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7 조선 처자 모레네 =========================================================================
47.
“앞으로 이방 쓰세요. 저는 동생과 옆방을 쓰면 돼요.”
“그래도 이건 아니지. 모레네가 쓰던 방을 뺏을 순 없어.”
“오빠 말이 맞아요. 이방은 엄연히 언니 방이에요. 주인을 내쫓는 건 예의가 아니죠.”
“3층에 보니까 안 쓰는 것 같던데, 거기를 정리해서 저희가 쓰면 어떨까요?”
“불편하면 그렇게 하세요. 대신 3층 리모델링할 때까지는 이방 쓰세요. 며칠 걸리지 않을 거예요.”
“알았어.”
대략 40평쯤 되는 잡화점은 지상 3층 지하 1층의 4층 건물로 1층은 매장으로 사용했고, 지하는 창고, 2층은 자매가 사는 집, 3층은 부모님과 오빠가 돌아가신 후 방치돼 있었다.
집은 고급 호텔보단 한참 못했지만, 좀 오래된 서울 아파트 느낌으로 사는 데는 전혀 불편하지는 않았다.
화장실도 수세식이었고, 목욕탕에 뜨거운 물도 나왔고, 지구에서 쓰던 냉장고와 기능이 똑같은 기능을 갖춘 마법 찬장도 있었다.
지구가 기계 문명이 발달한 곳이라면 판게아는 마법 문명이 발달한 곳으로 생활 수준은 큰 차이가 없었다.
“오빠 좋겠어요.”
“뭐가?”
“모레네 언니 체취가 침대에 가득해서요.”
“캑캑캑캑~”
유정의 가시 돋친 말에 사레가 들려 한참 동안 캑캑거렸다. 모레네가 쓰던 방은 커다란 침대와 화장대가 전부로 숙녀 방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는지 청소한 흔적이 곳곳에 보였고, 액자가 걸려있던 자국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우리가 올 것을 예상하고 깨끗이 청소한 상태로 먼지 한 톨 없었다. 하지만 냄새까지 지우진 못해 모레네가 쓰던 침대와 이불에서 재스민 향기가 깊이 남아 있었다.
모레네는 재스민 향기를 좋아해 잡화점에는 항상 하얀 재스민 꽃이 꽃병에 꽂혀 있었다.
머리와 몸에서도 진한 재스민 향기가 나 모레네를 떠올리면 재스민이 떠오를 정도였다.
”오빠!“
“어?”
“모레네 언니랑 놀아주고 오세요.”
“놀아주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언니 오빠 얼굴 보고 싶어서 아까부터 계속 거실에서 서성이고 있어요. 빨리 가보세요.”
“오빠! 간 김에 재미도 보고와. 찐하게. 크크크~”
‘밤새 정액을 뽑아놓고 재미있게 놀라고? 유정이 저 악마... 아오~’
거실로 나오자 모레네의 얼굴이 복사꽃처럼 화사해졌다. 저녁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방에 들어간 지 30분도 안 됐다.
바로 옆에 두고도 볼 수 없자 애간장이 탔는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거실을 서성였고, 손톱까지 물어뜯어 왼손 검지가 걸레가 돼 있었다.
“만수씨! 우리 별 구경해요.”
“그래.”
모레네를 따라 옥상에 올라가서 본 별은 지난번 펜리르 던전에서 봤던 바로 그 별이었다.
유난히 어둡던 그 별이 오늘은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그때는 유정과 소희를 힘들게 해 반짝이는 별마저 어둡게 보였다.
그러나 오늘은 품에 안겨 재잘대는 예쁜 아기 새 덕분에 평소보다 배는 더 아름답게 보였다.
‘사람 마음 간사한 건 알아줘야 해. 똑같은 걸 봐도 기분이 이렇게 틀리니. 쯔쯔쯔쯔~’
“내일 피타스 성주를 만나면 딱 두 가지만 명심하세요. 절대 고개를 들어 피타스 성주와 눈을 마주치면 안 돼요. 그건 피타스 성주에 대한 도전이에요. 그럼 피타스 성주가 1,000년간 갖고 싶어 한 성주의 인장이 있어도 목숨을 보전할 수 없어요.”
“눈을 쳐다본 게 도전이야? 그건 상대의 얘기를 귀담아듣는다는 표시잖아.”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요. 최근 백년간 열 번이 넘는 반란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때마다 공통점이 하나 있었죠. 피타스 성주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본 사람이 반란의 우두머리였어요. 이 때문에 눈을 바라보는 사람은 흑심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 남김없이 죽이게 됐죠.”
“그 사람들 모두 인척이나 측근 아니었어?”
“맞아요. 최측근이에요.”
“눈을 봐서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 권력에 욕심을 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눈 쳐다봤다고 반란 일으키면 세상에 반란 일으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어.”
“만수씨 말처럼 말도 안 되는 얘기죠.”
“모레네도 아는 걸 피타스 성주가 몰라?”
“당연히 피타스 성주도 알죠.”
“그런데 왜 그러는 거야?”
“도전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자식과 측근들에게 보내는 거예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성주 자리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할 만큼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거죠.”
“성주도 할 짓이 못되네.”
“가진 게 많으면 근심도 커지는 법이죠.”
‘개척마을 먹는 거 다시 고민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같은 지구인만 못 믿을 게 아니었네. 판게아 원주민도 지구인과 똑같이 못 믿을 존재였어. 원주민은 다를 줄 알았는데... 20년 동안 뭐하며 산 거야? 아는 게 하나도 없어. 병신!’
“두 번째는 피타스 성주가 묻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해선 안 돼요. 먼저 말하거나 성주의 말을 끊는 건 불경죄에 해당해요. 이 또한 목숨을 보전할 수 없어요.”
“권위주의자야?”
“사람들 말로는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대요. 전임 성주 제이브를 몰아내고 성주가 됐을 땐 주민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소탈한 성격이었대요. 순장을 없앤 것도 피타스가 성주가 된 직후로 이스트 성의 악습이 이때 대부분 사라졌죠.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시간이 지나자 피타스 성주도 수많은 풍파 속에 초심을 잃고 지금의 이기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변했죠.”
피타스 성주가 처음과 180도 달라졌다는 모레네의 말에 나 역시 루시퍼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으면 그와 같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락천사 루시퍼도 처음엔 우리가 상상하는 착하고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영원같이 긴 시간을 살며 조금씩 조금씩 변해 악마의 왕 사탄이라 불리는 존재가 됐을 것이다.
지금은 나도 권력을 잡으면 세상을 좀 더 건전하게(?) 바꾸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초심을 잃고 권력을 지키는 일에 급급할 게 분명했다.
“영원한 삶을 살면서 초심을 지킬 수 있을까?”
“불가능하죠. 대천사들도 타락해 악마가 되는데, 두부보다 약한 멘탈을 지닌 인간이 그럴 수 없죠. 그래서 사람들은 루시퍼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을 축복이 아닌 저주라고 불러요.”
판게아 사람(판게아 주민들은 자신들을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람이라 부름)들은 루시퍼를 판게아 행성을 사람이 살 수 있게 개조한 창조주로 알고 있었지 우리처럼 타락 천사 또는 사탄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타임슬립 전에 알게 된 사실로 모레네가 내 여자가 됐지만, 100년 동안 창조주로 믿어온 루시퍼를 악마로 욕하면 화낼 수도 있어 아무 말도 않았다.
그러나 이건 내가 잘못 생각한 것으로 38,658년이 흐르는 동안 판게아 사람들도 루시퍼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돼 좋게만 생각하진 않았다. 그 때문에 루시퍼가 영원한 생명을 준 것을 선의가 아니라 악의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55년밖에 살아보지 못한 내 처지에선 영원한 생명이 저주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저주라고?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왜요?”
“우리는 100년도 못 살아. 그것도 젊음을 유지한 채 살다 죽는 게 아니라 40살만 넘어도 급격한 노화로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 죽어.”
“지구가 그런지는 몰랐네요. 판게아와 같은 줄 알았어요. 그렇다면 당연히 영생을 꿈꿀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이쪽도 나름대로 고민이 깊어요. 결국 일정 시간을 살다 죽는 것도, 시간만 많다면 세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 살 수 있는 것도 둘 다 행복한 건 아니었네요. 사는 동안 행복해지려 노력하는 삶만이 시간과 상관없이 진짜 알찬 삶인 것 같네요.”
“그게 노력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래도 어쩌겠어요. 사는 동안 노력해야죠. 그게 싫다면 바보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 수밖에 없잖아요.”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그러나 항상 실수한 다음에야 겉만 보고 판단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원주민을 몬스터와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 그것도 무려 20년 동안 고블린, 오크와 같은 저급한 무리로 생각하며 속으로 열라 비웃었다.
하지만 실상은 지구인보다 훨씬 똑똑하고 생각이 깊은 고등 인류였다. 그걸 모레네를 통해 오늘에야 알게 됐다.
‘나보다 백배는 똑똑한 여자를 몸매와 얼굴만 예쁜 섹스 인형으로 생각했으니...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겠네. 에휴~ 언제 인간 될 거냐 이 웬수야!’
“두 가지만 조심하면 되는 거야?”
“네!”
“이쪽 예의범절을 몰라 걱정이네.”
“저도 내일 내성에 들어가요. 제가 옆에 붙어 알려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유령초 때문에 가는 거야?”
“네!”
“유령초는 어디에 쓰는 재료야?”
“그건 저도 몰라요.”
“성주가 구해오라고 한 지 오래됐어?”
“1년쯤 됐어요.”
“전임 성주 제이프가 유령 동굴에 있는지 알았어?”
“아니요. 몰랐어요.”
“피타스는 알았겠지?”
“그렇겠죠.”
“그런데 왜 자신이 직접 가거나 부하들을 보내지 않고 모레네에게 의뢰한 거야?”
“부하들을 보내면 제이브에게 동조해 배신하는 놈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배신이 워낙 수시로 일어나는 곳이니까요.”
모레네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줬다. 내가 피타스라도 부하들을 유령 동굴에 보내지 않을 것이다.
뒤통수 한 번만 맞아도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된다. 하물며 100년 동안 열 번이면 사람이 아니라 개새끼도 믿을 수 없었다.
지구인에게 100년은 한없이 긴 시간이지만, 최소 2,500년을 산 피타스에겐 찰나와 같이 짧은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반란만 열 번이 넘었고, 성주로 지낸 1,000년 동안 일어난 반란까지 모두 합치면 30번에 육박했다.
“모레네는 시간이 얼마나 있어?”
“보여드릴까요?”
“응!”
196:133:12:55:17
시간을 보여 달라고 하자 토시를 벗고 하얀 팔뚝을 수줍게 내밀었다. 이스트 성에는 잡화점이 일곱 곳 있었다.
모레네의 들꽃 잡화점은 길가에 있어 이방인들이 많이 찾는 가게 중 하나였다. 당연히 장사가 잘 돼 시간이 많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한참 밑돌아 갖고 있는 시간이 200년도 안 됐다.
“생각보다 많지 않네. 시간을 따로 저장하는 장치가 있어?”
“아니요. 그런 거 없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시간이 적어? 장사가 잘 안 돼?”
“장사는 잘 돼요. 세금이 50%라 남는 게 없어서 그렇죠. 이윤이라도 높으면 좀 나을 텐데, 경쟁이 심해 20% 이상 올릴 수 없어 겨우 먹고 사는 수준이에요.”
“50%? 너무 많다.”
“50%면 평균이에요.”
“성마다 세금이 달라?”
“네. 적은 곳은 20%, 많은 곳은 80%가 넘는 곳도 있어요.”
“80%를 가져가면 주민들은 뭘 먹고 살라고?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겠다.”
“그런 곳은 주민이 모두 노예라고 봐야죠. 이스트 성도 다를 건 없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