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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비가 내리면 여자는 섹스를 원한다 ① (88/92)

#88 비가 내리면 여자는 섹스를 원한다 ①

원래 일요일의 스케줄은 아침 여섯 시에 기상해서 가까운 거리 를 구보하는 것으로 하루를 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와 고 여사가 묘한 신음 소리를 밤새도록 토해 놓았던 방에서 나올 때 까지 일어나지 않은 직원들이 많았다. 부지런한 직원들은 이미 구내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양치를 하고 있었으나, 간밤에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 설계사들은 여전히 한 밤중 이었다.

"어디서 잤니? 한참 찾았잖아."

숙소로 들어가자 최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녀는 이미 아침을 먹고 양치를 했는지 가볍게 화장을 하고 있는 중이 었다.

"아.......네......고여사님이 자꾸 술을 마시자고 하길래......"

"어디서 마셨는데 찾아 봐도 안 보였어?"

"우.......우리 방이 아니고 빈방에 들어가서 잤어요."

최언니는 걱정하고 있었다는 얼굴로 묻고 있었으나 내 목소리 는 떨려 나오고 있었다. 당연했다. 고여사와 그 누구에게도 말하 지 못할 짓을 하고 나왔으니 말이 떨려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그럼 어서 아침 먹어. 여덟시 반 지나면 아침 안준 대더 라."

최언니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장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맥이 쭉 빠지는 것 같아서 침대에 벌렁 누웠다. 문득 소 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제 저녁에는 그저 막연한 두려움이 소 용돌이치고 있었을 뿐, 오늘을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막상 맑은 햇살 아래서 그의 얼굴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수치 심 비슷한 감정이 일어나면서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것을 느꼈 다.

그래, 내 탓이 아냐. 난 당했을 뿐이잖아.

한편으로는 소장의 얼굴을 못 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만히 있는 그를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니고, 그가 나를 방 갈로로 유인해서 강제로 섹스를 했기 때문이다. 또 원인은 그가 제공하긴 했지만 결과는 나도 어느 정도 만족을 했기 때문에 소 장을 원망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문제는 최언니 였다. 최언니 가 소장의 말처럼 보험료를 횡령하고,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소장을 유혹했고. 그것을 빙자 삼아 협박을 하고 있다면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장을 하고 있는 최언니의 옆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생각 과 다르게 그녀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 가 보험료를 횡령하고 소장을 유혹했다 하더라도 그 말을 입에 담으면, 그녀가 나와 소장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까닭이 없을 것 같아서 였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와 닿으면서, 어제 저녁에 마신 술이 지금 취해 오는 것 같아서 눈을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신없이 하룻밤을 보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소장, 최언니, 고여사의 일 모두 우울한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중에서 소장과 고 여사 건은 내 의지만 살아 있었다면 얼마든지 슬기롭게 넘겨 버 릴 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 몸속에 음탕하고, 탕녀 적인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침 안 먹어?"

화장을 끝마친 최언니가 일어서며 물었다.

"생각이 없네요."

"어제 술 많이 마신 모양이구나. 그럼 시원한 음료수라도 한 개 줄까? 아이스박스 안에 들어 있는 음료수 아직 시원할 텐 데."

최언니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또 다른 괴리에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저처럼 착한 언니가 어떻게 보험료를 횡 령했겠냐 하는 점이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마시고 싶으면 제가 마실깨요."

침대에서 일어 나 앉으며 그녀에게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까, 잠을 제대로 못 잔 덕분인지 입안에서 쓴 냄새 가 풀풀 풍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래. 그럼 나 숙소 좀 한 바퀴 돌고 올 테니까. 우선 좀 쉬 어. 알았지."

"네."

최언니가 부드럽게 속삭여 주고 나간 후에 다시 침대에 벌렁 누웠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으려니까 담배가 피우고 싶어 졌다.

다시 일어나서 방문을 잠갔다. 그 다음에 창문을 약간 열어 놓 고 빈 음료수 캔을 들고 창문 앞에 앉았다.

담배를 피우면서 창문 밖으로 보고 있으려니 분수대 있는 쪽에 서 걸어오고 있는 고여사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가슴이 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우윳빛 살결이며, 유난히 음모가 많은 꽃잎. 그리고 내 꽃잎을 핥듯이 빨아 주던 감촉이 되 살아나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좋았던 한 때 라도 두 번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 갰다는 결심을 하면서 였다.

오전은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는 강의실에서 분임 토 의를 하는 것으로 대충 단합 대회는 막을 내렸다. 원래의 목적 자체가 교육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의로 차원에서 이루 어진 단합 대회 였기 때문에 스케줄대로 따른 것은 세 시간의 분임 토의가 전부 였다.

그 동안 소장과는 몇 번 얼굴을 마주 쳤다. 어느 때는 간단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으나 소장은 어제 있었던 일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것처럼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을 했다. 그런 소장이 왠 지 섭섭하게 와 닿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무거워진 마음을 가 볍게 해 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해서 그런 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월요일 날 최언니가 출근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지각을 하 는 줄 알았었다. 그러나 설계사들의 아침 조회가 끝나도록 출근 을 하지 않았다. 그녀 집에 전화를 걸려고 비상 연락망을 찾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 왔다. 이유는 몸살이 나서 하루 쉬겠다는 거 였다.

"알았어. 언니 소장님 한테 말씀 드릴게."

"왜, 미스 최 전화 야?"

내가 수화기를 내려놓은 순간 화장실에 다녀 오는 듯한 소장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네. 몸이 아파서 오늘 하루 쉬겠다는 전화 예요."

"개판이군......"

일요일 낮에만 해도 소장 얼굴 보기가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았 었다. 그러나 막상 사무실에서 보려니까 왠지 어제와 또 다르게 어색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수치스 럽기도 해서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했을 때, 소장이 낮게 내 뱉 으며 그의 자리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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