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3 채찍 =========================================================================
53.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카라이진을 상대하지 못한 점, 카라이진의 행동을 보고 당황해 위험을 자초한 점, 형편없는 능력을 대단한 것으로 과대평가한 점, 오빠 얘기를 귀담아듣지 않고 행동한 점, 명령을 충실히 따르지 못한 점 등 많은 부분을 잘못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사냥터에 나오면 오빠 말에 절대복종할게요. 다시는 허투루 듣지 않을게요.”
“또?”
“꾀부리지 않고 열심히 훈련해 오늘같이 멍청한 짓을 다시는 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오빠가 걱정하지 않게 앞으로 더욱 신중하게 행동하고, 형편없는 실력에 도취돼 자만하지 않을게요.”
“소희는?”
“저도 유정이와 같아요. 다시는 오빠 실망시키는 않을게요.”
“둘 다 맹세할 수 있어?”
“네에~”
“이리와!”
“흑...”
“히잉~”
포근히 안아주자 많이 섭섭했는지 유정과 소희 둘 다 눈물을 흘렸다. 우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55년 만에 찾아온 사랑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처럼 온종일 끌어안고 뒹굴어도 예뻐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항상 좋은 사람이 될 순 없었다. 아이가 잘못했을 때 따끔하게 혼내지 않으면 아이는 자기가 한 행동이 잘못된 것인지 알지 못하고 계속 반복했다.
자식이 바른길로 가길 원한다면 매를 들어야 했다. 폭력의 매가 아닌 사랑의 매로 유정과 소희를 인도해야 지옥의 판게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내가 왜 이런다고 생각해?”
“저희를 걱정해서요.”
“소희는?”
“저희를 사랑하니까요.”
“맞아! 사랑하고 아끼고 걱정하니까 화내는 거야. 싫어하면 화내지도 않아. 내가 어떤 성격인지 너희도 대충은 알잖아. 난 나랑 살 부딪치며 사는 사람 아니면 사람으로 보지 않아. 무슨 뜻인지 알지?”
“네!”
“나는 너희를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아낄 거야. 하지만 오늘처럼 자기 분수도 모르고 행동하며 한눈을 판다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왜 그런다고 생각해?”
“저희와 끝까지 함께하고 싶으니까요.”
“오빠 우리 없으면 못 사니까요.”
“그렇게 나를 잘 알면서 형편없이 행동해? 내가 얼마나 크게 놀랐는지 알아? 괜한 부탁 들어줘서 너희를 잃는 건 아닌지 별의별 걱정을 다 했어. 그런데 너희는 내가 화낸다고 섭섭해서 울기만 하고... 오빠는 지금도 아까일 생각 하면 심장이 두근거려 죽을 것 같아.”
“잘못했어요. 흐윽...”
“죄송해요. 흐응...”
“명심해! 우리는 가족이야. 절대 헤어져서는 안 되는 가족. 백 년이 지나도 천 년이 지나도 함께할 가족이야. 자기 혼자만의 목숨이 아니야. 그걸 잊고 행동하면 남은 가족은 평생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 살아야 해.”
“다시는 안 그럴게요. 오빠랑 소희랑 오래오래 살 수 있게 다시는 바보 같은 짓 안 할게요. 아앙~”
“절대 그런 일은 없도록 할 거예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우리 셋이 영원토록 함께 할 수 있게 할게요. 오빠! 정말 미안해요. 으앙~”
‘내가 애들 상대로 너무 심한 신파극을 찍었나? 이렇게 엉엉 울 줄은 몰랐네. 이러면 또 미안해지는데... 어휴~’
‘아니야! 잘한 거야. 한 번쯤 버릇을 단단히 고쳐줄 때가 됐어. 손자를 너무 귀여워하면 할아버지 상투 잡는다고 예쁘다고 오냐오냐하면 안 돼! 이곳은 판게아야. 집에서 살림만 하는 지구가 아니야. 확실한 위계질서가 정립돼야 살아남을 수 있는 지옥이야.’
‘앞으로도 오늘처럼 잘못한 것이 있으면 눈물을 쏙 빼놔야 해. 그래야 우리가 살고 내가 편해져. 남편의 하늘 같은 권위가 서는 거야. 흐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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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없어.”
“유정아! 너희 괜찮아?”
“네, 언니! 보다시피 멀쩡해요.”
“소희는?”
“쌩쌩해요. 헤헷~”
“모두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집(?)에 돌아오자 모레네가 전쟁 나갔던 남편이 죽었다 살아온 것처럼 반갑게 맞아줬다.
‘이래서 집에 마누라가 있어야 하는 거구나. 웃는 얼굴로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잖아.’
‘집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반겨준 게 고등학교 이후 처음이지? 엄마와 같이 있을 때는 그게 행복인지 몰랐는데, 혼자 살며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았지.’
‘퇴근하고 집에 가기 싫어 매일 새끼줄 꼬느라 정신이 없었지. 썰렁한 빈집에 들어가는 게 꼭 관속에 들어가는 기분이었어. 그래서 그렇게 여자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 건가?’
“예정보다 일찍 오셨네요?“
“첫날 목표를 채워서 오래 있을 필요가 없었어.”
“일이 잘 풀렸다니 다행이에요.”
“빨리 와서 좋아?”
“그럼요. 이렇게 사랑하는 만수씨 품에 빨리 안길 수 있잖아요. 호호호~”
포용목과 철무동 일행을 잡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시간도 왕창 벌어 빨리 돌아올 수 있었다는 말을 모레네에게 할 순 없었다.
조선 시대 아낙들보다 더욱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모레네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잘했다고 할 성격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사람을 벌레처럼 죽이는 냉혈한이란 걸 말해줄 수는 없었다.
모레네는 한 번도 성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몬스터를 사냥해본 적도 없었다.
이는 우리가 상상했던 여전사와는 거리가 아주 먼 모습으로 몬스터가 득실대는 판게아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달리 이스트 성 주민 절반은 모레네처럼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았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여성, 직장에 출근하는 남편, 온종일 밭에 나가 일하는 노예 등 지구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판게아 주민은 모두 칼과 활을 들고 몬스터를 사냥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선입견이었다.
그건 아프리카 사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사냥을 잘하고, 옷은 반쯤 벗고 다니고, 집은 나무로 얼기설기 지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배고프죠?”
“응.”
“3층 리모델링 끝났어요. 올라가서 씻고 편히 누워 계세요. 아침 준비되면 깨울게요. 유정아! 소희야! 너희도 올라가서 씻고 누워있어.”
“네~”
아이템이 잔뜩 든 마법 배낭을 모레네에게 건네주고 3층으로 올라갔다. 마법 문명이 발달한 세상답게 4일 만에 창고 같던 3층이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커다란 방과 넓은 거실, 욕실은 특급 호텔 부럽지 않을 만큼 아주 근사하게 꾸며져 있었다.
“우와~ 침대 엄청나게 크다. 열 명은 뒹굴어도 되겠다. 언니가 오빠 취향 제대로 알고 있네. 한꺼번에 여러 명 데리고 놀고 싶어 하는 거.”
“그것보다 모레네 언니 시간 많이 들었겠다.”
“그러게. 시간도 별로 없던데 어떻게 한 거지?”
“상점 물건 많이 빈 거 못 봤어?”
“그래?”
“눈은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니? 좀 둘러보고 다녀.”
“오빠 잔소리 늘었다고 너까지 잔소리해야겠어?”
“잔소리 듣기 싫으면 잘해. 오빠 기분도 안 좋은데, 화나게 하지 말고.”
“예예! 모두 저의 잘못입니다. 소녀의 잘못을 용서해주십시오.”
“킥킥킥킥~”
“웃지 마! 재수 없어.”
소희의 타박에 유정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내 뒤를 따라 욕실로 들어왔다. 하얀 타일을 깐 욕실은 천장과 한쪽 벽을 이중 유리창으로 바꿔 하늘과 바깥 풍경이 한눈에 보였다.
인상적인 건 다섯 명은 충분히 눕고도 남을 커다란 욕조로 유정이 말한 것처럼 여러 명을 동시에 정복하고 싶어 하는 내 취향을 모레네가 고려한 게 분명했다.
“욕실에도 시간을 처발랐네. 오빠! 이러다 모레네 언니 파산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안 쓰는 레어 아이템 길 건너 무기·방어구 상점에 팔라고 줬어.”
“오빠가 리모델링 이렇게 하라고 시킨 거예요?”
“응!”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걱정했잖아요. 모레네 언니 길거리로 내쫓기는 줄 알고.”
“너도 모레네가 마음에 들어?”
“저는 오빠에게 잘하면 무조건 마음에 들어요.”
“나 밉지 않아?”
“질투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요? 저만 오빠 눈 밖에 나죠. 그럴 바에는 제자리를 확실하게 지키면서 집안이 화목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역시 배려심은 우리 유정이가 최고야. 마음도 착하고 발랄하고 통통 튀어서 너무 좋아.“
“알면 엉덩이 좀 그만 때려요. 엊그저께 맞은 곳 아직도 쓰라려요.”
“그건 너희가 잘못해서 맞은 거야. 내 탓 아니다.”
“그래도 너무 심했어요. 어떻게 숙녀 엉덩이를 까고 무릎에 걸쳐놓고 때려요. 오빠 솔직히 말해 봐요. 기분 좋았죠?”
“노코멘트!”
“우~ 변태.”
“흐흐흐흐~”
“오빠 우리 욕조에 누워요. 나흘 동안 밖에서 잤더니 몸이 찌뿌둥해 죽겠어요.”
“그래.”
유정이 따뜻한 물을 받는 사이 방어구를 벗어 마법 지갑에 넣고, 단검 두 자루는 만약을 대비해 욕조 위에 걸쳐놓았다. 마법 욕조라 그런지 물을 받는데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판게아가 지구보다 사회적 제도는 뒤처졌을지 몰라도 편의시설은 훨씬 앞선 것 같아요. 물 받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서울에서 이런 욕조에 물 받으려면 20분은 걸리는데 이곳은 순식간이잖아요. 리모델링 공사만 해도 뚝딱이고요.”
이스트 성은 석조 건물과 목조 건물이 어우러진 중세 시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내부는 우리가 상상만 하던 마법 기기들이 가득해 생활의 편리성은 지구보다 훨씬 뛰어났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이방인들은 거무튀튀한 겉모습만 보고 이스트 성의 문화 수준을 저급하다고 생각했다.
“펜리르가 지키고 있는데 단검은 왜 항상 머리맡에 두세요?”
“도둑 한 명을 열 장정이 못 막는다고 했어. 펜리르만 믿고 있다간 큰일 나.”
“그러면 저도 잘 때 무기 가지고 잘까요?”
“알아서 해. 각자 취향이니까.”
“손에 쥐고 자다가 오빠 찌르면 어쩌죠?”
“그렇게 내가 미워?”
“농담이에요. 호호호호~”
‘진담 아니야?’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 피로가 확 풀리는 것 같았다. 스탯이 크게 늘어 예전처럼 큰 피로를 느끼진 않지만, 본바탕은 나약한 사람이라 지치고 힘든 건 어쩔 수 없었다.
서리 법사 카라이진을 잡고 얼음 성채에 3일 더 머물렀다. 들어오는 중국인이 있으면 잡을 생각으로 머물렀지만, 포용목과 철무동 일행 이외엔 얼음 성채에 접근하는 사람이 없어 카라이진을 한 번 더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서리 법사 카라이진도 아이템이 후한 놈은 아닌지 상점행 매직 아이템 한 개와 중급 포션 한 병을 선물로 안겨줬다.
그래도 심기일전한 유정과 소희가 나와 펜리르의 도움 없이 카라이진을 잡은 건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또한, 아이스 트롤이 10마리 이상 달려들어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며 하나하나 끊어 잡는 모습은 입에 쓴 소리가 독이 아니라 약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