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이방인의 섹스 (12/92)

#12 이방인의 섹스

선미는 창 밑에 앉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창유리를 파고드는 햇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방안에 마름 모꼴로 펼쳐지는 햇볕 기둥 한 가운데 지혜가 앉아 있었다.

지혜는 무릎을 세우고, 그 세운 무릎에 턱을 괸 체 담배를 피 우며 선미의 말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가끔 나를 쳐다보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없이 투명해 보이는 입술 사이로, 오 늘 아침부터 피우기 시작하는 하얀 담배 연기를 길게 내 뿜는 선미, 그녀에게 그런 기억이 숨어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물론, 난 그때 사랑이 뭔지 몰랐어. 그렇다고 남자 친구가 있 었던 게 아냐. 만약 남자 친구가 있었다면, 아니 남자 친구는 고 사하고 남동생이나, 아빠 만 있었어도 그처럼 철부지 같은 행동 은 하지 않았을 꺼야."

나는 조금씩 선미의 말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알고 있는 그녀는 어떠한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중학교의 국어 선생이 란 직업이 두 모녀가 살기에는 넉넉했던지 지금까지 재혼을 하 지 않고 있는 상태 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춘기에 접어든 선미 가 남자의 성(性) 에 대한 끝없는 동경 내지, 호기심을 가졌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미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이고 표정도 없었다. 그래서 차 라리 햇볕 기둥 밑에 숨어 있는 집을 잃은 영혼의 모습처럼 보 이기도 하는 그녀는 자신의 체험에 토해 내면서, 이방인처럼 앉 아 있었다.

"여름이었어, 무진장 더운 날이었지. 그 날 나는 오전 수업만 하고 집으로 갔어.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에도 생리가 끝난 후 에는 두통에 시달리곤 했지, 그 날도 생리가 끝난 다음 날 이었 을 꺼야. 날씨만 덥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는데 그 날 따라 날씨 탓인지 도저히 참을 수 가 없었어......."

선미는 잠시 말을 끊고 빈 캔 맥주 통에 담뱃재를 털었다. 담 뱃재를 터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아름다워 보였다. 메니큐어 를 칠하지 않는 손톱도 무척 정갈해 보였다. 지금도 손이 그처 럼 아름다운데 중학교 이 학년 때는 더 예뻣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녀는 햇볕 안에 숨어 있 는 요정 처럼 쪼그려 앉아 있는 지혜를 쳐다 보지 않고 줄곧 나 를 보고 있었다. 그게 나를 부담 스럽게 만들었다. 굳이 내가 그 녀의 첫 경험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 그녀의 첫 경험에 대한 카운셀러가 될 수도 없었다.

"그래........"

선미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일단 서두를 꺼냈다가 입을 다 물었다. 한참만에 지혜를 쳐다보고 나서 싱겁게 웃었다. 지혜가 이해 할 수 있다는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간지에 흔히 나오는 정사 있지, 사촌 누나하고 섹스를 했다.

어떻하면 좋으냐, 형부와 섹스를 했는데 괴로워 죽겠다. 영어 선 생님 하숙집에서 잠을 잤다. 난 선생님을 사랑하는데 선생님은 내가 싫은 것 같다. 정말로 죽고 싶다. 는 따위의 약간은 저속하 고 때 에 따라서는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가십 기사 말야. 그 시 기에 나는 몰래몰래 그런 기사에 탐독하곤 했었어. 그러나 그때 마다 흥미 이상의 관심을 가지진 않았어. 왠 줄 알어, 모두 꾸며 댄 이야기란 생각 때문이야. 하지만 내가 그 주간지의 주인공이 될 줄 꿈이나 꾸었겠니."

선미는 말을 끊고 지혜에게 '약간 춥구나' 라고 중얼거렸다. 지 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보일러의 온도를 난방으로 높였 다.

"술은 없겠지?"

선미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지혜에게 물었다.

"아냐, 냉장고에 캔 맥주 몇 개 가 있을 꺼야. 저번에 진우 네 가 사 온 맥주야. 그러고 보니 넌 이 방에 올 때마다 항상 캔 맥주만 사 오는 구나, 썸싱 스페셜이라든지, 베리나인, 임페리얼 같은 국산 양주도 사 온 적은 없었어."

지혜는 마른 웃음을 지으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에 서 쏟아져 나오는 노랑 불빛에 야채나, 과일 따위가 어 추워! 하 며 누워 있는 게 보였다.

"백수 처지에 캔 맥주도 과분해, 그 맥주를 사 올 때 마다, 이 삼일 동안은 깡통차고 있는거 너도 잘 알고 있잖어."

나는 지혜가 건네주는 캔 맥주를 받았다. 손바닥으로 전해 온 느 찬 냉기를 느끼는 순간, 엊저녁에 소주와 짬봉해서 먹었던 맥주가 생각나며 건 구역질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한 모금 마 셔야겠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결근까지 하고, 중학교 이 학년의 첫 경험을 들려 주고 있는 선미를 배려하기 위해서 였다.

"미안하다, 계속해 봐."

지혜가 선미에게 언어의 배턴을 넘기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집에 오는 길에 같은 동네에 사는 사촌 오빠를 만났어. 중학 교 삼 학년이었는데 개교 기념일 이라 학교를 가지 않았다는 거 야.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까 친구 만나러 간다는 거 였어. 그리 고 오빠와 헤어 졌지.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내 방에 가서 누 웠어. 두통이 심해서 브레지어를 벗어버리고, 헐렁한 티셔츠에 핫팬티 만 입었더니 한 결 두통이 덜 한 것 같은 기분 속에 잠 이 들었어......."

선미는 캔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담배꽁초를 껐다. 입이 쓴지 혀로 아래 윗 입술을 핥았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섹시하 게 보였으나 그녀의 다음 말이 궁굼해서 섹시한 것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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