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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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이 효정 앞에서 쓸쓸한 표정으로 혼잣말 비슷하게 했다.

 "잘 있겠지?"

누군지 잘 안다. 원장 쓸쓸하지 않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잘 있겠죠"

원장이 반색하며 되묻는다.

 "겨울 돌아오는데 옷이라도 보내야 되지 않겠어?"

 "입을만한 옷이 있을까요"

 "최 선생이 한 번 찾아 봐?"

“네 그러겠습니다”

"이전해 간 주소 아니까 그리로 부치면 될 거야. 그렇지?"

 "그렇겠죠."

 "그래..."

 "보고 싶으세요?"

 "자기는?"

 "아들처럼 키운 원장님만 하겠어요?"

 "아직도야?"

 "뭐가요?"

 "난 아무래도 최 선생이 그 애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느끼는데..."

 "...."

 "정말 아무관계 아냐?"

 "원장님이 어떤 생각이신지 모르지만 그 애에게 정을 많이 주기는 했죠"

원장은 더 이상 캐묻지 않는다. 

 "오늘 별일 없는데 지금 하지..."

 "네"

 "가을이나 겨울에 입을 수 있는 옷으로... "

 "네“

효정은 수효가 지내던 방에 일부러 가지 않았었다. 

특히 수효와의 관계가 남녀 사이가 되면서 그 방엘 들락거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수효가 떠난 뒤로는 더 그랬다. 

주인 없는 방에 들락거리면 보는 사람이 엉뚱한 상상을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의 방에 갈 핑게거리가 생겼다. 

원장과 헤어진 효정은 당당하게 수효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쓰지 않고 쳐박아둔 지 오래되어 방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책박스, 씨디파일, 의자며 침대 위며 옷가지가 그냥 널려있었다. 

급히 떠난 흔적이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켜 놓고 가을이나 겨울에 입을만한 옷을 찾았다. 

책상아래 박스가 세 개 있었다. 두 개를 다 뒤졌어도 입을만한 옷은 없었다. 

맨 아래 박스는 작아서 그냥 내렸던 박스를 다시 올려놓으려고 하는데 더 작은 박스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박스 모서리에 적힌 글씨. 분명히 효정이 자신이 쓴 글씨였다. 

작년 수효의 진짜 생일에 생일선물로 줬던 다이어리와 만년필이 생각났다. 

선물을 포장하고 박스 위에 적었던 문구. 박스를 열어 보았다. 

그런데. 다이어리와 만년필이 그대로 있었다. 

함께 찍은 사진 몇 장이 다이어리 표지 카피 안에 있었다. 

다이어리를 펼쳤다. 몇 개의 메모만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그의 성격이 다이어리를 꼼꼼하게 적는 스타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그저 무용지물이었을지 모른다. 

몇 개는 낙서. 그리고 시시콜콜한 일상들. 몇 장을 넘기다 효정은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최효정, 나는 그녀의 눈빛을 알 것 같다. 그 눈빛은 틀림없이 사랑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이다. 어머니...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물어보고 싶다. 그러나 물어보지 않는 게 좋겠다. 내가 노력해서 내가 원하는 세상을 얻었을 때 그 눈빛은 진짜 어머니의 눈빛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녀를 어머니로가 아니라 여자로 사랑하고 말았다. 마음으로만 사랑하려 했는데 몸으로도 사랑하고 말았다. 나는 천하에 나쁜 놈이다. 나쁜 놈인 줄 알면서도 몸이 제어가 안 되었다. 그녀가 내 마취에 취했을 때 나를 제어했어야 하는데 일을 저질러 버렸다. 그러나 이제 그녀를 놓아주어야 한다. 아무리 공부해도 세상에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 그렇다. 그녀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이다. 그래서 아픔을 주면 안 된다. 그런데도 난 그녀에게 나쁜 짓을 했다. 나는 나쁜 놈이다. >

효정은 갑자기 앞이 캄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나왔다. 

가슴을 쥐어뜯었다. 

경수오빠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엄마도 스쳐 지나갔다. 

엄마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 편지를 그가 뜯어볼 것으로 짐작했었다. 

그러면 그때야 그가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먼저 자신이 누군지 알아 버린 것 같다. 

침대 구석에서, 책장에서, 방안 곳곳에 남은 그의 흔적들. 

효정은 흘러내린 눈물이 마를 때까지 오랜 시간 그 곳에 머물렀다. 

어렴풋 알면서도 그는 말없이 그것을 자신 속에 품었다. 

방을 나와서도 참으려고 했지만 자꾸만 눈물이 났다. 

세상에 사랑을 하는 모든 사람은 어리석은 못난이가 된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안에서 가장 빛이 난다. 

상대방을 제일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서로에게 그 마음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 마음을 꺼내 보여줄 때가 있을까. 

그 애가 마지막으로 적었던 문장. 내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 

그 문장을 끝으로 다이어리는 텅 비었다. 

오랜 시간 후에 원장이 다시 찾는다는 전갈을 듣고서야 효정은 옷가지 몇 개를 챙겨 방을 나왔다. 

불을 끄기 전 그의 텅 빈 책상을 한참을 보았다. 

불을 껐다.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다시 눈물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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