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9 심유정 =========================================================================
9. 심유정
이방인을 빼고 주민만 5만 명 이상 거주하는 이스트 성은 가로세로 길이가 3km로 4개 구역으로 나뉘었다.
가운데 광장을 중심으로 북서쪽은 왕궁과 고위 귀족들의 집이 있었고, 북동쪽은 상점과 여관이 밀집했다.
남서쪽은 이스트 성 주민들이 사는 주택가가 몰려 있었고, 남동쪽은 공방과 대장간, 경비대 본부와 숙소가 있었다.
이방인이 계속 늘어나자 이스트 성주 피타스는 성벽 근처 공터를 이방인이 머물 숙소로 제공하고 천막도 지원했다.
남동쪽은 한국, 남서쪽은 중국, 북동쪽은 일본 그리고 동남아 사람들은 한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 사이에 머물 장소를 마련해줬다.
그러나 상수도 시설은 우물 1개가 전부였고, 취사장, 세면장, 화장실 등 편의시설도 없어 아프리카 난민 수용소보다 더욱 열악했다.
돈(시간)이 많으면 편안한 여관에 머물 수도 있었고, 근사한 집을 구매해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허름한 주택 한 채 가격이 100년이 넘어 달랑 1년밖에 없는 가난한 이방인들에게 자기 집 마련은 꿈같은 일이었다.
‘서울이나 판게아나 돈 없는 놈은 지지리 궁상이야. 어휴~’
“아저씨! 저 기억 안 나세요?”
“누구신지...”
“기차에서 아저씨 옆에 앉았던 사람입니다.”
“기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어서 누가 옆에 앉았는지 기억에 없네요. 죄송합니다.”
“아 맞다. 많이 피곤하신지 제가 자리에 앉는 것도 못 보고 계속 주무셨죠.”
“그런데 무슨 일로...”
유정이의 안부를 알기 위해 말을 건 남자는 한 달 전 부산행 KTX 열차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대머리 아저씨였다.
착륙(?)하며 머리를 심하게 다쳤는지 머리에 더러운 헝겊을 칭칭 감고 있어 60대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사는 게 쉽지 않은 지 불룩했던 배는 홀쭉해졌고, 남은 머리카락도 모두 빠져 완전한 대머리로 변해있었다.
이런 모습은 대머리 아저씨만 그런 게 아니었다. 배가 고파 천막에 누워 있는 사람, 멍한 눈으로 땅바닥만 쳐다보는 사람,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우물물을 들이켜는 아이들까지 모두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옆에 탔던 유정이와 유정이 어머니 기억하십니까?”
“네 압니다. 그런데 모녀는 무슨 일로 찾으시는지...”
“유정이에게 주기로 한 게 있는데, 보이질 않아서 그럽니다.”
“그래요?”
대머리 아저씨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힐끔힐끔 쳐다봤다. 팔뚝을 옷으로 가려 시간이 보이지 않았지만, 보지 않아도 초췌한 모습만으로 시간을 뺏겨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판게아에 온 사람 중 절반 이상은 몬스터가 아닌 같은 사람에게 죽었다. 위험한 몬스터에게 더 많이 죽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사람에게 맞아 죽고, 시간을 빼앗겨 죽는 일이 더 많았다.
해외에서 동포를 만나면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그러나 마냥 반가워해서는 안 된다. 사기도 아는 사람이 친다고 동포라고 믿었다간 알거지가 될 수 있었다.
판게아도 마찬가지로 같은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뭉쳐야 산다고 떠들지만, 속은 모두 제각각으로 서로 이용해 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나 역시 몇 번 그런 일을 당한 후론 몬스터보다 사람을 더 경계했다. 대머리 아저씨가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옆에 앉았던 것도 인연인데, 이거 드십시오.”
“헉!”
딱딱한 빵 두 개를 내밀자 대머리 아저씨의 눈이 황소만 하게 커졌다. 한 달 넘게 생활하며 빼앗는 사람만 있었지 무언가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사람이 가장 참기 힘든 건 고독이 아니라 배고픔이었다. 며칠 굶으면 성인군자도 남의 것을 훔쳐 먹을 만큼 배고픔은 이성을 잃게 했다.
대머리 아저씨도 며칠 굶었는지 빵을 보자 침을 뚝뚝 흘렸다. 그래도 마지막 경계심이 남아 머뭇거리며 빵을 잡지 못했다.
손에 쥐여주자 그제야 고개를 돌려 보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 후 재빨리 품속에 빵을 감췄다.
“유정이하고 제가 친해서 찾는 겁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빵까지 주시는 분인데 당연히 그렇겠죠.”
달랑 빵 두 개에 사람이 순식간에 변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며칠 굶으면 빵이 아니라 씹던 껌에도 양심을 팔게 된다.
“혹시... 죽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아닙니다. 멀쩡히 살아 있습니다.”
대머리 아저씨의 말투에서 유정이 살아있다는 걸 짐작했다. 죽었다면 이렇게 질질 끌 이유가 없었다.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1시간 전에 삼인회를 따라 남문으로 갔습니다.”
“삼인회요? 그게 뭡니까?”
“최동일님이 만든 모임으로 사냥을 도와준다고 유정 엄마와 유정이를 데리고 갔습니다.”
삼인회는 최동일과 전강수, 박종진 세 놈이 주축이 되어 만든 길드로 나처럼 어수룩한 사람들을 끌어들여 이용하고, 유정처럼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갈취하는 폭력조직이었다.
삼인회, 사각 머리를 빼고도 30개가 넘는 폭력조직이 활동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대한민국 국민을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떠들었지만, 실상은 사람들을 갈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때는 놈들이 길드를 결성하지 않았는데. 나 때문에 미래가 변한 건가? 아니면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나와 이도균이 최동일 패거리와 함께한 3개월 동안 다른 사람을 받아들인 적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기론 대놓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시간을 빼앗진 않았었다. 하지만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는 게 나와 도균을 남겨두고 자기들끼리 돌아다닌 일이 아주 빈번했다.
놈들이 나쁜 짓을 하고 다녀도 나와 도균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나도 놈들과 같은 패거리로 생각해 내 앞에선 놈들을 욕하지 않았고, 언제나 슬금슬금 피해 다녔다.
나는 그게 경계심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놈들이 사람들을 괴롭혀서 그런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대머리 아저씨께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급히 남문 밖으로 나가 유정이와 최동일이 조직한 삼인회를 찾았다.
‘유정이를 찾는 건 기차에서 말 붙인 인연 때문이지 다른 뜻은 전혀~ 없어. 지난번에 너무 허망하게 죽어 불쌍해서 쪼~금 도와주려는 거야.’
‘모녀를 찾으면 먹을 것을 조금 나눠주고 마을까지 바래다준 후 북쪽 가시덩굴 숲의 천 년 묵은 가시나무 던전으로 곧장 갈 거야.’
‘절대 예쁘고 몸매 좋고 사랑스럽고 내게 따뜻한 말을 해줘서 도와주는 거 아니야. 그리고 어떻게 해보겠다는 마음도 없어. 하늘에 맹세할 수 있어. 진짜야~’
성문 밖은 평원으로 나무만 듬성듬성 있어 사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야가 탁 트여 사냥하기 가장 좋은 장소였지만, 뿔 토끼와 거대 말잠자리만 있어 시간을 얻기엔 매우 부족했다.
평원을 벗어나면 낮은 언덕이 쭉 이어지며 나무가 많아졌고, 계속 가면 울창한 숲, 산, 암석지대, 바위산, 사막, 얼음동굴 등 다양한 지형이 나왔다.
지형이 험할수록 강력한 몬스터가 있어 몇 마리만 잡아도 많은 시간을 벌 수 있지만, 위험도 그만큼 커져 잡을 수 있는 실력이 확실하지 않으면 절대 다가가선 안 됐다.
“엄마를 살려주세요. 엄마를 살려주시면 시키는 일은 무슨 일이든 다 할게요. 제발 살려주세요. 흑흑흑~”
“배와 등에 구멍이 뚫렸는데, 무슨 재주로 살려?”
“포션을 갖고 계시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거면 살릴 수 있잖아요?”
“상처가 깊어 최하급 포션으론 살릴 수도 없지만, 살릴 수 있다고 해도 살려줄 생각도 없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늙은 년에게 생명줄과 같은 귀한 포션을 사용할 순 없지. 안 그래?”
“당연하지. 하루빨리 죽어야 할 늙은 할망구에게 포션을 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볼 때마다 구역질이 나서 미치겠는데, 누구 좋으라고 포션을 써. 미쳤어?”
“늙은 할망구 보면 나만 속이 뒤집히는 줄 알았는데, 강수 너도 그랬구나. 역시 사람 보는 눈은 한 치도 다른 게 없어. 그렇지?”
“당근이지. 흐흐흐흐~”
언덕이 끝나고 울창한 숲이 시작되는 부분에 유정이의 엄마가 가슴과 등, 다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그 옆에는 사경을 헤매는 엄마를 구하기 위해 유정이 무릎을 꿇은 채 최동일의 다리를 붙잡고 엄마를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동일, 전강수, 박종진은 유정의 엄마를 늙은 년이라고 욕하며 비웃기만 할 뿐 살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얘기 들었지? 살려주자는 사람이 아무도 없네.”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요. 원한다면 죽을 때까지 세 분의 몸종으로 살게요. 그러니 엄마를 살려주세요.”
“넌 이제 우리 거야. 그동안 미친 할망구가 난리를 쳐 그냥 놔둔 것뿐이지 판게아에 도착하는 순간 찍었어. 이제 늙은 할망구도 사라져 너를 데리고 논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어.”
“네?”
“무슨 뜻인지 몰라? 너는 이제 우리 공동 소유라고. 공동 창녀이자 정액 배출구라고. 흐흐흐흐~”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저는 그런 여자 아니에요.”
“미친년! 창녀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창녀인 줄 알아? 세상에 그런 여자는 없어. 세상 풍파에 휩쓸려 살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된 거야. 너도 지금은 잠시 힘들겠지만, 며칠 지나면 익숙해질 거야.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다 적응하며 살게 돼 있어. 또 모르지. 타고난 색녀라서 하루도 지나지 않아 내 보물을 종일 입에 물고 있을지. 크크크크~”
최동일의 말에 겁에 질린 유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뒤에는 전강수가 있었고, 오른쪽에는 박종진, 왼쪽에는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엄마가 있어 도망칠 곳이 없었다.
“동일아! 사람도 없는데 여기서 일단 맛 좀 보자. 나 꼴려서 못 참겠다.”
“나도 그래! 터질 것처럼 아파. 일단 여기서 몇 판 뛰고 아지트까지 데려가서 밤새워 놀자.”
“여기는 몬스터가 나오는 곳이라 위험한데...
“한 명이 망보고 둘이서 먹으면 되잖아.”
“강수 말처럼 하면 문제없어. 여기 나오는 몹이 버섯돌이와 긴꼬리원숭이가 전부야. 그런 놈들은 혼자서도 몇 마리 문제없잖아.”
“흐음... 알았어.”
최동일과 전강수, 박종진이 자신을 겁탈하겠다는 말을 쏟아내자 엄청난 충격에 정신이 나간 유정이 엉덩이를 바닥에 깔고 앉아 죽어가는 엄마를 멍하니 바라봤다.
평생 아빠·엄마의 보살핌 속에 밝고 건강하게 자란 유정에게 판게아의 생활은 1분 1초가 지옥이었다.
하루에 한 끼도 해결하기 힘들어 배는 등에 달라붙어 있었고, 씻을 수도 없고, 갈아입을 옷도 없고, 편하게 잘 집도 없었다.
주변에는 음흉한 눈으로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들만 가득해, 마음 놓고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쾌활한 성격의 유정은 이해심이 많고 항상 밝아 친구도 많았고, 학교 선생님들의 사랑도 독차지했다.
그러나 밝은 성격도 매일 사람이 죽고, 시체가 쓰레기처럼 방치되는 판게아에선 모습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연륜 높은 어른도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해 자살하는 일이 속출했다. 그런 힘든 환경 속에 19살 소녀가 지금껏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것도 엄마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엄마가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유정이 약해서가 아니라 19살 소녀가 감당하기에 판게아의 환경은 너무도 지독했다.
“나부터 한다.”
“무슨 소리야? 그저께 너부터 했잖아. 오늘은 내 차례야.”
“그년 아다 아니었어. 겉만 청순해 보였지 속은 쌩 양아치였어. 경험이 얼마나 많은지 밑은 시커멓고 가슴은 축 처진 게 사단 병력은 지나간 것 같더라. 헐렁헐렁해서 기분도 안 났어. 너도 안아봐서 알잖아.”
“자업자득이야. 네가 선택했으니 어쩔 수 없어.”
“그래도 이건 아니지. 진짜 아다하고 걸레하고 어떻게 같아.”
“억지 부리지 마. 순서대로 가는 거야. 동일아! 오늘 나 맞지?”
“맞아. 오늘은 종진이 차례야.”
“아다에 졸라 귀여운 년을 나부터 먹다니. 이게 웬 횡재냐. 흐흐흐흐~”
벌레 씹은 표정의 전강수를 박종진이 놀리며 유정에게 다가갔다. 정신이 나간 유정은 박종진이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려도 멍한 눈으로 죽어가는 엄마만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