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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그녀는 레즈비언 ① (80/92)

#80 그녀는 레즈비언 ①

변기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박여사의 등을 두들겨 주고 있던 최언니가 그렇게 물었을 때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 렇게 착하고 헌신적인 최언니를 오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는 생 각이 번쩍 고개를 쳐들었기 때문이다.

"누.....누구여...오..호호호 미스 노 미안해, 나 오..오늘 많 이 취했어. 하지만 내가 한 잔 살게, 우리 이 차 갈래?"

박여사가 최언니의 부축으로 세면기 앞으로 가면서 횡설수설 할 때, 최언니가 눈짓으로 빨리 밖으로 나가라고 다그쳤다.

"제가. 도와 드릴께요."

최언니에 대한 미안한 감정 때문에 팔을 걷어붙이고 가까이 가 려 했으나, 그녀가 엄한 눈빛으로 빨리 밖으로 나가라고 입 모 양만으로 재촉을 했다.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소주를 맥 주컵으로 마셨던 탓인지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최언니 를 도와서 숙소를 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머!

영업소 소속의 설계사 숙소는 모두 다섯 개 였다. 그 중 오른 쪽으로 비어 있는 객실로 우리하고는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그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여자가 보였다. 얼핏 보아도 고여 사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관리실에서 알게 되면 괜히 골치 아 프게 생각 할 것 같아서 빠른 걸음으로 그곳으로 가려고 할 때 였다. 누군가 등을 툭 치는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허 여사 였다.

"미스 노? 박여사 어디 있는 줄 몰라?"

"화장실에 계신대. 왜 그러시죠?"

"이 여자가 술 마시다가 증발 해 버려서 찾는 중이잖아. 어느 쪽 화장실이야."

"그러지 말고 방으로 들어가세요. 제가 부축해 드릴 테니까."

화장실이야 왼쪽 과 오른쪽 끝에 두 개가 있지만 박여사와 나 이가 비슷한 허여사 역시 몹시 취해 있었다. 술냄새가 풍기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혼자 서 있기 힘 들 정도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아냐, 나 박여사 한태 꼭 할말이 있다구. 그 여자 찾아서 술 마셔야 돼."

막무가내로 박여사를 찾아가려는 허여사를 간신히 설득해서 방 에까지 데려다 주고 나왔을 때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였 다. 복도에는 여전히 많은 설계사들이 할 일 없이 오가고 있었 다. 최언니 말대로 새벽녘이 되서야 조용해 질 것 같았다. 특별 하게 실수 할 것 같지 않은 이상 무시해 버리기로 하고 고여사 가 들어간 객실로 갔다.

"고여사님"

노크를 할까 하다가 고여사가 이미 잠들어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냥 문을 돌려보았다. 다행이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어머머!"

놀랍게도 고 여사는 혼자 방 가운데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그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그녀의 활달한 성격으로 볼 때 빈방에 혼자 퍼질러 앉아 술을 마시고 있을 때는 그만한 사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였 다.

"자......잘 왔어. 어서 앉아."

고여사 앞에는 소주 두 병이 있었다. 술과 안주라면 분부 격인 내 방에 얼마든지 있으므로 술이 있는 것은 이상하게 보이지 않 았다. 그러나 나를 향해 싱긋 웃는 고여사의 표정이 너무 우울 해 보여서 괜스럽게 가슴 찡한 아픔으로 다가 왔다.

"왜, 여기 혼자 앉아서 술 드세요. 다른 분들하고 함께 어울리 지......."

"후후, 나 가끔 이렇게 혼자 앉아 술 마시고 싶을 때가 있어."

"하지만 여긴 우리가 임대한 객실이 아니잖아요. 관리인들이 알게 되면 좋은 소리 못 들을텐데......."

고여사에 대한 동정과 일은 별개라는 생각으로 그녀에게 밖으 로 나갈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고여사는 잠깐 만 머물다가 가 겠노라며 한사코 나에게 앉으라고 말했다.

"자, 우선 내 잔부터 한 잔 받어."

"전 조금만 마시겠어요. 단란주점에서 겁도 없이 마셨더니 아 직 뒤끝이 안 좋거든요."

"오늘 같은 날 미스노 술 마시고 실수했다고 해서 욕 할 사람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마음껏 마셔. 솔직히 여자들이 이런 날 취하도록 마시지 않으면 언제 취하도록 마시니?"

고여사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종이컵이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그 종이컵은 맥주용으로 거의 반 병 정도의 분량을 담을 수 있 는 컵이었다.

"고여사님 우울해 보여요. 무슨 일 있으세요."

고여사가 넘치도록 따라 준 술 을 절반쯤 마셨다.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다시 마시는 술인지 머리가 핑 도는 듯한 느낌을 감추 며 조용히 물었다.

"후후......내가 우울해 보인다. 난 우울해 할 이유가 없다는 거 미스노 도 잘 알고 있잖아......미스노 혹시 사랑해 본 적이 있 어.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있냐구?"

고여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눈꼬리를 치켜 뜨며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없어요........"

고여사의 말이 끝나자 마자 갑자기 소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성으로 만난 남자는 그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섹스까 지 했던 남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최언니의 얼굴로 이어졌다. 순 간 기분이 씁쓸해 지는 것을 느끼며 남은 술을 마저 마셔 버렸 다.

"호호호...있구나..하지만 사랑과 결혼은 별개로 생각해야 할 꺼야. 잘못하다가는 내 꼴이 되어 버린다구......"

고여사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내 술잔에 술을 따랐다. 나 는 더 이상 마시지 않을 작정이므로 그냥 따르게 내버려두면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척이나 쓸쓸하게 보인다는 느낌 속에 작년 연도말 송년회 때 본 그녀의 남편을 기억해 냈다. 텔 렌트 못지 않게 잘 생긴 얼굴로 설계사 들 간에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었다.

"왜요? 요즘 사장님하고 사이가 안 좋으세요......."

설계사들의 남편 직업이 애매 모호할 때는 통상적으로 사장이 란 호칭을 사용했다. 나도 자연스럽게 고여사의 남편한테 사장 이란 호칭을 사용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작자 요즘 바람 난 거 있지? 후후후."

"뭐라구요. 그럼 사장님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단 말이에요?"

"한참 됐어. 일월 달부터니까........."

"저런.......안됐군요."

할말이 없었다. 바람 난 남편 때문에 이 즐거워야 할 단합 대 회 때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고여사한테 한없는 연민의 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 반대로 그녀의 남편을 증오하고 싶어졌다.

"안된 건 없어. 오히려 잘 된 일이니까?"

고여사는 더운 듯이 회사 로고가 찍혀 있는 츄리닝 상의를 벗 어서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 놀랍게도 그녀는 츄리닝 안에 브 래지어 한가지 만 달랑 걸치고 있었다. 내 놀란 눈빛을 의식했 는지, 단란주점에 가기 전에 더울까 봐 미리 벗고 갔다고 말한 고여사는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잘 되다니.....그럼 고여사님도 사장님을 사랑하지 않으세요?"

고여사가 담배 피우는 모습은 능숙했다. 한 눈에 보더라도 오 랫동안 담배를 피워 왔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내가 공공 장 소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듯이 그녀도 회식 때나, 여느 모임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내게 묘 한 동질감을 던져 주고 있었다.

"아냐. 나도 한 때는 그 작자를 사랑했었지. 아니 이 세상이 그 작자 때문에 존재하는 줄만 알았지. 하지만 그 작자가 배신을 하고 나서 보니 이 세상은 너무 넓다는 걸 알았지 뭐야. 그 작 자보다 섬세하고 편한 남자들도 부지기수로 많다고. 그러니 오 히려 잘 된 일이지 뭐야."

그렇게 말하는 고여사의 젖가슴은 너무 아름다웠다. 목으로부 터 둥그스름하게 이어지는 어깨선은 작고 아름다웠으며 풀풀 웃 으며 담배를 피우기 위해 팔을 치켜 들 때는 겨드랑이 사이로 얼핏 보이는 털이 길고 까만색이었다.

빨강색의 브래지어에 가려 있는 젖가슴은 작은 어깨에 비해 부 담스러워 보일 정도로 크고 탄력이 있었다. 그 밑에는 헐렁한 츄리닝 바지를 입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하체 보다 상체가 작다 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런 고여사가 자신의 벗은 몸을 훔쳐 보고 있는 나를 향해 시선을 치켜드는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한 나머지 엉겁결에 술잔을 들고 몇 모금 마셔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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