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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완전한 사랑, 그리고 임신 (43/92)

#43 완전한 사랑, 그리고 임신

오빠의 얼굴은 마치 이제 겨우 그 날 있었던 일이 잊혀져 가고 있는 중인데, 이번에는 네가 먼저 날 원하고 있는 거니, 라고 묻 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으응. 요 근처 나왔다가, 시계를 보니까 오빠가 돌아 올 시간 같아서 좀 기다렸어. 다른 뜻은 없구......"

나는 당황한 얼굴로 서둘러서 변명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오 히려 어색하게 보였는지 오빠는 길게 한숨을 내 쉬면서 내 손을 잡았다.

"사실 나도 네가 보고 싶어서, 매일 전화기 앞에서 망설이곤 했어......"

오빠의 손은 따스했다. 그러나 오빠의 목소리는 그렇게 절망스 럽게 들려 올 수 가 없었다. 나는 오빠 앞에서 절대로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무너트리고 흑 하고 흐느낄 수밖에 없 었다.

"미안해, 오빠. 이상하게 눈물이 나네......"

나는 눈물을 훔치며 시선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오빠는 대 답이 없었다. 묵묵히 내 손을 끌고 아파트 단지에 있는 놀이터 로 갔다.

"자, 이제 말해 줄 수 있지. 너도 나처럼 밤마다 오빠 꿈을 꿨 다고....."

그네에 걸터앉은 오빠가 어른처럼 말을 했을 때 나는 대답을 할 수 가 없었다. 이유야 어떻든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어떻게 죽을 수 있느냐 하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나도 그랬어......"

나는 속울음을 삼키면서 고층 아파트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저, 아파트 꼭대기에서 떨어진다면 산산조각이 나겠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자꾸 눈물이 나오려고 했지만 억지로 참으려 발로 그네 를 흔들었다.

"말 안해도 다 알어. 하지만 네가 솔직하게 말해 주니까. 기분 이 좋은 건 사실이야. 그리고 말야. 그 동안 많이 생각해 봤는 데....."

오빠는 말꼬리를 흐리며 그네를 흔들었다. 한 참 동안 그네에 앉아 시계추처럼 흔들거리다가 별 하나 없는 하늘을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끝가지 들어 줘. 우린 사 촌이야. 그리고 오누이와 같구. 그런 우리가 억지로 안 만나려고 하는 건. 오히려 부작용이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서로 위해 주다 보면 그 날 있 었던 일은 자연스럽게 잊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도 오빠가 그 날 있었던 일을 잊기 위해 쉴 틈 없이 학원으 로 독서실로 다니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고통스러워......."

"그래, 내 말이 바로 그거야. 그러니까 우리 내일부터는 옛날처 럼 자주 만나자. 나도 학교 같다 오는 길에 자주 놀러 갈 테니 까. 그렇게 되면 우리 엄마가 장손 철 들었다고 좋아하는 모습 을 못 보게 되서 서운하긴 하지만, 그 방법이 현명한 방법일 것 같아. 선미 네 생각은 어떠니?"

"오빠 말이 맞어. 그러니까 내일부터 우리 집에 와야 해, 꼭....."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직 구체적으로 자살을 할 날짜는 정해 놓지 않았지만, 내가 죽은 후에, 내가 집에 있는 줄 알고 찾아 왔다가 놀라는 오빠의 모습 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너 무슨 일 있었지?"

오빠는 내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그네를 세웠다. 그리고 내가 타고 있는 그네를 끌어 당겼다. 오빠는 그네들 내 앞으로 돌려 서 단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내 눈을 응시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아냐.....오.....오랜만에 오빠......얼굴을 보니까 눈물이 나네....주책 없이 말야...."

"아냐. 너 분명히 무슨 일이 있어. 혹시 작은 엄마가 그 일을 눈치 챈 거냐?"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오빠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나는 눈물 때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작은 아빠?"

"아냐. 내가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겠어. 그.....그런 일은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오빠는 나 없을 때도 공부 열심히 해야 해. 알았지?"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절망에 휩싸여서 오열하면서, 나도 모르 게 내 죽음을 암시했다. 내 말이 끝나자 마자 오빠가 벌떡 일어 서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럼, 혹시 임신......."

오빠는 거의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내 팔을 잡고 있는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정도 였다.

"아냐, 난 그....그런 거 몰라......,"

"그럼 왜 죽으려고 해, 너 분명히 말해, 이.....임신한 거지."

오빠는 모든 상황을 짐작하겠다는 얼굴로 그네에 털썩 주저 않 았다. 오빠가 털썩 주저 않는 통에 정지해 있던 그네가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네의 끈을 붙잡고 소리 없이 흐느끼 기 시작했다. 오빠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묵묵히 그네를 흔들었 다. 어쩌면 오빠는 그 순간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오빠, 나 어쩌면 좋아......."

나는 결국 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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