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2 홀로 남겨지는 것! =========================================================================
12.
회색 후드 로브로 감싼 아주머니의 시신을 언덕 위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묻었다.
땅을 최대한 깊이 파 아주머니를 안장한 다음 몬스터와 동물이 시신을 훼손하지 못하게 커다란 돌로 층층이 쌓았다.
마지막으로 흙을 덮어 흔적을 지우고 나무에 ‘세상에서 가장 깊이 딸을 사랑한 어머니 이곳에 잠들다’라고 썼다.
이름을 적으면 훗날 문제가 될 수도 있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이름과 생년월일은 생략했다.
봉분 역시 쌓으면 누군가 파헤칠 수도 있어 표시가 나지 않게 땅을 평평히 고르고, 비문도 정면이 아닌 옆면에 새겼다.
“제 손으로 저놈들 죽여도 돼요?”
“원한다면 그래도 돼. 하지만 공포에 떨다 죽는 걸 지켜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알았어요.”
최동일과 전강수를 죽이지 못하게 한 건 죽인다고 원한이 풀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기 손으로 원수를 죽이면 원한이 풀릴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직접 겪어본 일로 중국, 일본, 미국, 프랑스 등 원한 맺은 놈들을 수백 명도 넘게 죽였지만, 죽일 때마다 원한이 줄어들기는커녕 마음의 무게만 더욱 커졌다.
판게아에서는 아주 사소한 다툼도 원한이 됐다. 자리다툼, 스틸, 아이템 분배, 여자 문제, 하다못해 밥 먹는 것까지 원한으로 발전했다.
이유는 법과 질서가 없기 때문이었다. 물건을 훔쳐도, 강간해도, 사람을 죽여도 죄가 없어 폭력이 일상화됐고, 지구에선 상상도 못 할 힘을 갖자 사소한 일도 참지 못하고 주먹부터 쓰며 원한을 맺게 됐다.
법이 지나치게 강력해도 사람들을 지치고 힘들게 하지만, 법이 없어도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최동일과 전강수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다가와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낮은 언덕이 길게 이어진 사냥터는 성문 앞 개활지만큼 사냥하는 사람이 많진 않지만, 3~4명씩 파티를 맺고 사냥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어 소리를 지르면 들렸다.
그러나 분쟁에 휘말릴 걸 두려워해 오지랖이 더럽게 넓지 않으면 다가오지 않았고, 반대로 멀리 달아났다.
소리에 이끌려온 몬스터는 주위를 돌며 남김없이 잡았다. 이렇게까지 하는 건 놈들이 했던 짓을 다시 돌려주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느꼈을 극도의 초조와 불안, 공포심을 놈들도 느끼다 죽게 할 생각이었다.
몇 명이나 강간하고, 몇 명이나 죽였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놈들이 가진 시간만으로 대략적인 계산이 나왔다.
평지와 언덕의 몬스터를 사냥해선 절대 그런 시간을 벌 수 없었다. 안전지대나 다름없는 성 주변을 벗어나야 조금씩 시간이 모였다.
그리고 그곳을 벗어나도 내가 한 달 넘게 던전에서 벌어들인 시간과 비교하면 놈이 보유했던 32년, 58년은 말이 안 됐다.
거의 대부분 사람에게 빼앗은 시간으로 놈들에게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은 목숨을 잃거나 점점 줄어드는 시간을 보며 불안에 떨다 죽어갔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 컥!”
“안 돼! 안 돼~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아... 큭!”
1시간 동안 죽음의 공포를 흠뻑 느낀 최동일과 전강수가 멈춰진 시계처럼 목숨을 잃었다.
전강수가 최동일보다 10초 더 오래 살다 죽었지만, 그 10초가 절대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자!”
“네!”
어머니를 땅에 묻고 다시 한바탕 눈물 쏙 뺐지만, 3분 만에 눈물을 그친 유정은 최동일과 전강수가 죽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유정은 화를 내지도 않았고, 놈들이 죽는 모습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마음속에 담아두려는지 뚫어지게 쳐다본 것 빼고는 아무런 말도 표정도 없었다.
‘생각보다 심지가 굳네. 사람 귀찮게 하지는 않겠어. 그런데 결국 혹을 달고 말았네. 어휴~ 이놈의 오지랖! 이번에도 못 버렸네.’
‘아니야! 혹이 아니라 애첩 하나 생긴 거야.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30년간 쌓이고 쌓인 욕망을 원 없이 푸는 거야.’
‘엄마가 돌아가신 애를 자빠뜨릴 생각을 하다니... 그러고도 내가 인간이냐? 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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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로 돌아와 최동일에게 빼앗은 아이템을 처분했다. 스티그마 야수의 움직임은 10년, 밤에 우는 하얀 여우는 30년이었다.
하얀 여우는 다시 집어넣고 야수의 본능만 팔았다. 그리고 쓸모없는 고블린 족장 포키에서 얻은 무식한 돌격도 1년에 팔았다. 잡템까지 모두 처분하자 17년 145일 10시간 20분 01초가 나왔다.
127:270:04:00:15
유정이 입을 겉옷과 속옷, 양말 등을 사고, 빛바랜 검은 후드 로드도 한 벌 추가로 구매해 입혔다.
바로 옆 식료품 가게에 들러 최동일에게 빼앗은 마법 배낭에 각종 양념과 빵, 햄, 치즈 등을 가득 채웠다.
“밤에 우는 하얀 여우는 키우지 말고 필요할 때 소환해서 몸빵으로 사용해.”
“네!”
“팔 내밀어.”
유정의 왼손을 잡고 30일을 넘겨줬다. 최동일과 전강수에서 빼앗은 시간과 상점에 잡템을 처분한 시간까지 합하면 118년이나 돼 더 많은 시간을 줘도 됐지만, 아직 믿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서 30일만 줬다.
몸과 마음을 모두 가져 진짜 내 사람이 되기 전까진 소소한 도움만 줄뿐 큰 도움을 줄 생각은 없었다.
유정이 착하고 활달하고 심지가 굳고 배려심이 깊어도 내 사람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었다.
도성 문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이씨와 해씨 둘밖에 없다고 했다. 자신을 이롭게 하는 이로울 이(利)씨와 자신을 해롭게 하는 해로울 해(害)씨 둘만 세상에 있다는 말이었다.
지극히 편협한 생각이었지만, 판게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오직 두 부류의 사람만 있어야 했다. 모호한 관계만큼 위험한 관계는 없었다.
“펜리르!“
“우와! 이게 뭐예요? 혹시 소환수에요?”
“응.”
“정말 멋지네요!”
“마음에 들어?”
“네. 짱이에요.”
“타.”
“감사합니다.”
스티그마 괴물 늑대 펜리르(100/1,000) : 크기 5m, 화염 브레스
100년을 투자하자 펜리르의 크기가 5m로 커졌다. 펜리르는 최대 크기가 10m로 500년을 투자하면 10m까지 자란다.
이때부터는 시간을 투자해도 크기 변화는 없었다. 대신 화염 브레스, 이동속도, 방어력, 공격력 등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하얀 여우도 이렇게 키울 수 있나요?”
“최대 5m까지 자라지만, 투자한 시간에 비해 도움이 안 되는 소환수야. 나중에 더 좋은 소환수 구하면 그때 투자해.”
“알았어요. 그런데 오빠는 저랑 같은 날 도착했는데, 참 많은 걸 알고 계시네요. 그러고 보니 기차에서 잠시 대화한 후 오늘 처음 보네요.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
“운 좋게 아는 사람을 만나 계속 사냥터에 있었어.”
“아~ 그러셨구나.”
“꽉 잡아. 달린다.”
“네!”
말이 길어지면 곤궁해질 수 있어 다급히 펜리르를 출발시켰다. 이스트 성에서 가시덩굴 숲 천 년 묵은 가시나무 던전까지 가는데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100년을 투자하자 속도가 2배로 빨라져 하늘을 난다는 표현이 적당할 만큼 한번 땅을 찰 때마다 앞으로 쭉쭉 뻗어 나갔다.
‘오~ 뭉클뭉클한 감촉 너무 좋아! 이게 몇 년 만이야?’
펜리르가 질주하자 놀란 유정이 등을 꼭 끌어안고 가슴을 밀착했다. 글래머는 아니지만, 가슴은 빵빵해 등에 닿는 감촉이 예술이었다.
‘여자 가슴을 만져본 지가 언제였지? 군대 휴가 나와서 술 먹고 미아리에 간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30년은 됐네. 이러면 모태솔로 아니야?’
등에서 느껴지는 몽실몽실한 유방의 감촉 외에도 엉덩이에서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펜리르의 부드러운 털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바닥이 아닌 꼬리뼈 부분이 뜨거워 그곳이 내가 생각하는 그곳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미치겠네. 벌써 이러면 어쩌라는 거야? 적어도 사십구재는 지나야 하잖아. 젠장! 환장하겠네.’
사십구재는 죽은 후 다음 생이 결정될 때까지 걸리는 기간으로 아주머니의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가실 때까지 기다려드리는 게 최소한의 예의였다.
이것 역시 형식이라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유정이의 상처가 낫지 않은 상태에서 고추를 들이미는 건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그렇게라도 핑계를 대며 끓어오르는 욕망을 이겨내야 했다. 사랑의 여부를 떠나 상대가 원치 않는 관계를 맺는 건 강간이었다.
수많은 여자를 품에 안고 싶었지만, 강제로 탐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건 더러운 욕망으로 정액이 빠져나갈 때 느끼는 쾌감보다 천 배는 더 비참함을 느끼게 되는 짓이었다.
‘과부가 밤마다 바늘로 자기 허벅지를 찌르는지 이젠 알 것 같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을 수가 없네. 그렇게라도 해야 욕정을 참아낼 수 있는 거야. 아이고~ 나 죽네.’
사람 마음은 참으로 오묘했다. 여자가 없을 때는 성욕을 느끼지 못했는데, 여자가 옆에 있자 미칠 것 같았다.
암내를 풍기는 것도, 섹시한 포즈를 취한 것도, 끈적끈적한 유혹의 눈빛을 보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불을 질렀다.
‘야이 새끼야~ 왜 이렇게 빨리 달리고 지랄이야. 솥에 넣고 삶을까?’
바람처럼 달린 펜리르의 무식한(?) 행동에 30분도 안 돼 유정의 풍만한 가슴과 따뜻한 음부가 떨어지자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무심한 펜리르는 내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옆에 서서 몬스터가 다가오는지 두리번거리며 주위만 살폈다.
“이거 받아.”
“헉!”
레어 아이템 3개를 내밀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유정이 내 눈을 멀뚱멀뚱 쳐다봤다.
과거 유니크와 레전드 아이템으로 도배했던 내가 보기에 매직과 레어 아이템은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녹슨 철검 한 자루 살 능력이 없는 유정이가 보기엔 인세에 다시없을 보물이었다.
“이렇게 좋은 걸 제가 써도 되나요?”
“처음이라 그렇게 보이는 거지 좋은 거 아니야. 이것보다 좋은 거 끝도 없이 많아.”
“정말요?”
“지금 들어가는 천 년 묵은 가시나무 던전에서 첫 번째 보스를 잡으면 유니크 아이템을 줘. 유니크 아이템 하나만 해도 이것들 전부 합친 것보다 스탯이 더 높아.”
“우와!”
“72마신과 영웅·신화급 몬스터를 잡으면 나오는 레전드 아이템은 유니크에는 없는 옵션도 하나씩 붙어있어.”
“녹슨 철검 한 자루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우물 안 개구리였네요.”
“다들 처음에는 그래.”
“근데... 오빠 친구는 판게아에 언제 들어오셨어요?”
“왜?”
“아는 게 정말 많아서요.”
“처.처.첫 번째 들어왔어.”
“아~ 그렇군요. 역시 첫 번째 들어오신 분들이 아는 게 정말 많네요. 그런데 친구분은 어디 계세요?”
“주.주.죽었어.”
“괜한 걸 물었네요. 상심이 크실 텐데... 죄송해요.”
“아.아.아니야. 괴.괴.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