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 비가 내리면 여자는 섹스를 원한다 ② (89/92)

#89 비가 내리면 여자는 섹스를 원한다 ②

오후가 되면서 사무실에는 소장과 나 만 남게 되었다. 당연했 다. 평소에도 설계사들이 귀소 할 때까지는 여기에서 최언니만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언니가 없으니까 시간이 무척 더디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슬쩍슬쩍 소장의 눈치를 봤 다. 그때마다 소장과 시선이 마주 쳤다. 소장도 어색하기는 마찬 가지 인 것 같았다.

왜 오늘 따라 설계사 들 한테서 전화도 안 걸려 오지.

소장이 설계사들을 따라서 영업 지원 만 나간다 하드라도 숨통 이 트일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 따라 그 설계사 들 한테서 그 흔한 전화 한 통 걸려 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들도 어제의 여 독을 풀기 위해 삼삼오오로 짝을 지어 찜질방이나 사우나에 가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단말기 앞에 앉았다. 보험 영수증 사용 분을 전산 입력시키기 위해서 였다.

"미스 노. 커피 한 잔 할까?"

억지로 일을 하려니까, 괜히 짜증만 나고 가슴이 답답해서 화 장실을 핑계로밖에 나가서 거리 좀 쏘다니고 오려고 마음먹었을 때 였다. 소장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소장은 어느 사이에 접대용 소파에 앉아서 나를 보고 있었다.

"미스노에게 할 말 도 있으니까. 같이 마시지."

소장이 허리를 숙여 담배 재를 톡톡 털면서 말했다.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민망스러워서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커피 메 이커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런!

최언니가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혼자 아침 조회 준비를 하 다 그랬는지 모르지만 커피를 끓여 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아침에 커피나 차를 찾던 설계사들도 없었던 것 같 았다는 생각을 하며 전원 스위치를 꽂았다.

"하실 말씀 이 뭐예요......"

커피 메이커는 주방에 있었다. 주방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기 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음속으로는 소장에게 꿀릴 것 이 없다고 수도 없이 되내였지만 결국 목소리를 죽이고 말았다 고 생각하며 소장을 쳐다보았다.

"바쁘지 않으면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하지."

담배를 피우면서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던 소장이 잠깐 고개를 들어 대꾸를 하고 다시 고개를 내렸다. 결국 최언니에 대한 말 을 하려는 거 갰지 라고 생각하며 내 책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잠깐 나 같다 올께요."

손지갑 속에 넣고 다니던 담배와 라이터를 유니폼 스커트 속에 슬쩍 집어넣고 일어섰다. 소장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 려니까.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서 였다.

"담배 피우려면 문 잠그고 여기서 피우지."

내가 막 사무실 문을 열려고 할 때 였다. 소장이 웃는 얼굴로 은근히 말했다. 순간 나는 토요일날 그와 섹스를 하고 나서 담 배를 피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서로 비밀 을 간직 한 사이에 뭐 두려울 게 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으로는 담배를 피우면서 그가 할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을 것이 라는 생각 속에 소장이 있는 소파로 갔다.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랬다고, 내 의자에 앉아 피운다 거나, 주방에 들어가서 바쁘 게 피운다는 건 좀 어색해 질 것 같아서 였다.

"문은 잠그고 와야지."

소장이 다시 말했다. 그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되돌아가서 사 무실 문의 잠금 키를 딸칵 소리가 나도록 눌렀다. 소장의 말은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스노는 피곤하지 않아?"

"별로 피곤한 걸 모르겠어요."

소장의 시선이 허벅지에 와 있는 것 같아서 유니폼의 스커트를 아래로 내릴까 하다가, 무릎을 옆으로 눕히며 불을 붙였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소장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려니까, 그와 한 결 가까워 진 기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실 말씀이 뭐예요?"

마음이 약해져 가는 것 같아서 되도록 이면 그에게 굳은 표정 을 지어 보이겠다고 생각하고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

"방갈로에서 했던 말인데......"

소장이 잠시 말을 끊고 내 얼굴을 뚫어지듯 쳐다보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래서 여자는 남자 한테 한번 짓밟히게 되면 맥을 못쓰게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도 했다.

"그......그 날 있었던 일이라면 더 이상 언급을 안 했으면 좋겠 어요. 못 마시던 술을 많이 마셨던 탓에 저도 저....정신이 없었 으니까요."

그날 술을 마시긴 마셨다. 하지만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마 신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벤치가 있는 곳으로 가지만 않았어도 충분하게 소장의 완력을 뿌리칠 수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분수 대 근처에 앉아 있는 설계사들 때문에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강간을 당하다 싶이 당한 것에 불과했다. 물론 나중에는 소장의 입김이 싫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어쨌던 더 이상은 기억하고 싶 지 않다는 거 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 은 어쩔 수 없었다.

"아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자는 뜻이 아니고, 사과를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사과를 하실 피......필요도 없어요. 전 이미 그 날 있었던 일을 깨끗하게 잊어 버렸으니까요."

이상한 일이었다. 내 입으로 그 날 일을 잊었다고 말을 해 놓 고도, 소장의 우울해 하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이상하게 가슴이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더 이상 마음 약하게 굴지는 않 으리라 생각하며 커피 메이커가 있는 곳으로 갔다. 커피가 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까. 고맙군. 하지만 그날, 야외로 나갔다 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첫사랑이었던 여자의 얼굴이 미치도록 떠올랐던 것은 사실이야......."

커피를 따라서 그의 앞에 놓았을 때, 소장이 그 날 처럼 우울 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다시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소장의 얼굴을 일부러 쳐다보지 않고 커피를 마셨다. 커피맛을 알 수가 없었다. 소장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쓸수록 그 쪽으로 시선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을 하지 마시고, 최언니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실 예정이에요? 그리고 횡령한 금액이 얼마나 되는 거예요?"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 피차 기분이 좋을 리 없다는 생각을 떠나서, 괜스럽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끼며, 일부러 화재를 돌렸다.

"으......응! 그건 이......이 달 안으로 변제를 하겠다고 약속을 했어. 금액은 처.....천만원 정도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