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67 주아 (67/68)

00067  주아  =========================================================================

                                    

67.

사람들이 천막으로 이동하자 천막이 잘 보이는 성벽 위로 이동해 모레네가 준 마법 고글로 주변 상황을 확인하며 언제쯤 주아를 데리러 갈지 시기를 저울질했다.

마법 고글은 스노보드 고글과 같은 형태로 망원경 기능이 있어 먼 곳에 있는 사물을 힘주어 바라보면 자동으로 초점을 맞춰졌다. 

또한, 적외선 기능이 있어 야간전투에도 큰 도움이 됐고, 클린 마법과 습기 제거 마법도 내장돼 있어 어떤 상황에서도 선명한 시야를 확보했다.

모레네를 차지하자 좋은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따뜻한 집과 맛있는 요리, 화끈한 섹스는 기본이었고, 마법 고글 같은 첨단(?) 장비도 구할 수 있었다.

마법 고글은 시간 회귀 전에도 탐내던 물건이었다. 그러나 판게아 최대 도시 중 하나인 카라스에서만 생산하는 제품으로 생산량이 매우 적어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내가 쓰고 있는 건 모레네 할아버지가 쓰던 유품으로 최신품은 아니었지만, 자동 복원 마법이 걸려있어 언제나 새것 같아 구닥다리라는 느낌도 없었다.   

“소란스러운 게 강제로 길드에 가입시키고 있나 봐요. 나쁜 새끼들! 자기들 멋대로 하네요. 어쩌실 거예요? 계속 보고만 있을 거예요?”

‘한 놈 당하는 것도 봤고, 판게아에 먼저 온 사람들이 어떤지도 대충 알았을 테니 이쯤에서 데려와도 되겠다. 딴 놈이 손이라도 잡으면 내가 못 참을 것 같다.’   

“바리안과 천막을 둘러보고 올 테니 여기 있어.”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다녀오세요.”

유정이를 성벽에 남겨두고 남문 경비대 조장 바리안에게 천막을 함께 둘러보자고 제안했다.

‘명예기사 할만하네. 말 한마디에 재깍재깍 움직이고. 크크크크~“

제안을 명령으로 받아들인 바리안이 쉬고 있던 초병 열 명을 차출해 빛나는 창과 방패를 들고 내 뒤를 따랐다.

경비대가 들이닥치자 큰일이 일어난 줄 알고 영웅과 환인, 고구려 길드가 하던 일을 멈추고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이들이 코리아타운에선 왕일지 몰라도 경비대 앞에선 고양이 앞에 쥐었다.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불만을 드러내면 길마건 신입생이건 가리지 않고 연행해 지하 감옥에 가뒀다.

지하 감옥에 투옥되면 최소 한 달은 갇혀 있어야 했고, 그동안 두들겨 맞는 것은 기본이었다. 

풀려나도 과도한 벌금을 매겨 벌금 낼 시간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고, 반병신이 되어 나오는 일도 잦아 포션이 없으면 골골 앓다가 병들어 죽었다.

이 때문에 성문을 지날 때도 경비병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눈이 마주쳤다가 찍히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기사님! 찾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찾기 편하게 모두 불러낼까요? 일일이 천막을 뒤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그게 좋겠군요.”

“보기 좋게 바로 정렬시켜 드리겠습니다.” 

“바리안 조장님! 소란스럽지 않게 처리해 주십시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제 이름은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번거로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큰 목소리로 대답한 바리안 조장이 천막 뒤에 숨어 눈치를 보던 영웅 길드원을 한 명 불렀다.

“너 이리와!”

“저.저요? 무.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오라면 빨리 올 것이지 어디서 말대꾸야? 지하 감옥에서 몇 년 썩고 싶어?”

“죄.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이름이 뭐야?”

“기.김말중입니다.”

“오늘은 기사님이 소란스럽게 하지 말라고 하셔서 특별히 용서하지만, 다음에 눈에 띄면 그냥 안 넘어간다. 알았어?”

“가.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서 김영웅과 최민순, 이용호를 불러와. 30초 내로 튀어오지 않으면 그날이 놈들 제삿날이라고 전해. 빨리 가.”

“아.알겠습니다.” 

바리안이 일부러 큰 목소리로 말하자 숨어서 동태를 살피던 김영웅과 최민순, 이용호가 화들짝 놀라 튀어나왔다.

“바리안 조장님 안녕하십니까? 그동안 찾아뵙지도 못하고 죄송합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안면 트고 지냈다고 찾아와 인사를 해? 놀리는 거야?”

“아닙니다.”

“어이 김영웅! 전쟁에서 이기니까 내가 우스워 보이지?”

“죄송합니다.”

“너도 기사님 덕분에 운 좋은 줄 알아.”

“감사합니다.”  

“오늘 들어온 신입생 중에 여기 계신 기사님이 찾는 사람이 있다. 1분 내로 이 앞에 집합시켜. 시작!”

“네에~!”

김영웅과 최민순, 이용호가 천막 안에 있는 신입생들을 빨리 불러내라고 악을 쓰자 길드원들이 발정 난 멧돼지처럼 뛰어다니며 신입생들을 끌어냈다.

내가 찾는 사람이 있다고 말해 폭력을 휘두르진 않았지만, 길마들이 바리안 조장에게 찍힐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거친 언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며 코리아타운 전체가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이 새끼가 조용히 처리하라니까 더 소란스럽게 하네. 내가 명예기사라고 우습게 보는 거야? 내 부하가 아니니 조질 수도 없고... 젠장!’

“혹시 이 새끼 나를 영웅, 환인, 고구려 길드와 싸우게 하려는 속셈 아니야? 에이 나랑 원수진 일도 없는데 설마 그러려고.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는데... 모레네와 모리아를 좋아한 거 아니야?‘  

소란스럽기는 했지만, 바리안 조장 덕에 일일이 천막을 돌아다니며 쓸만한 사람을 찾는 척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됐다.

퇴근 시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차원의 틈이 열리며 백여 대가 넘는 차량이 빨려들어 왔다.

그러나 버스는 20대 정도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승용차라 들어온 사람은 1,000명도 안 됐다.

넘어온 수는 1,300명이 넘었지만, 착륙하며 300명 이상이 충돌로 사망해 역대 가장 적은 수가 넘어왔다. 

그래도 10명씩 세우자 100줄이나 돼 얼굴을 확인하는 척하는 것만도 1시간이 넘게 걸렸다.  

   

“너! 너! 너! 왼쪽으로 빠져.”

성벽에서 쳐다보는 유정과 숨어서 지켜보는 소희를 속이기 위해 50명을 1차로 추렸다.

‘장동역도 10차 들어온 거였어? 민비연, 박삼덕, 지무윤, 지무종도 10차였네. 10차에 인물이 많네.’

일렬로 늘어선 채 부동자세로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자 얼굴을 명확하게 볼 수 있어 예전에 안면이 있던 얼굴을 쉽게 찾아냈다.

민비연과 박삼덕은 연인으로 둘 다 활솜씨가 일품이었고, 지무윤과 지무종은 쌍둥이 형제로 합격술의 달인이었다.

장동역은 중형 길드인 태평 길드의 길마로 성향은 악도 선도 아닌 중간으로 나와는 가끔 얼굴을 보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렇다고 함께할 만큼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고, 100%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라서 영입할 마음은 없었다.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50명 사이를 오가며 괜찮은 물건이 있는지 확인하듯 아래위로 쭉 훑으며 돌아다녔다. 

누가 봐도 아는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쓸만한 사람을 고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못했다. 

내가 오늘 들어온 신입생들을 전부 끌고 가도 김영웅과 최민순, 이용호는 부글부글 속이 끓어오르겠지만, 겉으론 웃으며 박수를 쳐야 했다.

대형 길드들이 이스트 성 경비대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건 앞으로 2년 후의 일이었다. 

판게아에 들어온 지 3년이 지나자 대형 길드에 이스트 성의 근위기사까지 제압할 실력자가 최소 3~4명은 됐다. 

그러자 경비대도 대형 길드와는 될 수 있는 한 충돌을 피했다. 그렇다고 피타스 성주가 이방인을 두려워하는 건 아니었다.

실리주의자답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한 것이지 자신을 업신여기는 길드를 용서할 생각도 없었다.

피타스 성주는 신화급 몬스터에 필적하는 실력자로 혼자서 대형 길드 2~3개는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었다.

근위기사와 경비대까지 동원하면 큰 피해를 보겠지만, 이방인들을 모두 몰아낼 수 있었다.

이를 잘 아는 대형 길드들은 경비대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하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았고, 피타스 성주도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라서 대형 길드는 선을 넘지만 않으면 적당히 눈감아줬다.          

“너! 너! 그리고 너만 남고 나머지는 들어가.”

50명을 6명으로 간추리자 장동역과 민비연, 박삼덕, 지무윤, 지무종 그리고 주아가 남았다.

“바리안 조장님!”

“네!”

“이들과 조용히 얘기할 수 있게 천막 하나만 비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피타스 성주처럼 아주 탁하고 거친 목소리로 바리안 조장에게 조용히 얘기할 곳을 마련해달라고 부탁을 가장을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우측에 다소곳이 서 있던 김영웅과 최민순, 이용호이 부하들을 닦달해 천막 하나를 깨끗이 비우고 사람들을 멀찍이 물러서게 했다.

“모두 따라 들어와!”

“.......”

“뭐하고 있어? 따라오지 않고.”

“기사님 말씀 안 들려? 빨리 들어가.”

“네.네.네.”

바리안 조장이 소리치자 그제야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놀려 깨끗이 정리된 천막으로 따라 들어왔다.

  

여섯 명을 일렬로 세워놓고 눈을 바라보자 주아를 뺀 다섯 명은 눈이 마주치자 급히 고개를 숙였다.

‘원래 강단이 있었나? 하긴 몬스터와 싸울 때 움츠러드는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어. 배포는 타고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 싹수가 남달랐겠지.’ 

“태어난 곳은 어딘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직업은 어떻게 되는지, 자신에 대한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적는다. 시간은 30분 주지.”

마법 지갑에서 종이와 연필을 꺼내 하나씩 나눠주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적도록 했다.

이렇게 한 건 주아의 과거를 정확히 알려는 의도도 있지만, 나머지 사람들도 과거를 알아두는 게 미래의 적이 됐을 때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장동역은 생선가게 종업원으로 일했고, 민비연은 백화점 화장품 코너 점원, 박삼덕은 작은 무역회사의 대리, 지무윤과 지무종은 전 국가대표이자 태권도 사범이었다.

마지막으로 주아는 XX대학교 생물학과 4학년 졸업반으로 XX연구소 유전공학연구실 인턴 연구원으로 실습 중이었다.  

특이한 건 다른 사람들이 자기소개서를 빽빽이 채우며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어필하려 했지만, 주아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 말밖에는 적은 게 없었다.

“다 나가고 최주아만 남아.”

주아만 남고 모두 나가라고 하자 다섯 명 모두 살았다는 표정을 짓고 후다닥 천막을 나갔다. 

남는 것이 미래를 바꾸는 일이란 것도 모른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가는 사람들이 한심했지만, 나라도 그들의 처지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검은 로브 후드를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남성이 위압적인 말로 압박하는데, 좋은 뜻을 갖고 행동한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이 나가자 소희가 은신을 풀고 다가왔다. 그러나 주아의 놀라는 기색도 없이 힐끗 소희를 바라보고 내게 시선을 맞췄다.

‘전혀 놀라지 않았어. 그리고 긴장한 모습도 없고. 원래 잘 놀라지도 흥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이건 좀 지나친데. 그러고 보니 아까 사고현장에서 겁에 질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어.’

‘오십 명 선발할 때도 그렇고, 다섯 명으로 좁혀질 때도 표정 변화가 없었어. 자기소개서도 그렇고. 혹시... 나처럼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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