히려 숨통이 트이는 듯한 기묘한 느낌.
매지션즈의 도서관도 이렇게 깔끔하게 생겼다면 조금 더 편하게 생활했을 텐데,크기만 클 뿐 사실상 방치되고 있어서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튼,우리는2층에서 책을 찾는 사람들과 슬쩍 대화해보기로 했다.책을 읽는 사람들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나는 책을 찾고 있는 여인들과 대화하며 마녀인지 아닌지 떠보았다.
그리고 지금,홀의 벤치에 널브러진 상태다.
이성과 대화하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아니,내가 한 건 대화라고 할 수 있는 수준에 전혀 도달하지 못했다.
그냥 책 읽으려는 사람일 뿐인데,이 세상의 절반이나 속해 있는 성별의 흔한 사람일 뿐인데,
말을 꺼내질 못하겠다.쭈뼛거리며 서 있었더니 친절하게 다가오는 게 더 부담스럽다.
게다가 나를'여자아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더욱 혼란스럽다!
결국 두 명째의 여성과 간신히 대화...를 빙자한 무언가를 마치고 쉬러 내려왔다.
아니,도망쳤다.마녀인지 아닌지는 전혀 알아내질 못했다.
반면 테사는 아직도 여기저기 쏘다니며 물어보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젠장...
...
사실 아무렇지 않은 게 정상이지.
당장 상남자가 되거나 뛰어난 마법사가 되는 게 문제가 아닌 것 같다.미녀를 꾀는 건 어림도 없다.
평범한 여자 사람이랑 평범한 대화도 못 한다니!
내 꿈은0단계부터 어긋나 버린 것 같다.
"나는 남자다.나는 남자다.나는 남자다.나는 남자일 수 있다..."
주변에 들리지 않게,바닥을 향해 조용히 자기암시를 걸어 보았다.
그래,나는 남자다.남자아이다.여자아이 따위가 아니다!
조금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은데.
"언니,뭐 하고 있어?"
뿌득
"언니...가 아니라...오빠...란다...?"
"언니같이 생겼는데,오빠야?"
"..."
시선을 앞으로 옮겼다.
책을 품에 안고 있는 갈색 단발머리의 여자아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날 바라보고 있다.
"머리카락도 길고 목소리도 예쁜데 언니 아니야?"
"하아..."
두통이 일순 밀려와 나를 덮친다.
"머리카락 기르지 말란 법은 없지 않니?"
"언니는...오빠는 치마 입어?"
"치마...그래......입을 수도...있지......"
인생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 같아 자괴감이 몰려온다.
"그럼 언니는..."
"아오!언니가 아니고 오빠라니까!!!"
"......"
아차차!
도서관이라는 걸 잊고 그만 소리를 질러버렸다.
걱정돼서 올려다보니,역시나 아이의 눈에 눈물이 송골송골 맺혀 간다.
"저기 그러니까..."
"흐아아앙!"
온갖 시선이 이쪽으로 모이는 게 느껴진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조용히 하겠습니다. 조용히 시키겠습니다."
일어나서 빠르게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그리고 아이를 끌어안았다.
"울지마,언니가 잘못했어.오빠 아니야,언니 맞아.그렇지?어딜 봐서 오빠야?"
"흑...언니 맞아?"
"맞아."
"...하지만 오빠인 거야?"
"......그것도 맞아."
아이가 무언가 기대하는 게 있는 것처럼 눈을 반짝인다.이 아이는 언제 울었나 싶을 정도로 표정이 달라지는구나.
"그럼...사실...비밀이 있는데...언니는 지켜줄 수 있어?"
"응,언니가 실수했으니까,비밀 지켜줄게."
'비밀인데 말해도 되는 거야?'라고 묻고 싶지만,비밀이 뭔지 묘하게 궁금하니 꾹 참았다.
뭐,별거 아니겠지만.
"오빠면서도 언니인 사람 나나도 알고 있다?그래서 언니한테 물어본 거야."
"......정말?"
"응!"
오빠면서도 언니라면 분명 낭자애일 것이다.그렇다면 마법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숨어서 살아가는,같은 처지의 마법사라면 우리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을까?본인이 도와주지 못하더라도,다른 마법사를 연결해 줄지도 모른다.
우연히 좋은 기회를 얻은 것 같다.
"시끌시끌하던데 여기서 뭐 하냐?"
마침 테사가 내려왔다.
감이 좋은 건지,이 녀석이 하자는 대로 하면 시원찮은 것 같은 데도 잘 풀려 간다.
오델린님의 가호라도 받고 있는 건가?
"테사,이 아이가 우리가 찾는 사람을...
"꼬맹아 네가 마녀라고?"
하아...
하지만 답이 없는 녀석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