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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8 사신(死神) 권소희 (18/68)

00018  사신(死神) 권소희  =========================================================================

                        

18. 사신(死神) 권소희

“오빠! 정말 맛있어요. 입에서 살살 녹아요.”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

피곤해하는 유정을 위해 룸서비스를 이용했다. 방울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를 곁들인 펜네와 훈제연어와 크림치즈를 곁들인 파르팔레, 부드러운 스테이크, 바싹한 감자튀김에 와인까지 한 병 시켜 밤거리가 한눈에 보이는 베란다에 앉아 이른 저녁을 즐겼다.

미안함에 대한 표현치곤 약소했지만, 유정이는 마음에 드는지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이스트 성은 중세의 유럽 스타일이라 한식을 먹을 순 없었지만, 서양식은 다양하게 갖춰져 있어 시간만 많으면 원하는 것을 즐길 수 있었다. 

지구에서도 못해본 연인과 넓은 베란다에 앉아 오붓한 저녁 식사를 판게아에서 한다는 게 우스웠지만, 기분만은 최고였다.

“한 번 해서 그런지 배고파 죽는 줄 알았어요.”

“사람들 듣겠다.”

“베란다에 우리 둘만 있는데 듣긴 누가 듣는다고 그래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어. 항상 조심해야 해.”

“그러고 보면 오빠도 걱정이 참 많은 것 같아요.”

“내가?”

“네! 잠도 깊이 못 자고, 가만히 앉아 있을 때도 항상 무언가를 깊이 고민하잖아요. 세상 근심은 오빠가 다 짊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잖아.”

“당연히 해야죠. 그래도 지나친 건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어요. 적당히 하세요. 몸 상해요.”

“알았어.”

미래를 알면 걱정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는 만큼 더 많은 걱정을 하게 됐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살면 되지만, 알면 미래를 바꾸기 위해 발버둥을 치게 된다.

문제는 발버둥을 쳐도 바꿀 수 없거나 바꾸는 게 쉽지 않다면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처럼 때론 모르고 사는 게 좋을 때도 있었다.

“코리아타운은 왜 가려는 거예요? 찾는 사람 있어요?”

“이번에 들어온 사람들 한번 봐두려고.”

“경쟁자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거죠? 그렇죠?”

“그런 것도 있지.”

미래의 경쟁자가 아니라 이름을 날렸던 두 사람이 정해진 날짜에 판게아에 도착했는지 확인하러 가는 것이었다.

대도 마문곡과 사신 권소희로 마문곡은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훔치는 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도둑으로 빠르기가 한 줄기 바람 같았다.

권소희는 죽음의 신이라는 별명처럼 은밀히 다가가 상대를 감쪽같이 죽이고 사라지는 은신술의 달인이었다. 

마문곡, 권소희와 원한을 맺은 적은 없었다. 나와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이 대부분 신시 길드 소속이었고, 둘은 반대 세력인 그림자 길드 소속이라 분쟁에 휘말리긴 했지만, 서로 죽고 죽이는 사이는 아니었다.

신시 길드와 그림자 길드는 4대 세력인 대한제국, 영웅, 환인, 고구려가 몰락하고 2년 후 생긴 길드로 신시가 전체의 이익을 중시한 반면 그림자는 개인의 이익에 치중해 사사건건 대립하며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시가 광명정대하고, 그림자가 비인간적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신시가 바른길을 걷고자 하지만, 그 안에는 상종 못 할 악인도 많았다.

그림자가 지나치게 개인의 이익에 집중해 사람들의 원성을 샀지만, 성자라고 할 만큼 올곧은 사람도 있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지만 군사정권이 장기집권한 나라로 정치 체제가 국민의 행복과 100% 일치하지 않았다. 

어떤 사상을 믿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사상을 인간중심으로 바르게 실천할 수 있느냐가 중요했다.

이들을 만나려는 건 미래가 바뀌었는지 확인하려는 것도 있지만,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지 알아보려는 게 더 컸다.

둘 다 인간성에 큰 문제는 없어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루시퍼를 상대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러나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가차 없이 죽일 생각이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과거에 조금이라도 원한을 맺은 사람은 힘을 갖추기 전에 찾아내 제거할 계획이었다.

마문곡, 권소희처럼 뛰어난 능력을 갖췄다면 일단 포섭으로 가닥을 잡겠지만, 능력도 없는 게 나쁜 짓만 골라 하던 놈은 확실히 제거할 생각이었다.

과거처럼 선(善)에 집착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상종 못 할 쓰레기를 두고 볼 생각도 없었다.

쓰레기를 내버려두면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봤고, 주변까지 오염시켜 세상을 썩게 했다.

또한, 그 피해가 나에게까지 와 보이는 족족 잡아 죽이는 것이 나와 유정이의 안전을 지키는 길이었다.  

‘친했던 사람들은 어떻게 하지? 그들이라고 내게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없는데. 흐음...’

“걸을 수 있겠어?”

“포션 덕분에 상처는 다 나았어요. 공포가 남아서 그렇지.”

“걱정하지 마. 공포가 사라질 때까지 밤새 사랑해줄 테니까.”

“또 할 거예요?”

“당연한 거 아니야?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헉!”

무기와 방어구, 액세서리까지 모두 갖춰 입고 후드로 장비를 가리고 호텔을 나와 코리아타운이 있는 이스트 성 남동쪽 성벽으로 걸어갔다.

저녁 6시라 날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해 내일 아침 올까 하다가 밤거리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어 유정의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거리를 걸었다.

“기분 진짜 좋다.”

“뭐가 좋아?”

“이렇게 남자 친구 팔짱끼고 거리를 걷는 게 꿈이었어요. 꿈을 실현해서 기분 너무너무 좋아요.”

“이렇게 예쁜 소녀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아닐 텐데. 좋아하는 사람이 부산까지 줄을 섰을 텐데. 그중에 마음에 드는 남자 하나 고르지 그랬어.”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었어요.”

“어떤 남자를 원하는데? 장동건? 원빈? 소지섭? 이런 남자 원했어?”

“아니요.”

“그럼 어떤 스타일?”

“평범하지만 비범하고, 비범하지만 평범한 사람요.”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제 옆에 있잖아요.”

“내가 비범해?”

“겉으론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죠. 누가 오빠를 보고 비범하다고 생각하겠어요. 평범함 그 자체인데. 그러니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감춘 거죠.”

“칭찬이야?”

“최고의 칭찬이죠.”

“좀 이상하지만, 유정이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정말이에요.” 

평생 튀어 본 적이 없었다. 외모도 평범하고, 능력도 평범하고, 말솜씨는 최악이라 언제나 사람들 속에 묻혀 살았다.

좋게 얘기하면 무난한 거고, 나쁘게 얘기하면 존재감이 없었다. 같은 학교 같은 반으로 1년을 같이 지내도 같은 반인지 모르는 그런 존재였다.

55년을 그렇게 자존감 없이 살다가 처음으로 비범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벅차오르는 마음을 속이기 위해 이상하다고 말했지만, 나를 인정해주는 유정의 말에 눈물이 날 뻔했다.

‘유정아!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네 말은 무조건 들어줄게. 너는 내 인생에 있어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야. 내가 쓸모없는 놈이 아니라는 확신을 준 최초의 사람이자 나를 남자로 인정해준 최초의 여자야. 고마워!!!’  

     

“못 보던 건물이 여러 게 생겼네요. 저 건물은 영웅 길드라고 쓰여 있고, 저기는 환인, 이쪽은 고구려라고 쓰여 있네요.”

    

“드디어 대형 길드가 등장하네.”

“우리에게 좋은 일일까요?”

“좋다고 할 순 없지. 대형 길드가 생기면 우리처럼 소수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억압할 테니까.”

“그러면 오빠도 늦기 전에 길드 만드세요.”

“언젠가는 만들어야겠지. 그러나 당분간은 마음 맞는 사람 몇 명 포섭해 같이 다니는 게 나을 것 같아.” 

“왜요?”

“모난 정이 돌 맞는다고 나서면 사방에 적을 만들게 되니까.”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지금은 능력이 안 돼 이스트 성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1년 후에는 이스트 성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된다.

그때부터가 진짜 무한경쟁의 시대였다.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은 그때를 대비해 사람들을 모아 길드를 창설했다.

하지만 세력이 크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만큼 많은 견제를 받아야 했고, 원하지 않는 싸움에도 휘말리게 됐다. 

대표적인 일이 국가 간의 분쟁이었다. 4대 길드가 망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중국, 일본과의 분쟁 때문이었다.

지구는 분쟁을 조정하는 나라와 국제기구가 있어 분쟁을 중재했지만, 판게아에선 그런 기구가 없어 분쟁이 시작되면 쉽게 끝나지 않았다.

특히 골이 깊은 국가 간의 분쟁은 한쪽이 완벽히 무너질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밀리면 자기뿐만 아니라 매달 판게아에 들어오는 사람들까지 노예와 다름없는 삶을 살게 돼 총력전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 선두에 대형 길드가 있었다. 그들의 설립 목적이 판게아에서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국민의 이권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었다.

‘자기들 세상이 온 것처럼 거들먹거리지만, 오랜 전쟁으로 주축 세력이 모두 죽고 이탈자가 생겨 무너지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그걸 알면서 길드를 만들 수는 없지.’

‘소수 정예로 힘을 키워 마을을 먹는 게 훨씬 이익이야. 마을을 차지하면 내 명령에 죽고 사는 원주민들을 수족으로 부릴 수 있어. 작은 마을도 정복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이스트 성을 중심으로 초급, 중급, 고급 난이도의 필드가 원을 그리며 존재했고, 그 너머에 72군주가 다스리는 도시와 이스트 성과 같은 다양한 원주민이 다스리는 도시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사이는 완충지대 또는 저주받은 대지로 불리며 도시와 도시의 이동을 방해하는 강력한 몬스터들이 우글댔다. 

놈들은 영웅과 신화급 몬스터의 졸개쯤으로 성 주변의 몬스터보다 월등히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했다.

내가 노리는 건 오지의 저주받은 대지에 존재하는 작은 개척 마을이었다. 이스트 성을 포함한 모든 성(城)은 루시퍼가 직접 만들어 성주를 잡아도 이방인이 주인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개척 마을은 루시퍼의 뜻과 상관없이 원주민들이 만든 마을로 촌장을 잡고 마을 중앙에 있는 결계석을 차지하면 마을은 물론 마을에 속한 원주민도 부하로 거둘 수 있었다.

문제는 개척마을이 있는 곳을 찾는 것도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고, 강력한 몬스터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일당백의 용사들을 무찌르고 마을을 접수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건물은 몇 채 생겼지만, 사람들의 모습은 크게 변한 게 없네요. 아니네.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나서 더 나빠진 것 같네요.”

“사람들이 늘어나 당장은 힘들겠지만, 인원이 많다는 건 그만큼 인재도 많고, 생산인력도 늘었다는 뜻이니까 좋아질 거야.”

“그때까지 살아남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잖아요.”

“그것까지 우리가 걱정해줄 이유는 없잖아.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아닌데.”

“맞네요. 죽든 말든 우리랑 상관없는 사람들이네요. 괜한 걱정 했네요.”

다정다감한 유정이 매몰차게 변한 것 같아 마음 아팠다. 그러나 안으로 곪는 것보다 밖으로 표출하는 게 나았다.

엄마를 잃은 슬픔이 가득한데 그걸 품고 있으면 병을 얻게 된다. 드러난 상처는 치료할 수 있지만, 깊은 곳에 감춰진 마음의 상처는 치료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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