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소장님과 김언니
선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참동안 쳐다 보다가 말 없이 창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심을 빠져 나온 고속버스는 본격적으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내가 말을 잘못 한 건가, 그 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선미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계 속 망설이고 있는 눈치였다. 차 안에 있는 얼마되지 않은 승객 들은 차가 속력을 내기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하나, 둘 눈을 감 고 잠을자기 시작했다.
"그래, 난 철부진 줄 모르지. 그리고 진우씨가 생각하고 있는 것 처럼, 내가 결정적으로 직장을 그만 둔 것은 자유기고가가 되기 위해서 사표를 낸 것은 아냐......."
선미는 말을 끊고 정면을 쳐다 보았다. 목이 마르는 듯 캔 맥 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그 캔을 두 손으로 잡고 빙빙 돌렸 다. 그런 모습이 무척이나 지루하고 답답하게 보였다. 무언가 금 방이라도 속이 텅 비도록 털어 놓고 싶어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 처럼 보여서 였다.
"말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누구나 혼자 간직하고 싶어 하는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 가는 법이니까."
터미널에서 깡술로 마신 소주 한 병이 기어이 참을 수 없는 갈 증을 밀어 내고 있었다. 담배를 딱 한 가치만 피웠으면 좋겠는 데 버스 안에서는 금연 이었다. 꿩대신 닭이라고 그때 까지 뚜 껑을 따지 않고 있던 캔맥주를 따고 절반쯤 쿨쿨 마셔 버렸다.
그리고 나서 선미에게 조용히 말해주었다.
"아냐, 사촌 오빠의 일도 말을 해 주었는데, 직장에서 있었던 일을 비밀로 분류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겠지......."
선미는 마침내 결심을 한 듯한 표정을 짓고 나서 캔 맥주 몇모 금을 마셨다. 나는 그런 선미에게 그 어떤 말인가 대꾸를 해 주 려다 그냥 들어 보기로 하고 침을 삼켰다.
"지혜 한태는 내가 다니고 있던 보험회사 영업소의 실정에 대 해서 몇번 이야기 해 준적이 있어. 그렇기 때문에 지혜라면 내 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가 쉽게 이해될꺼야. 그치만 진우씨 는 잘 모를테니까. 처음부터 말을 해야겠지."
선미는 답답한 듯 잠바의 지퍼를 약간 열었다. 그 다음에 팔 소매를 적당히 걷어 부쳐 올렸다. 그리고 나서 의자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대어 마치 독백을 하는 듯한 음성으로 그녀가 사표 를 내지 않았으면 안될 이야기를 털어 놓기 시작했다.
홍은동에 있는 영업소에 근무하는 직원은 소장을 포함해서 세 명이었다. 물론 삼십 여명에 달하는 보험 설계사들은 제외하고 순수하게 회사에 소속된 정식 직원들을 말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아침 조회가 끝나고, 저녁 에 설계사 들이 귀소하 기 까지는 이십 여평의 사무실에 나이가 두 살 많은 김언니와, 사십 대 의 소장만 있을때가 많았다.
지난해 가을 이었다. 월말 마감을 이틀 전에 끝낸 시기여서 사 무실 안에는 권태와, 무기력함이 눅눅하게 내려 앉아 있었다. 소 장은 다음주에 일박 이일로 가을 야유회겸 단합대회 갈 장소를 정해 놓으라는 지시를 내려 놓고 아래층에 있는 커피숍에 내려 갔다.
소장은 개인적인 이유로 사람을 만날때는 영업소 내에 있는 회 의실을 이용하지 않고 주로 커피숍을 이용하기 때문에 별 다른 일이 아니었다. 나와 김언니도 그런 소장의 습성을 잘 알고 있 기 때문에 갑자기 본사에서 전화가 걸려 오거나, 설계사들이 급 한 용무로 찾을 때는 곧 잘 커피숍으로 내려가 소장에게 그 용 건들을 전해 주곤 했다.
"나 은행에 가서 통장 정리 좀 하고 올게."
이번에 새로 입사한 설계사에게 보험료 산출 방법에 대해서 지 도를 해 주고 있을 때 였다. 김언니가 거래 통장 뭉치를 손가방 에 집어 넣으며 말했다.
"언니, 들어 올 때 아이스크림 좀 사다 주실래요?"
내 앞에서 보험료 산출 방법을 배우던 김여사가 핸드백을 열면 서 말했다. 아마 내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다는 의미로 아이스크 림을 사려는 모양 같았다. 그러나 김언니는 자기 돈으로 사 주 겠다며 웃음으로 대답하고 그냥 나갔다.
사무실에는 삼십대 초반의 김여사와 나 하고 둘 만 남게 되었 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아니 흔히 있는일 이라고 보기 보다는 보통 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보험 영업소의 특성상 내근보 다는 외근이 많은 관계로 혼자 덩그러니 사무실을 지키고 있을 때도 많았기 때문이다.
김언니가 나간지 삼십 분 쯤 됐을까. 상품 설명과 함께 보험료 산출 예를 들어 설명을 해 주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 왔다. 앞 에 앉아 있는 김여사를 찾는 전화 였다.
"어쩌죠, 내가 보험 회사에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한 건 들어 주겠다는 친구의 전환데......"
"어머, 그럼 얼른 나가 보셔야죠. 요율 걱정은 하지 마시고 청 약서나 잘 작성하세요. 잘 모르는 것은 저 한테 전화 하시면 되 잖아요."
김여사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무실을 나가자 마자 또 전화가 걸려 왔다. 팀장인 박여사의 전화로 한 시간 후에 귀소 할테니 지금은 팔리지않는 상품의 팜프랫과, 판촉물을 준비해 달라는 전화 였다.
박여사가 들어오려면 시간은 많았으나 별로 할 일이 없기 때문 에 미리 팜프랫과 판촉물을 준비해 두려고 서고로 갔다. 서고는 회의실 옆에 있었다. 서고로 들어가면서 사무실이 비어 있는 것 을 염두에 두고 전화벨 소리가 들려오면 뛰어 나오기 의해 일부 러 문을 삐죽이 열어 두었다.
"어디 있지?"
박여사가 주문한 팜프랫은 쉽게 눈에 뛰지 않았다. 한때는 주 력상품으로 밀고 나가던 상품이었으나 지금은 거의 팔리지 않는 상품이기 때문에 어느 구석에 쳐 박혀 있으리라는 생각에 진땀 을 흘리며 팜프랫을 찾았다.
"하하하, 어젠 미안해. 막 퇴근해서 그곳으로 가려는데 갑자기 손님이 찾아와서 말야."
"몰라요. 앞으로는 소장님 하고 약속 안 할꺼예요."
겨우 구석에 쳐 박혀 있던 팜프랫 뭉치에서 몇 장 꺼내가지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언제 왔는지 소장과 김언니가 은근한 말을 주고 받는 소리가 이상해서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