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갈등의 조짐
이튿날 우리는 바다로 가기로 하고 집을 나왔다. 왜 바다로 가 야 하는지는 선미만 알고 있었다. 나와 지혜는 단순히 그녀가 바다에 가겠다고 했으므로 바다로 가야 하는 목적이 생겼다는 것 외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바다로 가기 위해 강남 고속 버스 터미널에 도착 했을 때는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먼저 바다 냄새를 물씬 풍 기는 화제를 꺼낸 쪽은 지혜 였다. 그녀는 질리도록 파도를 보 고 싶다고 했다. 그러다 그녀가 어쩌면 파도의 품안에 안기게 될지도 모르겠다며 섬뜩한 말을 꺼냈을 때 선미는 하마터면 들 고 있던 커피를 떨어트릴 뻔할 정도로 놀랐다.
"후후후, 설마 너희들을 두고 바다로 뛰어 들어가기야 하겠 니?"
지혜는 얼른 정정을 하며 웃음으로 얼버부렸지만 나는 그렇지 가 않았다. 그러니까, 선미가 오기 전 날 밤 그녀가 했던 말이 갑자기 파도처럼 밀려 왔기 때문이다. 나하고, 선미 둘 중에 누 가 좋았어. 라고 말을 꺼내 놓고서 이내 무관심 한 척 했지만 어쩌면 그녀는 뚜렷한 해답을 듣고 싶었는지도 몰랐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기 시작하면서 내내 우울했다.
"진우씨, 왜 갑자기 표정이 그래?"
선미가 리더스다이제스트를 사서 똘똘 말아지고 걱정스럽게 물 었을 때, 나는 그녀의 서늘한 눈매를 바라보면서 맥없이 웃었다.
웃음 끝에 갑자기 뜻하지 않게 바다 구경을 하게 됐으니 내가 이상하게 됐나 부다 라고 지혜처럼 말꼬리를 얼버무렸다.
우리는 동해로 출발하는 버스가 한 시간 후에나 있을 거라는 시간표를 보고 나서부터 갑자기 무료해 지기 시작했다.
대합실 안에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지난 주말에 방영했음직한 오락 프로를 재방영 해 보내고 있었고, 우리는 파랗고, 노랑 색 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멍청히 화면을 쳐다봤다. 가끔은 의미 없는 웃음을 날리기도 하고, 때로는 무료하게 하품을 해 대기도 하면서 시계를 봤으나, 시계는 여전히 열심히 제자리걸음을 하 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지난 사흘 전에 지혜를 만나기 위해 집에서 입고 나온 옷 차림 그대로 였다. 청바지에 랜드로바를 신었고, 베이지색 파카 를 입은 모습으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왼쪽에는 선미가 다 마신 일회용 커피 잔을 휴지 뭉치처럼 구겨 쥐고서 리더스다이 제스트를 펼쳐 보고 있었다. 지혜는 소리나지 않게 껌을 씹으며 가끔 텔레비전 화면을 보며 대합실을 바쁘게 오가는 승객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후후후, 이것 좀 봐!"
선미가 혼자 소리내어 웃다가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내 밀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그녀가 손가락으로 집어 주는 부분을 읽어보 았다.
.래브의 침실 법칙= 배우자 중에서 코를 먼저 고는 쪽이 꼭 먼 저 잠이 든다.
.도로시의 딜레마= 물건이 무거울수록 그리고 가져가야 할 거 리가 멀수록 코는 그만큼 가려운 법이다.
.로젠바움의 원칙= 집안에서 없어진 물건을 가장 손쉽게 찾는 방법은 그 물건을 새로 사는 것.
.바코드가 잘 작동되지 않을 경우= 사면서 좀 창피하다는 생각 이 드는 물건일수록 바코드가 작동되지 않는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집어 주는 내용은 머피의 법칙에서 인용한 것을 일상에서 찾아낸 것들이었다. 그런 대로 재미있다는 생각 에 선미를 향하여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그 때 였다. 오른쪽 에 있던 지혜가 어디 나도 좀 보자, 라며 책을 빼앗아 갔다.
"썰렁하긴 하지만 웃기지 않니?"
선미가 내내 쥐고 있는 종이 컵을 쓰레기통에까지 가서 버리고 오며 지혜에게 물었다.
"응, 썰렁할 정도로 재미있군."
지혜는 평소처럼 호들갑을 떨거나, 덧붙여서 자기가 경험했던 그 비슷한 화재 꺼리를 털어놓지 않았다. 그냥 재미없는 내용을 괜히 봤다는 표정으로 책을 돌려주고 나자 마자 텔레비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너도 좀 이상한 것 같아......"
선미가 그런 지혜를 그냥 둘 리가 없었다. 그녀는 내 옆에 앉 아 있다가 지혜 옆으로 자리를 옮기며 귓속말로 뭐 안 좋은 일 이 있냐고 재차 물었다.
"없어. 그냥 따분해......"
"뭐! 너 지금 따분하다고 그랬니, 우리가 지금 바다로 가고 있 는 중이면서 넌 지금 따분하고 재미없다고 그랬니?"
선미가 그녀답지 않게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며 나한테도 들릴 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지혜 말대로 썰렁한 유머를 읽고 나서 다시 졸고 있던 중이었다. 선미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 지 는 것을 보고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미는 지혜의 말이 몹시 서운한 모양이었다.
"어머머! 너야말로 이상하다. 왜 갑자기 신경을 돗그고 그러니.
난 그냥 내 뱉은 말인데?"
"뭐라고? 그냥 내 뱉은 말이라고...... 애가 점점 사람 돌게 만드 네?"
"너 지금 뭐라고 했니. 내 말이 널 돌게 만들었다고 했니?"
이런 경우 정말 복잡해지는 쪽은 당사자들인 여자 보다, 지켜 보는 남자 쪽이다. 나는 졸음이 하얗게 가시는 것을 느끼며 벌 떡 일어섰다. 그리고 선미를 일으켜 반대편에 앉히고 그 중앙에 끼어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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