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08 투탕카멘(Tutankhamen) (8/68)

00008  투탕카멘(Tutankhamen)  =========================================================================

                        

8.

판게아와 지구는 사는 모습은 달라도 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갖는 건 같았다. 하지만 지구는 법과 도덕이 있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질서가 잡힌 나라는 함부로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고 죽이지 못했다.

그러나 판게아는 법과 질서가 없어 지나가다 살짝 스쳤다는 이유만으로도 다음 날 싸늘한 시체로 발견됐다.

이런 세상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오직 힘밖에 없었다. 무기와 방어구, 액세서리, 스티그마, 강화석은 힘과 직결되는 아이템으로 가족에게도 양보할 수 없었다.

하물며 같은 국가, 같은 길드라는 이유로 강화석을 드롭하는 투탕카멘을 양보한다면 그건 대인이 아니라 바보였다.   

아이템은 일반, 매직, 레어, 유니크, 레전드 다섯 등급으로 나뉜다. 내가 지금껏 획득한 ‘빛나는’이란 문구가 붙은 아이템이 유니크 등급으로 이것만 해도 스탯을 100이나 올려줬다.   

유니크 아이템을 강화하면 2.5년에 해당하는 스탯 30이 증가했다. 더군다나 다음번 강화는 향상된 수치도 포함돼 강화 횟수가 많아질수록 스탯 증가 수치도 급격히 증가했다. 

투탕카멘이 강화석을 준다는 것을 알자 한 달 동안 놈을 잡았다. 파라오와 여왕, 투탕카멘은 피라미드 던전의 보스 몬스터로 3일마다 리스폰(Respawn)해 첫날을 제외하고 총 30마리를 잡았다. 

‘역시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 어휴~’

투탕카멘의 웅장한 독사 지팡이 : 운+5 지력+25

파라오의 신기한 가죽 벨트 : 운+10 지력+20 

파라오의 튼튼한 가죽 신발 : 민첩+20 지력+10

강화석 - 1개

하급 포션 - 3개

한 달 동안 하루에 4시간만 자고 죽도록 사냥한 결과 레어 아이템 3개와 고급 아이템 15개, 일반 아이템 68개, 하급 포션 3개을 얻었고, 기대했던 강화석은 달랑 한 개가 전부였다. 

잡을 때마다 줄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열 번 잡고 달랑 한 개는 해도 너무했다. 그러나 30일에 한 개면 1년이면 12개로 적다고 할 수도 없었다.

문제는 피라미드 던전에만 계속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을 더 많이 주는 강한 던전으로 옮겨야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강화석이 아까워 피라미드 던전을 떠나지 못하면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결국 잡히고 만다. 

‘아깝지만, 남들이 선점하기 전에 다른 던전을 차지해 유니크 아이템과 최초 보스 사냥 혜택을 먹는 게 이익이야. 강화석 하나만 믿고 있다간 이마저도 뺏기게 될 거야.’

‘그리고 귀한 강화석을 유니크 아이템에 사용할 순 없어. 레전드 아이템에 사용해야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어 당분간은 있어도 없는 것과 같아.’

72마신과 영웅·신화급 보스 몬스터를 잡아야 얻을 수 있는 레전드 아이템은 스탯이 200이나 됐고, 특수 옵션도 한 가지 붙었다.

스킬, 능력치 향상, 상태 이상 효과 등 다양한 옵션이 붙은 판게아 최고의 아이템으로 20년간 활동하며 이보다 좋은 아이템은 본 적이 없었다.  

강화석을 두 개밖에 구하지 못했지만, 펜리르 덕분에 사냥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져 시간을 3년 6개월이나 모았다. 

소환수는 잠을 자지 않았고, 음식도 먹지 않았고, 볼일을 보지도 않았다. 대신 소환자의 체력을 꾸준히 소모해 소환수를 거느린 사람은 체력 스탯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고, 음식도 남들보다 몇 배는 섭취해야 했다. 

이런 페널티가 있었지만, 소환수가 있으면 사냥 속도가 몇 배 빨라져 많은 사람이 소환수를 갖고 싶어 했다. 

그러나 소환수 스티그마는 드롭율이 가장 낮은 아이템으로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 달 넘게 피라리미드 던전에서 보스만 30번을 잡았지만, 최초 사냥 때 준 스티그마를 빼면 포키를 잡고 얻은 차징 스티그마가 전부였다.

스티그마 드롭율은 장비 아이템 드롭율의 10분의 1밖에 안 됐고, 소환수 스티그마는 확률이 또다시 10분의 1 이하로 떨어져 1,000명 중 1명만이 소환수를 가졌다.

나 역시 20년을 판게아에서 활동하고도 몬스터를 사냥하고 소환수 스티그마를 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본 놈을 족쳐 소환수 스티그마를 뺏은 적은 있지만, 뿔 토끼를 소환하는 최악의 스티그마로 악담을 퍼부으며 상점에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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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리르를 타고 사막과 숲을 바람처럼 달려 넓은 초원 중앙에 자리 잡은 이스트 성으로 돌아왔다. 

펜리르의 던전을 돌아 피라미드 던전까지 갈 때는 하루가 넘게 걸렸지만, 올 때는 1시간 만에 돌아왔다.

아직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 머리에서 몸통까지 길이가 2m에 불과했지만, 씨는 속일 수 없다고 나를 등에 태우고도 바람처럼 달렸다.

이스트 성 근처에서 펜리르를 스티그마로 돌려보낸 후 낡은 회색 후드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잡화점으로 직행했다.

지난번 쫓아온 놈들이 있는지 목을 길게 빼고 둘러봤지만, 고등학생들을 괴롭히러 갔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지 보이질 않았다.

‘4차가 XX고등학교였나? 내가 온 이후론 신경 쓰지 않아 가물가물하네.’

판게아로 온 지 오늘로 38일째로 예전과 달라진 게 없다면 8일 전 천안 독립기념관에 견학 갔다 돌아오던 XX고등학교 학생 348명이 판게아로 넘어왔을 것이다.

XX고등학교 2학년 학생 전원과 인솔교사, 운전사 등을 태운 버스 9대가 고속도로 위에 생긴 차원의 틈에 빨려들어 판게아로 넘어왔다.

버스는 기차와 비행기, 열차, 전철보다 크기가 작아 떨어질 때 충격이 덜해 사망자가 58명에 불과했다.

일주일 후 중상자 23명이 죽었지만, 나머지는 찰과상과 타박상 정도로 지금까지 판게아에 넘어온 그룹 중 피해가 가장 적었다.   

‘여학생들 집에 보내달라고 일주일 내내 울어대 엄청나게 시끄러웠는데.’

XX고등학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 남녀 공학으로 여학생이 많아서 그런지 우는 소리로 엄청나게 컸다. 

나이 어린 학생들이 부모와 외딴곳에 떨어져 무서워 그런 건 이해했지만, 일주일 내내 곡을 하듯 우는 학생도 있어 천막촌의 분위기를 더욱 암울하게 몰아갔다.

진짜 문제는 철없는 남학생들이었다. 자신만 강해지면 된다는 생각에 약한 친구들의 시간을 빼앗아 죽이고, 법이 없는 곳이란 걸 악용해 여학생들을 집단으로 강간하는 등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인솔교사들이 학생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평소 덕망을 쌓지 못한 교사 말을 들을 학생은 없었다.

예전에 하던 못된 버릇대로 큰소리를 치다가 학생들에게 끌려가 죽는 일까지 발생했다. 

일주일 후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빠진 XX고등학교는 서로 편을 나눠 싸우고 죽이는 등 난장판의 끝을 보여줬다. 

놈들은 판게아를 게임 속 세상으로 착각해 사람을 죽이는데 거리낌이 없었고, 작은 힘을 얻자 폭력성이 더욱 표출돼 피의 광기에 젖었다. 

한 달 후 광기가 사라졌을 땐 XX고등학교 학생은 50명도 남지 않았고, 그마저도 반쯤 얼이 빠져 3개월 후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학생들의 폭주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폭주한 고등학생에게 말을 붙였다간 칼침 맞을 수도 있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1차·2차로 들어와 힘을 얻은 놈들은 학생들의 혼란을 조장해 이득을 취하는 등 피해를 키우는데 일조했다.   

이를 계기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길드를 결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많은 길드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러나 모두 자기들 이익만 앞세운 양아치들로 혼란이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심해져 힘없는 사람들의 피해는 점점 커져만 갔다.

10개월 후 대형 길드인 영웅과 환인, 고구려가 생기고 두 달 후 대한제국까지 가세하며 안정을 찾았지만, 이들도 말만 번지르르했지 행동은 다를 것이 없어 피해는 줄어들지 않았다. 

좌우를 둘러본 후 보는 사람이 없자 재빨리 잡화점으로 들어가 마법 배낭을 가득 채운 잡템을 탁자 위에 쏟아냈다. 

무기와 방패를 사람들에게 팔면 상점보다 최소 2배는 더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돼 귀찮은 벌레가 꼬였다. 

물건을 달라, 시간을 달라, 먹을 것을 달라, 자기들과 함께하자, 키워 달라 등등 귀찮은 일이 끊이지 않았다.

파티 사냥은 몬스터를 더 많이 잡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시간 분배와 아이템 분배, 사냥 시간 맞추기 등등 골치 아픈 일이 무척 많았다.

2~3명 정도면 그래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이것도 마음이 잘 맞아야지 이상한 놈이 꼬이면 혼자 사냥하는 것만 못했다.

지난번에 이런 일을 수없이 당해 이번에는 나를 100% 믿고 따르는 사람이 아니면 파티에 끼워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시키는 대로 따르는 확실한 부하가 아니면 소환수를 한 마리 더 키우는 게 이익이야. 소환수는 아이템 분배 다툴 일 없잖아.’

물건을 파는 일도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었다. 10년 후 경매장이 생기기 전까지 좌판을 열어 직접 팔아야 했다.

매직 이상은 값이 짭짤해 상점보다는 이익이었지만, 양아치들이 가만두고 보질 않았다.

그리고 1년은 지나야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재력이 생겨 지금은 돗자리를 깔아도 팔 수 없다. 아까웠지만, 가지고 다닐 수도 없어 레어 아이템 이하는 모두 상점에 팔았다.

“10년 247일 2시간 7분입니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충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019:150:14:18:38

빛바랜 검은색 후드 로브 한 벌을 추가로 사 바꿔 입고 잡화점을 나와 바로 옆 식료품 가게에 들어가 각종 양념과 햄, 치즈, 빵 등을 사고 북쪽 가시덩굴 숲으로 가기 위해 북문으로 이동했다.

‘유정이가 아직 살아 있을까? 한 달쯤 돼서 죽었다고 했으니까 날짜를 보면 이미 죽은 게 확실한데... 아니야! 내가 본 것도 아니고, 나도 사냥 갔다가 와서 들은 거니까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어.’

유정이와 유정이 엄마가 죽는 걸 내 눈으로 본 건 아니었다. 사람들의 말을 듣고 뿔 토끼를 잡다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어떻게 할까?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이라도 해볼까?‘

유정이가 살아 있는지, 살아 있다면 어떻게 지내는지 많이 궁금했다. 피라미드 던전에 있던 한 달 동안 하루에 서너 번은 유정이 얼굴이 떠올랐다.

귀엽고 예쁘다는 것과 기차에서 잠시 말을 나눈 것을 빼면 유정과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엄마 이후 처음으로 나를 걱정해준 여자가 유정이었다. 내가 여자에게 바란 건 많지 않았다. 따뜻한 말 한마디, 따뜻한 눈빛 한 번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엄마를 빼곤 어떤 년도 내게 그런 눈빛을 보여주지 않았고, 따뜻한 말조차 걸어주지도 않았다.

유정이도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서 한 말은 아니란 걸 알았다. 그래도 회사 여직원들의 조롱 하듯 날리는 립서비스보다는 유정이의 말이 백 배 더 따뜻했다.    

사람은 자기를 인정해준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했다. 나는 그럴 그릇도 안 됐고,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적어도 내게 따뜻한 말을 건넨 유정이에게 고마움은 표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 생은 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끝내 한 달을 채우고 피라미드 던전을 나왔다.

타임슬립전 유정이가 죽던 날 나는 북쪽 가시덩굴 숲 입구에서 버섯돌이를 잡고 있었다. 

연령대가 비슷한 남자 5명과 의기투합해 팀을 꾸렸고, 서로 도우며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을 때였다.  

최동일, 전강수, 박종진 세 놈이 짜고 의도적으로 접근해 나와 나만큼 멍청한 도균을 등쳐먹은 것을 알고 3개월 만에 결별했지만, 그때는 정말 죽은 친구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친했었다.

판게아에 온 사람 중 절반은 친구, 연인, 회사 동료, 가족과 함께였다. 배와 비행기, 열차는 일보다는 여행을 목적으로 타고 다녀 아는 사람이 함께 끌려온 경우가 많았고, 전철은 일 때문에 타는 사람이 많아 대부분 혼자였다.

낯선 곳에 떨어져 가장 힘든 것은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었다. 온통 모르는 사람 속에 혼자 떨어지면 말이 많은 사람도 말을 잃게 된다.

더욱이 말주변이 없던 나는 구석에 처박혀 사람들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호구로 생각한 세 놈이 친한 척 접근했고, 놈들의 감언이설을 진심으로 믿고 바보처럼 실컷 이용당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마냥 이용만 당한 건 아니었다. 놈들이 나와 도균을 몸빵으로 사용하고, 막타로 시간까지 대부분을 가져갔지만, 몬스터를 상대할 방법을 배운 것만 해도 20년간 살아남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그러고 그때의 일을 교훈 삼아 남을 100% 믿지 않아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래! 따뜻한 말까지 붙여줬는데, 살았으면 먹을 거라도 좀 주고, 죽었다면 시체라도 묻어주자. 그게 사람도리지.’

어쭙잖은 핑계를 대고 한국 사람들이 몰려 있는 남동쪽 공터 코리아타운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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