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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내게 거짓말을 해봐 ⑤ (29/92)

#29 내게 거짓말을 해봐 ⑤

지혜는 말을 하려다 목이 메이는지 말을 끊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 속에 선미를 쳐다보았다. 선미가 얼른 일어 서서 지혜 옆으로 갔다.

"그래, 지혜 네 말 충분히 알아들었어. 예전에도 그랬지만, 앞 으로도 절대 너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께."

선미가 지혜의 어깨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속삭이는 음성으로 말했다.

"난 죽어 버릴지도 몰라, 내 이런 심정 이해하겠지?"

지혜가 그녀답지 않게 눈망울에 눈물을 가득 담고 선미를 올려 다 보았다.

"그래 날 믿으면 돼. 널 실망시켜 주지 않을게."

나는 지혜의 약한 모습을 처음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남자와 해어질 수 가 없어, 그런 결정을 내렸을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 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진우씨 나 술 한 잔 더 딸아 줄래?"

지혜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시선을 돌렸다. 싱크대 쪽을 잠깐 쳐다보며 눈말울에 맺혀 있는 눈물을 떨어낸 다음에 내 앞 으로 술잔을 내 밀었다.

"난 지금도 널 사랑해. 아니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 꺼야."

나는 지혜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그녀가 술잔을 잡은 손을 마 주 잡고 눈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 속에는 절망과 슬픔이 엉 켜 있는 것 처럼 보였다. 다시 가슴이 짜르르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잘못된 운명에 침을 뱉았다.

그녀로서는 한 남자를 친구와 공유하느냐, 아니면 친구와 결별 을 선언하고 독차지를 해야 하느냐, 그것도 저것도 아니면 오랫 동안 우정을 주고받던 친구 도, 속살을 섞으며 사랑을 주고받던 애인과 도 단절을 해야 하느냐 하는 세갈래 기로에서 고민을 했 을 것이다.

어쩌면 굳이 그녀가 귀를 얼리는 겨울 바람을 뚫고 로터리에 있는 하나로 슈퍼까지 다녀오겠다고 하는 이유도 생각할 여유를 갖기 위해서 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한번 지혜 의 숨은 성격을 보는 것 같아 우울해 졌다.

"짜식아, 사내새끼가 약속을 했으면 활짝 웃어야지 왜 똥 마려 운 강아지 꼴로 앉아 있냐."

지혜가 술잔을 치켜들고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래, 건배하자 우리의 사랑을 위하여."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술병을 치켜들었다.

"그래, 나는 진우씨와 지혜를 사랑하고."

지혜가 술잔을 부딪쳐 왔다.

"나는 선미와, 지혜를 사랑하고."

나는 지혜의 술잔에 부딪친 잔을 선미 앞으로 내 밀었다.

"선미는 지혜와 진우씨를 사랑하고."

선미가 지혜 앞자리에 앉으며 경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세 명 중 선미만 손해 본 것 없는 여 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지혜는 앞으로 찢어져 야 할 지도 모르는 운명에 처 해 있지만 선미는 우리의 틈 사이 를 비집고 들어온 철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일분도 못 가서 깨지고 말았다.

"거듭 말하지만 우린 아무런 잘못이 없어. 밤거리에서 술 취한 행인을 골목길로 유인해서 뻑치기 한 적도 없고, 부녀자 혼자 있는 집에 들어가 강간을 한 적도 없어. 그렇기 때문에 서로를 죄스러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무엇 보다 네 마음은 지혜 너를 친구처럼 생각하는 마음이나, 진우씨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함이 없다는 거야?"

나는 선미가 노골적으로 나를 사랑한다는 말에 멍해진 얼굴로 지혜를 쳐다보았다.

"그럼, 너 계획적으로?"

지혜가 술을 마시다 말고, 기가 막히다 는 얼굴로 선미를 쳐다 보았다.

"그건 아냐. 난 어제 저녁 잠 잘 때까지만 해도, 진우씨를 지혜 네 남자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하지만 상황은 변 했잖어. 단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섹스를 하지 않았다는 거야. 무슨 뜻인가 알겠어?'

선미는 심각한 표정으로 묻고 나서 남은 술을 마저 마셔 버렸 다.

"대충."

지혜가 그때서야 자기가 오해를 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 며 나를 쳐다보았다.

"난 사촌 오빠가 죽은 이후에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는 섹스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어. 내 말이 아이러니 하게 들 릴지 모르지만, 난 지혜 널 친구 이상으로 사랑했고, 진우씨한테 는 너를 좋아하는 만큼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어. 그렇기 때문에 어제 일이 가능했던 거구. 지금은 순수한 감정으로 진우씨를 사 랑하겠다는 거야."

"그럼 사촌 오빠가?"

지혜가 놀란 눈으로 선미를 쳐다보며 반문했다. 선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미완으로 끝난 사촌 오빠와의 불장난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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