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11/33)

"안돼.. 못해.. 절대.. 이걸 어떻게.. 나한테 한마디도 없이.."

"아.. 오빠 미안 정말 미안해.. 나도 여기 와서 알았다니까..."

민혁과 혜원은 한시간전부터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아니.. 뭐 어때.. 청바지를 입고 찍나.. 수영복을 입고 찍나.. 똑같이 사진찍는 일인데.. 왜.. 안쨈募?거야..?"

"그게 어떻게 똑같아.. 수영복은.... 암튼 안돼.."

"제발 부탁이다.. 오빠야.. 오빵..오....방...."

혜원의 야양은 처절했다. 그러나 절대 승낙할 수 없다는게 민혁의 생각이었다.

"그럼.. 나두 안해.. 이제.. 이거 안한다고 소문나면.. 일 다 끊어질거야.. 난 백조가 되구... 그럼 이제 끝이네.."

혜원이 강경책을 선택했다. 픽 토라져 쏘아부치고 뒤돌아 스튜디오를 나가버렸다.

"야.. 혜원아.. 잠깐. 어디가..?"

민혁은 당황하며 혜원을 따라 갔다.

"좋아.. 해.. 하지만 무슨일이 생겨도 난 책임없다.."

민혁은 겨우 혜원을 따라잡아 돌려세우고 말을 했다. 그의 말에 좀전의 새침한 표정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예의 혜원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는 입이 귀에라도 걸린 양 좋아서 어쩔쭐 몰라했다.

"정말.. 정말이지.. 와우.. 옛스.. 크크크.."

혜원은 와락 민혁의 팔을 꼭안았다.

스튜디오 찰영 스테이지... 모든 찰영 스테프들이 벌어진 입을 닫을 생각도 못하고 어느 한지점 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엔 혜원도 있었다.

"어.. 저기.. 찰영.... 안해요.?"

머쓱해진 민혁의 말에 마법이 풀린 사람들처럼 스텝들이 정신을 차리며 부산하게 자신들의 맡은 일을 계속했다.

"와우.. 민혁씨.. 몸 정말 환상인데요.. 피부 색부터.. 정신을 못차리겠네.."

사진 작가는 민혁의 몸을 찬찬히 그러나 끈끈하게 바라보며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혜원도 그녀의 옆에서 그녀의 말에 공감이라도 하듯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민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여.. 촬영.. 사진 안찍어요..?"

다시한번 민혁이 그녀들의 본분을 깨닫게 해주는 말을 던졌고 그제서야 동공이 풀린 그녀들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 그래요.. 우선.. 저기서부터 시작하죠..?"

사진작가는 자신의 치부를 들킨것처럼 허둥대고 있었다. 혜원은 민혁의 옆으로 다가가 작가가 시키는 대로 포즈를 잡았다. 민혁도 작가가 시키는 데로 자세를 잡아보지만 왠지 어색했다.

"민혁씨.. 그게 아니고.. 이렇게.. 이렇게.. 얼굴 좀 풀고.. 아니 아니.. 이렇게.."

한참을 민혁의 자세를 잡아보려고 이런 저런 주문을 했지만 좀처럼 그녀가 원하는 자세가 나오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민혁에게 다가가 직접 자세를 잡아주려고 손을 뻗었다.

'찡이잉...'

그녀가 민혁의 어깨를 잡는 것과 동시에 짜릿한 그러나 기본 좋게 느껴지는 전류가 그녀의 손을 통해 전신을 훑어버렸다. 순간 다리의 힘이 풀리면서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자 버렸다.

"이게.. 아.."

그녀는 그렇게 주저 앉은체 멍한 눈으로 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은 이런일이 버러지리란걸 알고 있었다는 듯 혜원을 쳐다보았다. 혜원은 지금 저 사진작가의 행동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한참을 넋넣고 앉아있던 작가가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고 아직도 후둘거리는 다리때문에 겨우 의자를 집고 일어설 수 있었다.

"오늘 촬영을 못하겠네요.. 갑자기 몸이 않좋아 져서.. 내일 다시 하죠..?"

그녀는 이렇게 혼자 말해버리고 돌아서서 자신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영문을 모르는 혜원은 어리둥절하여 이미 닫혀버린 작업실 문과 민혁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도 가자.. 내일 한다잖아.."

"응.. 응... 그래야지.. 근데 이상해.. 왜 갑자기 저러지..?"

민혁은 그녀의 질문을 무시한체 탈의실로 들어갔다.

시원하게 뚤린 고속도로를 빨간 스포츠카가 기분좋게 달리고 있었다. 그 차안에는 어디다 내어놓아도 빠지지 않는 선남선녀가 있었다. 그들은 달리는 차안으로 들어오는 상쾌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말없이 그 느낌을 느끼고 있었다.

"어디가는 거야..?"

문득 혜원은 목적지가 어딘지 궁금해졌다. 스튜디오에서 나와 무작정 민혁은 혜원을 태우고 이렇게 한적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아무말도 없이...

"오빠.. 어디가는 거냐구..?"

"응.. 가보면 알아.."

"칫.. 뭐야.. 나 갈래.."

"정말.. 내려줘.. 기다려.. 다왔어.. 오늘.. 어쩌면.. 집에 못들어 갈지도 몰라.."

민혁은 처음에는 장난치는 것처럼 얘기하다 뒤에는 천천히 드문드문 얘기를 했다. 그의 말을 들은 혜원은 갑자기 가슴이 콩당콩당 뛰며 숨이 가빠졌다. 그리고 정신이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머릿속에서 집에 못들어 갈지도 몰라 라는 민혁의 말만 맴돌고 있었다.

차는 그렇게 30분정도를 더 달려 어느 한적한 동해안의 작은 모텔로 들어갔다. 차가 멈추고 민혁은 혜원을 한번 쳐다보고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혜원은 고개를 숙인체 아무말도 없이 숨만 가쁘게 쉬고 있었다. 갑자기 혜원쪽 차문이 열리고 민혁은 혜원을 쳐다보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에게 고백할께있어.. 내려봐.."

"..."

혜원은 미동도 없이 그대로 앉자있었다.

'이건.. 내려야 되나..?'

'어쪄지.. 나도 바라던 거잖아..?'

'아냐.. 너무 빨라 난 그냥.. 천천히..'

'어짜피 할껀데.. 바로 가는 것도 괜찮잖아..'

'아냐.. 아냐.. 난 그렇게 헤프지 않아. 민혁씨가 어쩌면 날 시험하고 있는지도 몰라..'

'민혁의 눈을 봐.. 그냥하는 말이 아닌데.."

수도없이 혜원의 자신에게 묻고 자신이 답을 하고 있었다.

"내가 널 어쩌려고 하는게 아냐.. 네가 꼭 알아야할 것이 있어서 그래.."

"...."

혜원은 아직도 마음속의 자아와 치열하게 싸움 중이다. 담배 한가치를 피울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혜원은 뭔가 결심한 듯 두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새빨간 사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래... 오빠.. 마음에 준비좀.. 하느라고..."

"무슨 마음에 준비..?"

"오빠가 원한다면.. 나 다줄 수 있어.. 나.. 오빠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혜원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근데 갑자기 아무말도 없이 여기까지 오니까.. 좀 떨려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뭘 주겠다는 거야..?"

"나.. 날 가져.."

민혁은 아무래도 혜원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같았다. 민혁은 오늘 자신의 비밀을 들려주고 보여주려고 마음 먹었는데 혜원은 민혁이 섹스를 원한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박. 혜. 원. 씨... 뭔가 오해하구 있나본데.. 난 오늘 너에게 고백할께 있어서 그런거라구.."

"그러니까.. 고백하고..... 네.. 가... 네가 승낙하면.. 할 꺼잖아..?"

"뭘..?"

"..... 섹... 스..."

혜원은 섹스라는 말이 이렇게 말하기가 어려운줄 처음알았다. 두눈을 찔금 감고 두주먹을 꼭쥐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이 두 글자를 입밖으로 내뱉었다.

"푸하하하.. 뭐.. 하하하.. 너.. 정말.. 하하하... 우... 이거 눈물까지 나네.."

민혁은 두눈에 눈물까지 맺혀가며 배를 움켜지고 웃어재꼈다. 그런 민혁의 모습에 더욱 놀란 건 혜원이였다. 자신은 어렵게 말했는데 민혁이 이렇게 박장대소까지 할 줄을 정말 꿈에도 몰랐다. 혜원은 화가 났다. 이 남자가 자신을 너무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차 문밖의 민혁을 제치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모텔 문밖으로 씩씩 거리며 걸어갔다. 그러다 휙 돌아서서 민혁을 노려보았다.

"나.. 갈꺼야.. 잘있어.."

혜원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몸을 돌려 모텔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한참을 웃다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린 민혁은 그녀를 잡기위해 한달음에 그녀 앞에 서서 그녀의 양쪽 어깨를 잡았다. 여전히 혜원는 화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미안 웃어서.."

민혁의 부드러운 미소 속에서 흘러나오는 믿음직한 목소리는 혜원의 화난 마음을 금세 풀어지게 했다. 하지만 혜원은 더욱 토라진 듯 그의 손에서 어깨를 빼려고 했다. 마음은 이미 녹아버렸다.

"내가 얘기 했잖아.. 고백할께 있다고.. 나에 대해서.."

민혁은 혜원의 두눈에 자신의 두 눈을 맞추고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아.. 내가 누구고.. 어떻게 살았고.. 뭘하고..... 이런거.. 사실 네가 알고있는 나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 뿐이잖아.."

"...."

혜원은 뭔가를 얘기할 듯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민혁의 말대로 혜원은 민혁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름, 사는집, 엄청 잘생긴 외모와 탄탄한 근육, 구릿빛 피부, 멋진 자동차와.... 없었다. 그의 과거, 현재, 미래 중 오직 혜원이 아는 건 현재의 일부분 뿐이었다. 그것도 아주 작은 단편적인 것 뿐이다.

"그래.. 오늘 내가 너에게 고백하려고 하는 건.... 나에 대해서야.. 그리고 그 얘길 하자면 아무도 없는 너와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던 거구.. 그래서 여기까지 온거야.. 미안해 미리 얘기하지 못해서.."

'잉.. 그럼.. 섹스하는 거 아녔어..? 헐.. 나만 바보 됐네..'

혜원의 마음속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또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혜원이였기에.... 그리고 벌써 언니한테 써먹을 거짓말까지 만들어 놨던 터였다.

'근데.. 도데체 뭘 고백하겠다구.. 이 난리지.. 그냥 말하면 될껄.. 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건.. 도무지 알 수가 없네..'

혜원은 민혁을 궁금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래.. 이제.. 알았니..?"

"응.."

혜원은 대답하자 마자 또 말을 이었다.

"근데.. 꼭 이런데서 그 고백이란 걸 해야해..?"

"그럴일이 있어.."

혜원은 뭔가 사정이 있겠다 싶어 더 묻지 않기로 마음먹고 그가 하는데로 따르기로 했다. 그를 따라 모텔로 들어간 혜원은 아주 잘 꾸며진 모텔 내부에 눈이 휘둥그래지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이게 모텔이야... 호텔이야... 우와.. 저 창밖의 바다 좀봐.. 히야.. 이렇게 큰 텔레비젼도 다있어..? 우와.."

혜원은 모든 게 신기한 듯 이것 저것 만져보고 고전풍의 일인용 쇼파에도 앉아보고 침대의 큐션이 어떤지 눌러보기도 하며 모텔 방 안을 삿삿히 돌아다녔다. 민혁은 그런 혜원의 모습을 미소띤 얼굴로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모습이 혜원의 진짜 모습이다. 꾸밈없고 맑고 쾌활한 어쩐지 푼수끼가 있어보이는 귀여운 모습.. 그런 혜원을 민혁은 사랑하고 있었다.

혜원은 아까부터 궁금한 것이 있었지만 도저히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가 참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오빠.. 나 궁금한게 있어요..?"

"응. 뭐가..?"

그녀는 손을 들어 침대 위 천정 부근에 매달려 있는 물체를 가르켰다. 또 같은 물체가 두개가 매달려있었고 푹신해 보이는 둥근 방석 같은 것이 있었다. 민혁이 혜원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

민혁도 그녀가 가르키는 곳에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글쎄.. 그냥 장식이겠지.."

한차례 모텔 방 탐험이 끝나자 혜원은 민혁이 말하려고 하는 고백이라는 것이 궁금해 졌다.

"이제.. 말해줘요.. 오빠에 대해서.."

혜원은 고전풍의 일인용 쇼파에 앉으며 말했다. 민혁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몸을 돌려 그녀와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응.. 그래.. 일단.. 내가 하는 행동.. 내가 하는 얘기... 모두 끝나기 전에 질문은 하지 말고 듣기만해.. 그냥 가만히 들어줘.. 알았지..?"

민혁은 그녀에게 다짐 받듯이 물었다. 혜원은 그녀 특유의 생글거리는 얼굴로 고개를 까딱이며 알겠다는 표현을 하였다.

민혁은 갑자기 입고 있던 셔츠를 벗더니 이내 바지와 팬티, 양말까지.. 금세 알몸이 되었다. 혜원은 오늘 수영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그의 탄탄한 근육과 바디라인에 익숙해 있었지만 그의 중심에 있는 자지는 처음 보는 것이여서 깜짝 놀랐다.

'뭐야.. 섹스 안한다더니.. 옷부터 벗고..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니까?"

이렇게 생각은 했지만 그의 우람한 자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뚤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혜원의 입에 침이 고였다.

꿀꺽..

고인 침을 삼키고 민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민혁은 조금 어두워 보였지만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은 그대로 였다.

그렇게 그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날도 여느때와 똑같은 아침이였다.

"야! 김대리 어디갔어.. 빨리 찾아와.."

아침부터 차혜숙부장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고래 고래 소리지르며 민혁을 찾고 있었다.

"야.. 황과장.. 김대리 어디갔어.. 출근을 했어..?"

"네.. 엘리베이터 같이 타고 올라왔습니다. 잠시 화장실에 갔나 봅니다."

황과장은 두손을 모으고 쩔쩔매며 차부장의 눈치를 살폈다.

"이것들이 일을 이따위로 해놓고 회사는 놀러다니는 거야.. 응..?"

이젠 책상까지 두둘겨 가며 목청을 더욱 높이는 차부장이었다.

'야야.. 김대리님이 또 사고 쳤나봐..?'

'그러게.. 그렇게 당하고도 이번에 무슨 사고래..?'

'아이고 오늘 김대리님 또 죽게 생겼네..'

'야.. 근데 오늘은 좀 심각한가 본데..'

차혜숙부장은 좌측 책상에 소곤거리는 여직원을 보고 식식거리며 서류철을 집어던졌다.

"야.. 뭐야.. 니네.. 빨리 가서 김대리... 이자식 찾아와.."

난데없는 서류철 폭탄을 맞은 두 여직원은 차부장의 말이 끝기도 전에 후다닥 자리를 박차고 사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김대리님을 어디서 찾냐..?"

"그러게.. 가끔 사라지는 걸 보면.. 무슨 명당자리 있나본데.."

"그런가봐.. 지난번에 이건물 전 화장실을 다뒤져도 못찾았었잖아.."

"에구... 그냥 시간이나 때우고 들어가자.. 어째튼 그냥 둬도 나타나잖아.. 한두번이야..?"

"그래 그래... 매점이나 가자.."

두 여직원은 수근대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지하로 향했다.

간간히 기계음이 섞이 소음이 울려퍼지고 퀴퀴한 냄새로 십분만 있어도 쿠토를 유발할 어두운 공간이다. 이런 칙칙한 공간의 한켠 뭔가 웅크리고 있는게 보인다. 사람이라면 이곳이 저자세로 있기란 매우 힘든 곳인데도 불구하고 웅크리고 있는 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음냐.. 음냐.. 쩝쩝.."

간헐적으로 들리는 소리는 저 사람이 잠을 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웅크린 자세로 한참을 그대로 있던 인영이 불현듯 벌떡 일어났다.

"아!! 내가 얼마나 잔거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11시 30분을 막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100여통이 와있었다. 주로 사무실 전화번호와 황과장의 핸드폰 번호였다.

"헉.. 이렇게 오래 잦나.. 큰일 났네.. 아.. 아니 또.. 왜이렇게 날 찾는 거야..?"

이렇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이 사내는 대성물산 김민혁대리였다. 지금 차혜숙부장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장본이이었다. 그걸 알리 없는 민혁은 그저 하품으로 벌어지는 입을 주체하지 못하고 쩍 벌렸다.

'아.. 이 회사는 나 없으면 안쨈募歐?'

민혁은 매사에 낙천적이고 긍적적인 사람이다. 또한 그는 게으르다.

민혁은 삐져나온 와이셔츠 자락을 대충 쑤셔넣고 보일러실을 나왔다. 그의 몸에 보일러실의 악취가 배어있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의 인상이 찌프려졌다. 보일러실에서 사무실로 올라가려면 비상계단을 통해 지하1층으로 올라가 거기서 엘리케이터을 타야한다. 지하1층으로 올라온 민혁은 자신을 쳐다보며 인상을 찌프리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아는 척을 했다.

"어머.. 김대리님.. 어디게셨어요..?"

매점을 막나오는 여직원 하나가 김대리를 발견하곤 뛰어왔다. 그의 옆에 선 그녀는 이내 다시 뒷걸음질치며 서너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어.. 해인씨.. 안녕.. 매점 갔다와.."

"아뇨.. 김대리님 찾고 있었어요.. 어딨었어요..?"

해인은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민혁이 불쌍해보였다. 그는 지금 사무실에서 벌이진 일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 했다.

"아앙.. 그냥.. 근데.. 누가 날찾아.?"

"부장님이요.. 근데 화가 많이 났어요."

"어 그래.. 괜찮아.. 내가 필요할 때 없으면.. 그분이 원래 그래.."

"...."

해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조용해야할 사무실이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여기저기 서류뭉치와 종이들이 날라 다니고 어디서 기차홧통을 삶아 먹었는지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고 우당탕 거리는 소리까지 들렸다. 사무실 내의 모든 직원들의 모두 자신의 책상 앞 컴퓨터 모니터만을 뚤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곳은 차혜숙부장 자리 쪽이였다. 그곳에는 멀쩡한 듯 하지만 구겨진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한마디로 구질구질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이 소음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넓은 뿔태안경를 낀 여자였다. 그녀는 말한마디를 할때마다 들고 있는 서류판을 남자의 머리를 때리고 다른 한손으로는 서류뭉치들을 집어던졌다.

"이 새끼.. 너 오늘 나한테 죽었어.."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육두문자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날카로운 칼로 베어내듯 아프게 들렸다. 아마도 사무실 내의 모든 직원들이 그녀의 육두문자에 그런 느낌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혜숙부장의 앞에 있는 이 사내는 연신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내뱉는 육두문자와 머리를 때리는 서류판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다.

"너.. 삼송전자에 가서 뭐라그런 거야.. 엉..?"

"...."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 우리랑 거래를 끊는데.. 말해봐.."

차혜숙부장이 화를 내는 이유가 삼송전자에서 앞으로 더이상 거래를 않겠다는 내용과 함께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공문이 온것 때문이었다.

"글쎄요.. 부장님.. 어제 제가 갔다왔을 때는 아무말도 없었거든요.."

"뭐.. 아무말도.. 이런.. 씨팔놈이.."

퍽..

결국 머리를 내려치던 서류판이 그의 뺨으로 날아들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어제 삼송전자로 물건을 납품하고 대금을 회수하러 갔던 민혁은 회수된 대금이 장부상의 금액보다 1억원이나 적었다. 그래서 삼송전자 현업 담당자에게 그 연유를 물으니 차부장과 다 얘기가 됐다며 그냥 가면된다는 답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래서는 안될 것같다는 생각에 삼송전자 구매부로가 물품 대금이 부족하다고 했고 삼송전자의 장부와 자신이 갖고 있는 장부를 비교해보니 1억원이 차이가 생긴 것이다. 이로 인해 구매부서장은 현업 담당자와 그 상관을 호출하여 차이가 생긴 연유를 묻고 얘기를 마치고 나온 구매부서장은 민혁에게 착오가 있었으니 그냥 돌아가면 되고 추후에 차이나는 금액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삼송전자를 나오는 민혁의 발걸음은 뭔가를 해냈다는 성취감에 한결 가벼웠다.

"내가 이새끼를 죽이든 내가 죽든.. 오늘은 사생결단을 내자.. 응..?"

이렇게 말하는 차부장은 민혁의 왼쪽 뺨마저 서류판으로 후려 갈겼다.

"따라와..."

차혜숙부장은 분이 안풀리는지 외투를 입고 민혁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사무실을 나갔다. 민혁도 서둘러 외투를 들고 차혜숙부장을 따라 나갔다.

차혜숙부장은 만면에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연신 앞에 앉은 남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녀의 옆으로 민혁이 무릅을 B고 있었고 앞에 앉은 사내는 한껏 거드름을 피며 차혜숙부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난 또.. 우리 부장님이.. 부하직원 시켜서 나 골탕먹이려고 하는 줄 알았지.."

"그럴리가요.. 과장님.. 과장님하고 저사이에.. 무슨 그런말씀을... 아무튼 제가 다 처리했으니.. 이번 일은 없었던 일로 해주십시오."

"응.. 그래.. 아.. 어제 구매부장이 불렀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라고... 그래 구매부장하고는 뭐.. 얘기 잘 됐어..?"

"네..네.. 부장님께.. 마루망 골프채 풀셋트를 선물로 드렸습니다. 아주 흡족해 하시던데요.."

"그래.. 그 양반.. 골프하면 껌뻑죽지 죽어.. 역시 차혜숙이야.. 그런데 말야.."

그는 무릅B고 있는 민혁을 슬쩍 쳐다보너니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사람.. 계속 쓸꺼야.. 저거 아주 꽉 막혔던데.."

"아.. 네.. 아닙니다. 이미 회사에 결재 올려놨습니다. 저 새.. 아니.. 저놈때문에 힘들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앞으론 이런이 없도록 신경 쓰겠습니다."

"응.. 그래.. 뭐.. 나야.. 괜찮은데.."

그는 이렇게 말하며 다시한번 민혁을 쳐다봤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