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계속 반복해서 들려오던 음악소리가 끝나고 음성메시지로 넘어간다는 안내음이 들려왔고 난 핸드폰을 끊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왜?”
“전화를 안 받네. 바쁜가 본데.”
“아. 핸드폰을 왜 안 받냐!?”
“바쁜가 봐.”
“참나. 그런데 태규야.”
“.응?”
“그 핸드폰 말이야. 이렇게 막 들고 다녀도 되는 거야? 일부러 차에 놔두고 다녔잖아.”
“오늘은 상관없어. 핸드폰에 설치된 건 복제 폰하고 연결 된 장치거든. 어차피 오늘 술 한 잔 하는 게 문제 될 게 없으니까.”
“그러다가. 우리 대화라도 그 새끼가 들으면?”
“통화 내용하고 위치, 그리고 문자나 카톡 같은 건 다 볼 수 있지만. 녹음기를 틀어놓지 않는 이상은 우리 대화는 못 들어. 그게 복제 폰의 특징이라고 하더라.”
“그럼 차 안에는?”
“차엔 위치추적기랑 도청기로 밖에서 다 들을 수 있다고 하더라.”
“와. 무섭다. 혹시 집에도 설치 해 놓은 거 아니야?”
“집은 확인해 봤는데 깨끗하더라. 다만.”
“다만 뭐?”
“신이 핸드폰이 문제더라고. 몰카 탐지기라고 그때 보여준 거 있잖아. 그걸로 신이 잘 때 몰래 집안 구석구석까지 다 뒤져봤는데. 신이 핸드폰하고. 가방에서 요란하게 신호를 울리더라고. 가방에도 녹음기가 달려 있었고, 신이가 핸드폰을 잘 모르잖아. 신이 핸드폰에도 나랑 똑같은 장치가 되어있었고,, 거기에 실시간으로 대화 내용을 도청할 수 있는 기능까지 추가로 설치 한 거 같더라.”
“와 그 새끼 진짜 무섭네.”
[따르르릉 따르르릉]
“쉿!. 미지씨다. 여보세요.”
[네. 전화 하셨어요?.]
“네.”
[왜요?]
“네?. 그냥. 그때 일도 그렇고. 사과의 의미로 지금 그 때 그 직원과 같이 있는데 같이 술이나 한 잔 할까 해서요.”
[술이요? 지금요?]
“.네.”
[. 잠시 만요.]
“아. 바쁘시면 굳이 나오실 필요는 없어요.”
[아니에요. 어차피 지금 짜증나서 집에 갈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집이요? 그럼 밖.이신가 봐요?”
[잠깐만요.]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잔잔한 음악소리로 박미지가 밖인 건 알겠는데. 왠지 모를 낯설지 않은 음악소리에 더 귀가 간다. 어디서 들었던 음악소린데. 귓가에 맴돌기만 할 뿐 선뜻 떠오르질 않는 기억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머리도 같이 굴리게 되는데.
[지금 어디세요?]
“여기 OO동 세븐업호프요.”
[OO동이면 한 30분정도 걸릴 거 같은데. 괜찮아요?]
“네. 기다리죠 뭐.”
[알았어요.]
“온데?”
“응. 30분정도 걸린다는데. 밖인 거 같더라.”
“오 야야. 마시자. 미지씨 오면 여기서 놀지 말고 다른 데로 자리 옮겨야지. 미지씨 올 때쯤이면 벌써 8시다. 와. 궁상맞게 3시간이나 여기서 남자 둘이서 수다를 떨고 앉았냐.”
“참나.”
맥주를 마시며 현민이와 화요일 계획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던 난 생각보다 이른 20여분이 지난 8시쯤에 박미지를 보게 된다.
긴 하얀색 코트에 굵은 구멍이 뚫려 있는 망사스타킹. 거기에 에나멜의 반짝이는 하이힐처럼 생긴 샌들을 신고 온 미지의 모습에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휴. 저도 한 잔만. 꿀꺽꿀꺽”
오자마자 박미지는 자리에 앉으며 내 잔을 뺏어 시원하게 목부터 축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그때 잠깐 뵈었던. 고다구라고 합니다.”
현민이 놈이 가명을 대며 인사를 한다.
“캬. 아. 목말라 죽는 줄 알았네. 아! 안녕하세요.”
“어디서. 급하게 오셨나 봐요?”
“어디서 오긴요. 한상.”
박미지가 말을 하다 현민이를 보며 끝을 흐린다.
눈치가 빠른 현민이 한상이란 이름에 양복 상의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참나. 요즘 술집은 담배를 못 펴요. 하여튼 이놈의 금연정책이 뭔지. 전 담배 좀 피우고 올 테니까. 어디 도망가시면 안 됩니다!”
“.네?. 호호. 네.”
“크크크 야. 여기 화장실이 어디지?”
“저쪽.”
“땅께! 내 얘기 좀 잘 부탁해 진차장!”
“.”
“한상이 집에서 오셨다고요?”
“네. 그런데 거래처 어디 친구예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동양 직원이에요. 한상이가 오늘 부른 겁니까?”
“네. 참나. 어이가 없어서.”
“.네? 왜요?”
“기껏 불러놓고는. 사람 병신 만드는 것도 유분수지. 요즘 진짜 굿이라도 한 번 해야겠네요. 태규씨도 그렇고. 한상씨도 그렇고. 제가 그렇게 싸구려로 보여요?”
“네!? 아.아니요! 왜 미지씨가 싸구려에요! 절대 아닙니다. 그때 일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사과를 해야겠다고 계속 생각했는데. 시간이 여의치가 않아서 친구가 있는데도 전화를 한 건데요.”
“.혹시?”
“.네?”
“혹시 저 친구 분이란 남자하고?”
“무.뭘요?”
“하. 뭐야! 또 기분 상하려고 그러네.”
“왜요? 왜 기분이.”
“가뜩이나 존심 상해서 뛰쳐나온 여자한테. 하긴. 평소 제 행실이 개떡 같았으니 당연한 결과 같네요.”
“무슨 말을.”
뭔가가 잔뜩 짜증이 난 미지의 얼굴에 좀처럼 대응하기가 힘들다.
강한상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미지가 이렇게 짜증을 부릴 일이 과연 무엇일가.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 나로 인해 짜증과 화를 낼 강한상의 상대로 미지씨가 선택이 된 건 아닐지. 라는 생각 외에는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하다.
“한상이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혹시 무리하게.”
“네?”
“그러니까. 여러 남자들한테. 미지씨를 막. 괴롭히거나. 아니면.”
“그랬으면 이렇게 화라도 안 나죠! 아니. 거기서 나올 필요도 없었죠! 신나게 즐기다가 피곤해서 곯아떨어졌으면 떨어졌지. 사람을 불러놓고 혼자 술이나 마시라니. 신이씨만 노난거지 뭐.”
“신이가요? 신이가 왜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 토요일 아니에요? 한상씨는 여기 왜 혼자 있었어요?”
“.”
“원래대로라면 같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지금. 한상이 집에서 신이랑. 한상이만 있나요?”
“아니요.”
“.그럼요?”
“남자 둘이 더 있었어요. 참나. 난 또 파티 한다고 오라고 해서 갔더니 꿰다놓은 보리자루도 아니고.”
“그럼. 지금 남자 둘하고. 신이는요? 아니. 한상이가 부른 게 맞아요? 신이가 혼자 상대하고. 있다고요?”
“네! 왜 그래요?”
“.”
“태규씨가 없어서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한상이 분위기는요? 분위기가 어땠는데요?”
“분위기요? 그렇지 않아도 처음부터 짜증내고. 뭔가에 화가 잔뜩 난 사람처럼 보이던데. 사람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불러놓고 짜증부터 내는 걸 보고 덩달아 짜증이 나던데요. 신이씨도 무슨 잘 못을 했는지 오늘따라 기가 팍 죽어서. ”
“기가. 죽어요? 신이가요?”
“네에!”
“허. 신이씨가 혼자서.”
언제 돌아왔는지 현민이 놈이 앉아 우리 얘길 엿듣다가 자기도 모르게 한탄스럽다는 듯 얘길 한다.
“다구씨도 신이씨를 알아요?”
“네?. 하하. 몇 번 만나보긴 했죠.”
“아. 그럼 다구씨도 게임에 참석했던 사람이구나.”
“뭐.하하하하. 야!”
미지와 현민이 나누는 대화는 안중에도 없던 난 무의식중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된다. 지금 순간 느껴지는 불길함에.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철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강한상이 어떻게 비뚤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현실처럼 내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되자 몸이 먼저 움직이게 된다.
“어디가게!?”
“가.봐야지. 신이가.”
“야이 미친놈아! 가서 뭘 어떻게 하려고? 낮에 그런 일도 있었는데 지금 가서? 또 깽판이라도 놓게!? 그럼 우리 계획은 다 도루아미타불이야 새끼야!”
“.”
“우선 진정하고. 각오 했던 일이잖아! 너도 그 모임이란 곳에 신이랑 같이 놀았으면서 왜 그래!?”
“그거랑 이게 같냐! 더군다나 지금 한상이 새끼는.”
“한상이가 뭐!? 정신 차려 이 친구야!”
“.”
“낮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니. 그것보다 계획이란 건 뭐에요?”
“그게.”
“미지씨. 사실 이 친구가 진짜로 게임에 이기고 싶어 하거든요. 계획이라고 해봐야 신이를 우리가 더 뿅 가게 만들자는 건데. 미지씨가 좀 도와주세요.”
“뿅 가게 만들어요? 아. 그럼 다구씨도 이 게임에 연관이 있는 게 맞네요?”
“하하. 비밀이죠. 한상이도 모르는 조력자라고 해 두죠.”
“오 이거 스릴있네.”
“하하하. 그러니까요. 그럼 지금 신이씨가. 한상이 놈들한테 농락을 당하고 있다는 거죠? 어떻게요?”
“어떻게라뇨”
“자세히 알아야 신이씨를 더 뿅 가게 만들 수 있잖아요. 강한상 그 친구가 워낙 대단한 친구에라야 말이죠.”
“그렇죠.”
“그러니까요! 혹시. 그 두 남자는 본 적 있던 남자에요? 아니면.”
“호스트 같던데.”
“호스트?”
“네. 저한테도 잠깐 작업 거는 거 보니까. 얼굴도 그렇고 물건도 그렇고. 아니. 물건은 평범한데 테크닉이 좋았다고 해야 되나? 아! 몰라요. 잔뜩 바람만 집어넣고는 신이한테 다 달라붙어서. 생각하니까 또 성질나네.”
“신이.한테 다 달라붙었다고요?”
“네. 한명은 신이씨 위에. 한 명은 신이씨 아래에.”
“그.리고요?”
“기구도 사용하던데.”
“기구요?”
“아따. 고년 진짜 맛나게 생겼는데.”
“진정해라.”
“너나 진정해! 금방 흥분해가지고 다된 밥에 초를 치려고 작정을 했냐!? 너 때문에 줘도 못 먹는 놈이 됐잖아.”
“.”
“미지 저 년 믿을 만 한 거야?”
“아니. 못 믿어.”
“그런데 이렇게 다시 보내도 괜찮은 거야?”
“그러니까 다시 보낸 거지.”
“뭐? 그건 뭔 소리야?”
“아까 전화했을 때. 강한상이 옆에 듣고 있었던 게 분명한데. 내가 불렀을 때 가도 되냐고 물어봤다면 말이야. 만약이지만 일부러 보냈을 경우의 수도 읽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럼 왜 왔을까? 널 확인하려고? 그게 다는 아닐 거야. 그렇다면. 왜 보냈을까.라는 질문에 답은 몇 가지가 안 되지 않을까?”
“그럼. 미지씨 말이 전부 거짓말이라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잖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럼 뭐가 문젠데?”
“뭐긴 뭐냐. 오늘 낮에 내가 했던 행동이 문제지. 신이가 이 게임이란 게 내가 이길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했잖아. 그걸 뒤엎으려고. 우리가 이런 치밀한 계획까지 세웠던 거고.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만약 이 모든 계획을 준비하고. 실행하는데. 그 계획조차 다 실행하기 전에 신이가 날 선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잃어버리면.”
“.그럼. 아까 그게 다 연극이라고?”
“아니. 정말 네가 말리지 않았으면 뛰어 나갈 뻔 했다. 하지만 이 호프집을 나가서 또 다시 돌아왔겠지.”
“와. 오싹하네. 아니. 나 지금 소름 돋았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냐? 내가 알던 진태규가 맞냐? 순진하고. 얼빠진 놈은 어디 갔냐.”
“네 앞에서 묶인 마누라가 농락당하는 경험을 해봐라. 자지도. 안 서는데. 그걸 보고 마누라 바로 앞에서 웃는 놈의 얼굴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는 매일, 몇 번이나 떠오르고. 떠나질 않는데. 너 같으면. 아까 같은 일이 또 흥분을 하겠냐?”
“진심 무섭다. 사람이 너무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던데.”
“미친놈.”
“그럼. 내가 괜한 얘길 한 거 아니야? 내 딴에는 미지씨라도 확실히 우리 편으로 만들려고 한 건데.”
“상관없어. 미지란 여잔. 어차피 자신한테 이득이 될 일에만 움직일 테니까. 처음엔 아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쾌락과 돈의 마력에 완전히 빠져버린 거 같아서 좀 안타깝기도 하더라.”
“그럼 아까 같은 얘길 하면 더 안 되는 거잖아.계획이란 게.”
“그게 좀 걸리긴 했는데. 은행 일이 아닌. 신이에 대한 얘기만 했으니까. 상관없다. 그대로 전하면 오히려 나한테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그리고. 네 존재는 이미 한상이 새끼도 다 알고 있을 게 뻔하다.”
“어떻게 알아? 졸라 조심했는데.”
“그건 내 실수인 거 같아. 그때 욱해서 한상이 놈한테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 널 계속 주시하는 거 같더라고. 뭐. 그것도 상관없지만. 내 지시대로 내가 준 전화로 계속 움직였지? 직접 만나는 것도 자제하고.”
“그럼! 당연하지!”
“그럼 됐어. 남은. 술이나 마시자.”
“신이씨는. 정말 괜찮은 거야?”
“안 괜찮으면.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만 생각하고. 부정한 생각은 그만하자.”
“그래. 아쉽긴 하지만 마시자! 먹다 죽은 귀신이 땟갈도 곱다더라.”
“진차장님 오후 미팅은 말씀하신대로 내일로 미뤘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존대는 좀. 핫바지 차장인데 존댓말까지는 어색합니다. 과장님보다 한참 어린데.”
“아닙니다. 전 제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럼. ”
“수고하셨습니다. 전 오늘 사적인 미팅이 있어서 먼저 퇴근할게요.”
“네. 마음대로 하십쇼.”
이런 떨떠름한 관계야 말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분위기였지만. 어쩔 수 있겠는가. 경력도 나이도 한 참 모자란 놈이 갑자기 차장이란 직급으로 떡하니 자릴 잡고 앉았는데. 그걸 좋게 볼 과장이 어디 있겠냔 말이다.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3시 30분이란 이른 시간에 회사 문을 나서게 된다.
“왔냐?”
“응. 괜찮냐?”
“괜찮지! 조금 떨리긴 하네.”
“휴. 미안하다. 이런 짓이나 시키고.”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못 먹어도 고지!”
“점검시간이 10분이라고 해도 사실 7분정도 밖에 시간이 없으니까. 잘 해야 된다. 6969. 한상이 놈이 금고에 왔을 때 박과장이 어렵게 알아낸 번호니까. 꼭 기억해 둬!”
“알았다니까. 후. 그럼 다녀오마.”
“아! 야 이거!.”
“응?”
“위조 면허증!”
“아!.후. 이건 최대한 꺼내지 말라는 거지?”
“그래!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들어가서 여직원들 말고,. 대출 쪽 가면 박과장을 찾아야 돼! 꼭이다. 가서 자연스럽게 앉고. 그리고 금고 얘기를 해라. 알았지!?”
“그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은행 안으로 들어가자 경찰복장과도 같은 경비원복을 입은 남자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온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빠져나가는 사람들은 많아도 들어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닙니다. 대출 상담으로 왔습니다.”
“그럼 저쪽으로.”
“네.감사합니다.”
친절하게도 상담창구 앞에 사진과 함께 이름이 걸려있는 이름표를 확인하며 어렵지 않게 박과장을 찾을 수 있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의 고동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도 최대한 태연한 척 박과장이 퇴근준비를 하고 있는 바로 그 데스크 앞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는다.
흰 머리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50대를 갓 넘어 보이는 남자의 인상은 오히려 깐깐해 보이는 스타일로 이런 무리한 부탁에 쉽사리 동참할 인물로는 보이질 않았기에 다시 한 번 박과장이 맞는 질 확인하고 나서야 날 빤히 쳐다보는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금고. 때문에 왔습니다.”
“.네?. 아!.”
나처럼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의 시선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는 박과장의 모습에 오히려 조금이나마 안도를 하게 된다. 아니. 위로를 받았다고 표현을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잠.시만요. 아직 시간이.”
4시 28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전 제대로 된 절차대로. 금고 앞에만 안내를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10분 안에 모든 걸 확인하시고 나오셔야 합니다. 절대로 물건을 꺼내 오시거나. 훔치시면. 안 됩니다!”
몇 번이나 강조를 하는 박과장의 모습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짓이 도둑질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네. 알겠습니다.”
“정말.로요. 물건이 하나라도 사라지면.”
“저도 그럴 생각은 결코,. 없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받을 입장이 아닙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한방애란 조직한테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확실한 거죠?”
“.네. 그럴 각오가 없었다면 이런 모험을 할 필요도 없죠.”
“.가시죠.”
박과장은 시계를 몇 번이나 확인한 후에야 날 지하 2층으로 안내를 한다.
커다란 금고가 있는 지하 1층을 지나 커다란 쇠창살로 된 문이 벽면 한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지하 2층에 내려올 수 있었다. 마감시간의 절묘한 타이밍 때문인지 창고에 물건을 정리하는 직원을 제외하곤 지하 2층까지 내려오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323번입니다. 그럼.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정말 감사합니다.”
열린 쇠창살문을 통과하자마자 난 황급히 번호부터 확인하며 옆걸음질을 하기 시작했다. 삭막하기까지 한 은색 빛 작은 서랍장들이 즐비한 그 곳에서 번호들을 차례로 확인하며 뛰다시피 걸어간 난 가장 안쪽 구석에 323번이란 번호를 확인했고 만들어온 열쇠를 떨리는 손을 겨우 진정하며 끼워 넣기 시작했다.
‘티.틱. 탁. 기기기. 철컹.’
작은 쇳소리의 마찰음과 뭔가가 걸리는 둔탁한 소리, 그리고 손에 느껴지는 걸림이 참았던 긴 호흡의 멈춤까지도 풀게 만든다.
‘끼익.틱.’
옆으로 문을 열고 안에 들어있는 스테인리스로 된 기다란 상자를 꺼내 개인금고 중앙에 있는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는 그 상자에 있는 다이얼식 번호를 맞추기 시작하는데.
손가락이 내 말을 안 듣는다.
떨림에 자꾸 안돌아가는 다이얼식 번호를 몇 번이나 힘을 줘 맞추길 반복하는데. 벌써 테이블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7분 12.11.10초를 향해 카운트 되고 있다.
격렬한 운동을 한 것도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을 느끼며 깊은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손가락들을 공중에서 털어내듯 움직인 후에야 현민이가 가르쳐 준 6969란 번호를 맞출 수 있었다. 자전거 자물쇠라면 무의식중에도 눈감고 풀 수 있었을 텐데.
‘탁!’
작은 소리와 함께 튕겨지듯 반이 열린 상자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 한 놀람을 겪으며 쇠창살 밖에서 등 돌리고 서 있는 박과장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너무 긴장을 해서인지. 현민이가 어렵게 알아낸 이 번호를 푸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하게 되었다. 사실 이 이중 장치인 번호는 며칠전까진 예정에도 없었던 것이었기에 더 긴장을 하게 된지도 모른다.
상자의 뚜껑을 완전히 젖히곤 안을 확인한다.
500달러짜리 지폐 더미, 서류뭉치, 누렇게 바랜 낡은 신이의 사진. 장부로 보이는 검은색 책. 그리고 여권과 하얀색 서류봉투.
처음 보는 낯선 500달러짜리 지폐를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를 평소라면 궁금해 뚫어져라 확인했겠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핸드폰을 들어 카메라모드로 바꿔선 우선 보이는 검은색 책자를 열어 대충 펼쳐진 장들을 찍기 시작했다. 20여장의 사진을 찍은 후 내가 이곳에 이런 모험까지 하며 오게 된 목적인 서류뭉치들을 빠르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등기부등본들과 토지대장들. 건물소유권과도 같은 여러 가지가 잘 정리된 서류들도 대충 사진을 찍어놓고는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는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대충 소매로 닦아내며 핸드폰 카메라 어풀을 잠시 화면에서 내리곤 스탑워치를 확인하는데. 벌써 화면에 찍힌 시간이 4분 29초를 넘어가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더 빠르게 움직여 남은 서류들을 확인하는데.
통장 복사본들로 보이는 거래 내역들 중 대충 몇 장을 카메라에 담은 후 이마의 땀을 몇 번이나 닦으며 서류들을 뒤져보지만. 내가 원하는 그 서류가 존재하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떨리는 답답함을 뒤로하고 마지막 남은 흰색 서류봉투를 깊은 심호흡과 함께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 DNA 비교 검사표.
- 정자 제공 동의서.
- 난자 제공 동의서.
'이거다!'
OO종합병원의 마크가 선명히 찍혀 있는 서류들을 카메라에 급하게 담고. 마지막으로 가장 안쪽에 있는 서류들까지 다 꺼낸다.
계약서.
중국어와 한국어가 병행되어 작성된 계약서란 문구를 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난. 얼음처럼 굳어지게 된다.
조사를 했고 예상했던 문구들인데도. 막상 실물을 내 눈으로 보게 되자. 그제야. 사실처럼, 현실처럼 내 눈앞에 놓인 서류들에,, 선명히 박혀있는 문구들에. 내 시선이 얼어붙은 몸처럼 다시 굳어져 움직이질 않는다.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10개월 후에 어떠한 권리 주장도 하지 않는 다는 조건으로 선수금 1억과 잔금 2억을 지불한다는 내용.
“이봐요! 시간 다 됐어요!”
“.”
“이봐요!”
“네.네?. 아!”
서둘러 카메라에 마지막 계약서까지 담고는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는데.
정리를 하며 집어넣던 서류 중 불연 듯 난자 제공자와 정자 제공자란 서류에 눈길이 다시 가게 된다. 너무나 익숙했던 그. 서류들의 잔뿌리처럼 남아 있는 기억들의 되새김에.
난 순간 멎어버린 심장소리처럼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충격을 받으며 정자 제공 동어서란, 계약서와도 같은 서류에 눈을 못 떼게 된 나였다.
정자 제공자 : 진태규.
엉뚱하게도 내 이름이 적혀 있는 서류.
이.혼 하기 직전. OO종합병원에서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제공했던 내 분신들. 난소기능이 너무나 미약해 과배란 주사까지 맞아야 했고 그것도 자궁 내 착상이 불가능 하다는 말로 마지막 희망까지 내 아내였던 신이에게서 뿌리까지 앗아갔던. 그 병원에서의 고통스러웠던 기억과 함께 정액을 제공했던 내 기억이 같이 떠오르게 된다.
왜?
강한상의 것이 아닌 내 이름이. 진태규란 이름이 정액 제공자란 란에 적혀 있는 서류가 왜 여기에.
불연 듯 그냥 지나쳤던 여권을 황급히 다시 꺼내 펼쳐본다.
사진조차 박혀 있지 않은 빈 여권. 그리고 선명히 찍혀 있는 이름은 진해빈이었다.
분명 강해빈이라고 적혀 있어야 할 이름에 란에 내 눈을 의심하게 한 진해빈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예전에 현민이가 중국식 이름이라며 알려줬던 하에이빈이라는 ‘海彬’ 한문이 적혀 있는 여권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머리를 애써 굴려보려 노력해 보지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이름까지 만들어놓은 이 치밀함은 분명 강한상의 소행이 맞을텐데. 아니! 이 여권은 강한상이 만들었을 진 모르겠지만. 이 해빈이라는 이름은 강한상의 것이 아닐 것이다.
신이가 지은 이름이 확실했다.
海彬(해빈)
연결고리와도 같은 OO병원의 얘길 듣고 그 곳을 더 파보라는 내 부탁에 현민이가 어렵게 알아 낸 해빈이라는 이름.
혜빈이와 이름이 비슷해서 너무 놀랐던 해빈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후 신이가 왜 혜빈이를 그렇게 안쓰러워했고. 더 안타까워했는 질. 그리고 왜 그렇게 처절하게 망가질 수 밖에 없었는 지를 알 수 있었는데.
난 해빈이란 이름을 처음 듣고 강한상이란 놈과 아이까지 준비를 했다는 분노를 뒤로 하고 해빈이란 이름으로 왜 지었는지를 알고 싶어 그 뜻을 인터넷을 찾아봤었다.
사전에서는 ‘해안선을 따라서 해파와 연안류가 모래나 자갈을 쌓아 올려서 만들어 놓은 퇴적지대’.를 해빈이라 한다.
도대체 왜 이런 이름으로 지었을까.
라고 고민을 하며 생각에 잠기길 며칠. 비록 내 씨가 섞인 아이는 아니었지만 이 이름의 의미가 왜 자꾸 내 마음을 간질이며 애타게 했을 질. 이제야 알게 된 이 순간에 더 눈물이 난다. 그리고 작명소까지 찾아가 알게 된 海彬(해빈)이란 한자어의 뜻대로의 풀이로. 바다처럼 반짝이고 빛나게 자라라는 뜻도 있다는 그 말을 이제야 확신하게 되며 바다의 반짝임이 어느 무엇보다도 좋다는 신이의 말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
신이는.
나와 이혼까지 하고서도.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나보다.
고통스러운 모습조차 내게 숨기며. 혼자서 이 무거운 짐을 이고서 어떻게든 자신의 몸을 치유해보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고. 이런 방법까지 찾아낸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자신을 더럽다고 했었다.
자신의 몸이 너무나 더럽다고. 창녀 같다고 내게 무덤덤하게 스스로 말을 했었다.
조금만 더 예전의 신이의 모습과 행동을 떠올렸더라면.
“이봐요! 빨리 나와요!”
“.”
“진짜 뭐하는 겁니까! 누구 목 날아가는 꼴 보려고 이러십니까!”
“.죄.죄송합니다.”
“빨리. 다 집어넣고.”
서둘러 다시 원상태를 시키는 날 얼마나 긴박한 상황인지를 알려주듯 박과장이란 남자가 쇠창살 안까지 들어와 정리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빨리 집어 넣. ”
“.왜. 그러십니까?”
“울어요?”
“.네?.”
눈물이 줄기를 이루고 턱까지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박과장을 통해 그제야 알게 된다.
“아.닙니다. 빨리.”
[덜컹! 키키키잉]
우리가 내려올 때 열었던 계단 철문이 열린다.
“헉! 빨.빨리.”
쏜살같이 물건을 집어넣고 황급히 상자의 문을 닫고는 열려 있는 금고에 밀어 넣는데.
“뭐.하십니까?”
“아. 김대리. ”
“문 닫아야 하.”
“알잖아. VIP회원님한테 그런 말을 못 한다는 거.”
“아무리 그래도 규칙이 있는데. 벌써 4시 37분이에요. 1분이라도 지났는데 금고에 사람이 남아있는 걸 지점장님이라도 아시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지금 나갈 거야 이 친구야. 깐깐하게 굴긴.”
“.”
“다 확인하셨죠? 김대리 말처럼 저희가 규율이 워낙 철저해서요.”
식은땀이 목덜미를 지나 등까지 적시기 시작했다.
“내일 다시 오시죠.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네. 그럼.”
“확인했어?”
“.”
“걸어 나온 걸 보면 걸리진 않은 거 같은데. 아직도 뭔 놈의 땀을 이리 흘리냐?”
“우선. 이 사진들 좀 더 확인해줘.”
난 핸드폰 뒤에서 SD메모리카드를 꺼내 현민이에게 넘긴다.
“뭐가 있었냐? 그 서류는 찾았어?”
“.응. 역시 거기에 있더라.”
“집에 없었으니까 당연히 여기에 있었겠지. 그래서? 어디에 있는지도 혹시 나와있냐?”
“그것보다. 그 아이가 내 아이인 거 같아.”
“뭐?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제공 된 정자가. 내꺼 같다고.”
“.정자가 네 거라니?”
“.더. 더 확인 좀 해줘. 아니. 지금이라도 나랑 같이 중국에 가자.”
“아직 어디 있는 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어떻게 가냐고 이 답답아!”
“여권. 네가 조사한대로 벌써 여권이 금고에 있더라. 거기에 현지 주소도 있던데. 거기에 가면 만날 수 있겠지.”
"그래서 중국에 들어가자고? 넌 중국 비자 있냐?"
"비자?"
"그래 비자! 그냥 들어가면 되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가서 어떻게 하려고?"
"당연히 달라고."
“야이 미친놈아! 가서!? 내 자식이니까 나한테 넘겨라! 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라고 넘겨주겠냐!? 그것도 아직 뱃속에 있는 태아를!”
“.”
“아니면 그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죽치고 중국에서 기다릴래? 그동안 강한상이 그 꼴을 보고 가만히 보겠냐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
“내 아이래. 신이랑. 내 분신이 만나서. 생겨난 아이라는데.”
“정말 맞아? 한상이 놈의 자식이 아니라는 확신이나 증거가 있냐?”
“그 서류. 정자제공서류. 내가 OO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내 손으로 작성 한 거야. 확실해.”
“.”
“신이도. 시험관 아기라도 한 번 해보겠다고. 마지막으로 엄청난 고통을 느끼면서도 단 한 번도 우는 소리 안하고 작성했던. 서류가 확실하고.”
“그래. 그럼 그렇다고 치자고. 이 게임을 이기면 다 끝나는 거 아니냐?”
“.뭐?”
“네가 이 게임에서 이기면! 그럼 모든 걸 네가 차지하면 되는 거잖아! 그게 룰 아니야!?”
“.”
“원래 우리 계획도 신이가 한상이 놈을 택할 수밖에 없는 그 원이를 싹까지 제거하자는 거였잖아. 단지 제거가 아니라. 구출로 바뀐 거지만. 뭐가 달라졌냐? 제거나 구출이나. 어차피 사생결단을 내려야 되는 건 매한가진데.”
“그럼.”
“어차피 각오 한 거잖아. 끝까지 가야지. 끝까지 가서. 당당하게 뺏어오면 되는 거 아니냐!?”
“만약에. 강한상이 놈이 헛짓거리를 하면. 그럼.”
“그러니까 우리가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해야지.이 게임이란 걸 계속 하는 척하면서. 그 여자를 빼돌릴 수 있는 방법부터 찾아보자. 아니지. 우선 이 서류부터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그 여권의 주소부터 찾아봐야지.”
“. 돈.이 필요한데. 집도 가압류가 잡혀 있더라.”
“가압류?”
“베팅이란 거 하고. 통보가 왔어. 가압류처리 됐다고.”
“하.하하하하하하. 기막학혀서 웃음이 다 나온다. 이 또라이 새끼. 진짜 무서운 새끼네.”
“어떻게든 구해볼게. 우선 조사부터 해줘라.”
“돈도 없다며.”
“내가 어떻게든. 구해 볼게.”
“대출이라도 받게? 가압류까지 당한 놈이 대출은 쉽게 받겠다. 참나.”
“.”
“알았어. 우선 조사부터 빨리 시작하자. 돈은. 마누라가 나보고 걱정하지 말라고. 나같이 남의 돈으로 먹고 사는 사람을 못 믿겠다면서 장사라도 시작하자고 꿍쳐 둔 게 있다니까. 그걸로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제.수씨 돈?”
“아! 시벌 몰라! 빚이나 좀 갚을 까 했는데. 역시 내 돈이 아닌가보다. 알았으니까! 넌 빨리 들어가서 미팅 알리바이나 만들어!”
“.으.응.”
“신이씨한테 잘 해 새끼야!”
“.응?”
“신이씨. 아무리 생각해봐도 진짜 불쌍한 여자네. 자식 때문에 이혼까지 하더니. 어떻게든 아이를 갖으려고 그 고생까지 하고. 네 아이라며? 그럼 작정하고 몸 버린 거잖아. 난 또. 한상이 새끼랑 눈 맞아서. 어라.”
“.왜?”
“그. 서류가 거기 있다는 건. 강한상이도 알고 있다는 거잖아.”
“.그.렇지.”
“그럼?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뭐야? 아니. 알고 있던 건 맞나? 아니면 모르고서 신이씨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다가 나중에 알게 된 건가?.”
“.”
“아! 진짜 그 새끼 정체가 뭐야! 이건 까도까도 사람 헷갈리게만 만들고. 에잇! 나 먼저 간다! 너도 빨리 움직여!”
“.”
“불도 안 켜놓고. 뭐해요?”
“.왔니?”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응. 몸이 조금.”
신이가 켠 형광등 불빛에 눈동자가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낀다.
“무.뭐에요? 아프면 병원이라도 갈 것이지. 혼자서 이게. ”
“.”
“안되겠어요. 병원부터.헉!”
내 손을 잡고 날 일으키려던 신이를 반대로 힘을 줘 잡아당긴다.
그리고. 있는 힘껏 꽉 끌어안는다.
“조금만. 이렇게 있자.”
“.”
“.”
침묵이 이어진 안방에서 침대에 포개고 누운 신이가 머뭇거리다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그리곤 속삭이듯 조용히. 말을 한다.
“미안해요. 이렇게 힘들 게 해서.”
“.”
“태규씨. 우선 병원부터 가요. 옷이 땀으로 다 젖었어요. 열도 많이 나고. 병원에 가서.”
“아니야. 조금만 더.”
“.”
신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는 조용히 숨을 몰아쉰다.
강한상의 손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가슴에도. 신이의 심장소리가 변함없이 내 귀에 전해지며 내 눈을 또 감게 만든다.
“에휴. 많이. 힘들면. 지금.”
“아니야. 쉿.”
“.왜. 이렇게 힘들 게 살아요. 그냥. 즐기자고 말했잖아요. 바보 같이. 진짜 바보같아.”
‘누가 바보냐.’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목소리가 무음처럼 내 귀에만 맴돈다.
해빈이라는 존재에 대해 처음 알았을 때.
이 게임에서 내가 질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너무도 잘 알게 되었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신이의 말에 여전히 변함없는 신이를 확인했었다. 바보 같은 놈이라고 불려도 그럴 수밖에 없는 신이라면 해볼 만한 게임이라고 생각했었고.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거란 각오를 난 몇 번이나 했었다.
우연찮게 비슷한 이름의 혜빈이를 대하는 신이의 태도에 그 각오가 확신으로 변해갔을 때.
오히려 확신은 불안감이란 단어로 찾아왔고. 그 불안감은 은행 금고에서 내 자식일지도 모른다는 증거를 찾고 난 후 더 큰 불안감으로 내게 다가오게 된다.
내 아이인데도. 신이는 나보고 게임을 포기하라고 한다.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내게 하나도 비추지 않고 혼자 삭히며. 모든 걸 혼자 감수하려 했고 내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신이는 그런 여자다.
아무리 나와 자신만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더렵혀진 몸뚱이로 날 찾을 수 없다고. 내게 미안하다 말을 하면서도 게임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 그런 여자였다.
“태규씨.”
“.응.”
“이대로. 차라리 이대로 끝이 난다면. 어떨까요?”
“.?”
“그냥. 우리 둘만. 이렇게 자면서 조용히 모든 걸 포기한다면. 나도 태규씨랑 천국에 같이 갈 수 있을까?”
“.바보냐?. 어떻게 우리가 천국에 가냐?”
“.그렇죠?”
“.”
“하긴. 교회도 안 다니면서. 천국에 갈 수 있지 않을까.란 희망이나 말하고. 나 진짜 바보 같네.”
“이제 알았냐. 바보야. 그리고 자살하면. 천국엔 못 간다더라.”
“.그렇구나.”
“에잇! 일어나요! 말 하는 거 보니까 몸은 멀쩡한가 보네!”
‘탁!’
“아프다.”
“세수 좀 하고. 수염도 깎고. 그 꼴이 뭐에요.”
“.알았. 너 팔이 왜 그래?”
“.네?.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이가 긴 소매 아래로 보인 붉은 멍자국을 황급히 감춘다.
언뜻 봐서 확실하진 않았지만. 수갑. 같은 두 개의 선명한 자국이 내 시선에 분명 보였었다.
“한.상이 새끼가 그런 거야?”
“.알잖아요. 속박 플레이. 별거 아니에요.”
“.”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요. 빨리 밥 먹어요. 오다가 당신 좋아하는 안동찜닭 사왔어요.”
“.그래. 먹자. 먹고 힘내서 싸워야지.”
“.”
날 안타까운 시선으로 신이가 바라본다.
그 시선의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순간엔 입을 굳게 다물게 된다.
신이를 우선 안심시키고 작은 기쁨이라도 주고 싶다는 충동을 겨우 억누르며 그런 신이의 시선에 멀쑥한 미소만 짓는다.
지금은.
신이에게도 알려선 안 된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몇 번이나 되새기며. 상을 피는 신이의 모습만을 쳐다본다.
“아!.”
“.왜?”
“도착하면. 한상씨가 태규씨보고 전화 좀 하라고 했는데.”
“전화?”
“.네.”
“지가 하면 될 것이지.”
“.”
“어.핸드폰. 배터리 나갔었네. 한상이가 갑자기 왜 날 찾는데?”
“그게.”
뭔가를 알고 있는 지 신이가 말하길 망설인다.
또 어처구니없는 토요일의 모임 때문이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핸드폰의 배터리를 갈아 끼우곤 부재중 전화로 찍힌 강한상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누른다.
“나다.”
[안녕하셨습니까.]
평소와 같은 강한상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온다.
격양되거나 흥분된 목소리가 아닌 평소의 냉랭한 목소리에 우선 난 안도를 하게 된다.
“신이가 방금 왔다. 무슨 일인데?”
[핸드폰을 왜 꺼두시고 그러세요. 사람 불안하게.]
“불안 해? 뭐가?”
[하하하하하하 말이 그렇다는 거죠. 게임이 한창 무르익는데! 갑자기 형님이 포기하시기라도 한다면 황당하잖아요.]
“그래서. 왜 전화를 하라고 했냐?”
[뭐. 다른 게 아니고요. 솔직히 놀 수 있는 건 다 놀았잖아요? 구릅도 해봤고 게임도 해봤고. 관전도 해봤는데. 이게 슬슬 지겹지 않으십니까?]
“지겨워?”
[솔직히 형님도 익숙해지셨잖아요. 짜릿한 쾌감보다는 무료함이 더 크고 말이죠.]
휘트니스 클럽에서의 내가 졸았던 그 상황을 돌려 비꼬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게임에 양념을 좀 쳐보는 게 어떠냐 이겁니다.]
“양념이라니? 무슨 양념?”
[신이랑은 벌써 얘기 했는데. 지금 순서가 월화는 제가 수목금은 형님이 신이를 데리고 있는 거잖아요?]
“.”
[솔직히 제가 뭘 하는지 궁금하다는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전 형님이 밖에서 신이랑 뭘 하는 지 궁금해서 미치겠던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이제 삼 주 남았나? 슬슬 클라이맥스로 달려가야죠. 안 그래요? 심심하다 못 해 잠까지 오는 게임은 좀 그만하고. 지금까지 했던 것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게임을 하자 이겁니다. 형님이 했던 게임 같은 걸 하자 이거죠.]
“게임?”
[네! 게임이요! 엄청 재밌었다고 그때 모임 했던 분들도 난리가 아니던데요.]
“.”
[어떻습니까?]
“그래서 무슨 게임을 하자고?”
[이번 주엔 신이의 몸입니다!]
“뭐?”
[사진으로 신이의 가장 음란한 모습을 찍어서 회원들한테 평가를 받자 이거죠.]
“.꼭 그래야 하나?”
[에이 어차피 즐기는 거 화끈하게 즐겨야 더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게임 속에. 게임이라고. 나한테 이득 될 게 없잖아.”
[네?]
“어차피 이 게임이란 것에서 지면 모든 걸 잃게 되는데. 사진을 찍어서 내가 이긴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없지 않냐고. 네가 분명히 말 하지 않았나? 역시 게임엔 베팅이란 게 있어야 더 스릴 있고 흥분된다고.”
[.]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흠. 그럼 이렇게 하죠. 보너스를 드리겠습니다.]
“보너스?”
[네! 형님이 생각지도 못한 보너스요! 아마 최고의 득템이라고 여겨질 보너스를 드리죠.]
“.그게 뭔데?”
[미리 말씀드리면 재미없죠. 어떻게 하실래요? 그냥 하던 것만 할까요?]
“.”
[잘 생각해보세요. 형님 말대로 지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잖아요. 차후를 생각하더라도 이 보너스란 걸 보험처럼 가지고 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보너스는 필요 없고. 이 게임 속에 있는 게임을 이긴다면.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
[부탁이요? 설마 다시 게임을 하자거나. 아니면 신이를 달라는 뭐 그런 부탁 말입니까?]
“아니. 나도 게임에 걸린 룰까지 바꿀 생각은 없다.”
[.하하하하하하 좋습니다. 대신 전 재산을 돌려달라는 부탁 같은 건 못 들어드립니다. 집이나 재산. 둘 중에 하나만 해당되는 겁니다! 아! 그리고 당연하거겠지만. 사진은 철저하게 자연스러워야 됩니다. 인위적으로 꾸민 사진이나 억지스러운 사진은 아예 탈락시켜버리는 거죠! 그건 형님도 결정권이 있으니 불만은 없으실 겁니다. 물론 신이가 흥분을 못 이기고 스스로 옷을 벗어버리는 자연스러운 사진이 가장 좋겠지만요. 크크.]
“.알았다. 그럼 용건은 끝난 거지?”
[네.하하하하. 그럼 신이와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잘 했어요.”
“응.응? 뭐가?”
“부탁이란 거요. 한상씨한테 게임이 끝나고 그런 부탁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건 거 말이에요.”
“아직도 내가 게임에 질 거라고 확신해?”
“.”
“그럼. 내가 뭘 바라야 되나? 그 게임 속 게임을 이긴다면 말이야.”
“집이.요!”
“.집?”
“당연하죠. 이 집이. 어떻게 장만한 건데.”
“내 집도 아닌데?”
“.그래도요.”
신이의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갑자기 예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신이를 끈질기게 쫓아다녀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을 약속했을 때.
내 수중에 있던 적금과 저금은 다 합쳐봐야 사천만원이 조금 넘던 게 다였고, 부모님의 후광조차 없는. 요즘 혀를 차며 걱정스럽게 말하는 학자금 대출 갚기도 빠듯했던 과거를 지닌 볼 거 하나 없는 평범한 남자였었다.
운 좋게 백번 찍어 넘어온 대기업 출신의 신이란 여자를 얻게 된 남자였지만. 그래서 더 꿀릴 게 많았던 신랑감일지도 모를. 그런 욕심 많은 남자로서 결혼도 하기 전에 집부터 아내 될 여자에게 걱정을 안겨주게 된 남자였던 게 나였다.
그런 내 처지에도 신이는 단 한 번도 불평불만을 내색한 적 없었고. 오히려 1000만원이라는 금액과 조촐한 살림살이까지 장모님의 질타와 눈총을 한 몸에 받으며 내게 건네준 여자였던 게 신이였다.
그리고 어렵게 얻었던 이 집.
말도 안 되는 싼 전셋집을 찾아 부동산을 전전긍긍하던 내게 거짓말처럼 등장했던 이 집에 대한 추억과 기억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하늘이 내게 준 두 번째 행운일 것이다. 작고 허름하지만 구색은 다 갖춘. 남부러울 게 없는 가정에서 호화로운 삶을 살던 신이에게 차마 보여주기 민망할 정도의 이 집을 신이는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기뻐했고 안도를 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신이야.”
“.네?”
“이 집말이야.”
“.?”
“처음 이 집을 봤을 때. 실망하진 않았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 당시엔 하루하루가 힘겨워서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은 못 했었는데. 이 집을 다 합쳐도 처갓집 거실만도 못하잖아. 처음 구경 왔을 때도. 허름한 벽지부터. 꾸질꾸질한 화장실까지 지저분했고.”
“.”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그때, 그 당시에 솔직한 네 생각을 말이야.”
“태규씨. 저랑 몇 년 동안 살았죠?”
“3년. 연애기간까지 4년인가?”
“그 4년 동안. 전 제 모든 걸 당신한테 다 보여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절 몰라요?”
“.”
“솔직히 말하면. 처음 이 집을 보고 좀 겁이 나긴 했어요.”
“겁이나?”
“돈도 없는데. 벽지부터 장판까지 다 바꾸고 싶다는 생각부터 들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바꿔야겠다고 각오를 했는데 막상 바꾸려니까 어딜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그런 기억들이 추억이 되더라고요. 기억나요? 저기 구석에 태규씨랑 나랑 몇 번이나 떼였다가 다시 붙인 거. 저기만 유난히 들뜬 자국이 있는 게. 다시 이집에 들어왔을 때 저 들뜬 자국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먹먹히 지더라고요.”
“그랬었나?”
“안방구석에 있는 장판은 잘못 깔아서 한 뼘이나 모자랐잖아요. 결국엔 장롱을 원래 계획도 아니었는데 저 쪽 벽에 붙여야 했던 이유가 돼 버렸지만.”
신이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듯 지그시 안방을 바라본다.
나도 덩달아 신이가 바라보는 안방으로 시선을 옮기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응? 뭘?”
“사진이요. 사진을 찍어야 게임속 게임이란 걸 하던가 말든가 하잖아요.”
“.그렇지. 뭘 찍지?”
“.”
추억에 잠겼던 신이가 급히 화제를 돌리며 잠시 잊고 있던 게임을 상기시킨다.
그러고 보니 이 사진이란 게 생각보다도 훨씬 더 골치 아플 수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된다. 무작정 섹스를 하고 사진이나 찍어서 승부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생각처럼 녹록한 일이 아닐 거란 걸 생각하며 다시 생각에 잠긴다.
“혹시. 한상이는 벌써 찍었나?”
“.”
“아니다. 말하지 마. 한상이라면 벌써 찍었겠지. 그것도. 비싼 카메라에. 화려한 소도구들까지 사용.”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신이의 팔목을 나도 모르게 쳐다보게 된다. 사진과 관련이 있을 저 족쇄의 흔적들로 대충 어떤 사진을 찍었을 지를 상상할 수 있었다.
“에휴 모르겠다. 배고프네. 찜닭이나 먹.어.라.”
일어나던 난 비틀거리며 다시 주저앉게 된다.
“.뭐지.”
“왜 그래요?”
“좀 어.지럽네.”
“.어머!”
신이가 내 팔을 잡다 말고는 갑자기 화장대 서랍을 뒤져서는 거의 쓰지도 않던 체온계를 꺼내 내 귀에 가져다 대고는 스위치를 몇 번 눌러보는데. 당연히 배터리가 다 방전 된 체온계로 ‘삐삐’거리는 작동음조차 들을 수 없었다.
“잠깐만요.”
신이가 다시 서랍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장의 안쪽 깊숙이 손을 밀어 넣던 신이는 결국 서랍장을 완전히 꺼내 올려놓고는 그 안의 물건들을 하나씩 다 꺼내다 말고 작은 유리 막대기를 손에 들고 형광등에 비춰본다. 몇 번 털고는 옷에 대충 닦은 후 내 입에 밀어 넣어 물린다.
“38.9도. 미쳤어!”
“그렇게 높아?”
“안되겠어요. 병원부터 가요.”
“.그냥 감기야. 이 시간에 무슨 병원까지 가냐. 가 봐야 응급실이야.”
“그걸 말이라고 해요? 지금 몸이 팔팔 끓는데!”
“괜찮으니까. 약통에서 해열제나 좀 꺼내줘.”
“진짜. 말 안 들어. 꼭 잔소리를 해야.”
“아이고. 잔소리 듣다가 죽겄네. 약이나 좀 줘라.”
“.에휴.”
신이가 약통을 뒤지며 해열제를 찾아선 투덜거리며 내 입에 강제로 밀어 넣고는 거실로 나가 잔에 물을 받아 와 먹여준다.
“휴. 이제 열 좀 내리겠지.”
“하루 종일 뭐했어요? 약이라도 좀 챙겨먹지.”
“그냥 빈둥거렸지 뭐.어제 너무 긴장을 했더니. 그동안 받았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밀려왔나보네.”
“에휴. 그러니까 포기하라고 몇 번을 얘기 했어요.”
“아픈 사람한테 힘을 못 줄망정. 그러고 싶냐?”
“누가 이러고 싶어서 이래요? 아프니까 속상해서 그렇지.”
“난 괜찮으니까. 당신이나 배 좀 채워. 찜닭 다 식겠네.”
“신경 쓰지 말고. 눈 좀 더 붙여요.”
“.응.”
나른함을 넘은 무력함이 내 온 몸을 짓누르는 느낌에 의지와는 달리 두 눈이 감겨온다. 생각할 것도 많고 확인할 것도 많은데. 좀처럼 가라앉는 눈꺼풀을 자력으론 올릴 수가 없었다. 이런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감기야 몇 번이나 걸렸었지만 이렇게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독감과도 같은 몸의 오한과 따갑게 느껴지는 동공의 쓰라림까지.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약간은 거친 숨소리를 내쉬며 코가 아닌 입으로 호흡을 하게 되는데.
머릿속까지 깨끗이 씻기는 듯 한 시원한 감촉이 내 이마에 전해진다.
그리고 땀에 쪄든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가녀린 손길에 기분까지 차분해지는 착각인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그 손결을 따라 고개를 살짝 돌리게 된다.
또 다른 시원함이 목을 따라 가슴으로 이어진다.
와이셔츠 단추를 천천히 풀고는 런닝구의 틈으로 그 적신 수건이 들어와 뜨거운 내 몸을 식히기 시작했다. 차가움과 공존하는 부드러움이 날 더 기분 좋게 해준다.
“일어나 봐요.”
“응.응?”
“이것 좀 먹고. 다시 누워요.”
구수하면서도 담담한 미음의 내음이 내 코를 자극해 허기진 배를 더 허기지게 만들었고 아직도 차갑게 내 이마를 식히고 있는 젖은 수건을 잡아 내리며 상체를 일으켜본다.
한결 가벼워진 몸을 느끼며 깊고 긴 한숨을 한 번 내쉬며 자세를 다시 고쳐 잡아 앉자 신이가 내 무릎위에 쟁반을 올려놓던 신이가 다시 화장대 위에 쟁반을 올려놓고는 장롱에서 티셔츠와 반바지를 꺼내 내 앞에 드민다.
“이걸로 갈아입어요. 양복 다 구겨졌어요.”
“그래.”
옷을 갈아입고 앉자 다시 내 무릎위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순백색의 미음이 된장과 함께 있는 쟁반을 올려놓는다. 신이표 쌀미음을 오랜만에 보게 되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된다.
“왜요?”
“오랜만이라서. 가끔 생각나서 죽집에 가서 이 미음을 찾았는데. 화려하고 다양한 종류의 죽들만 즐비했지. 이 미음은 좀처럼 찾기 힘들더라고.”
“당신 이 미음 싫어했잖아요. 너무 진득해서 풀 같다고. 차라리 편의점 호박죽이 좋다고 했으면서.”
“행복에 겨워 투정을 부린 거지. 그러고 보면 당신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게 많아. 비누도 그렇고. 스웨터도 그렇고. 목도리도. 요즘은 그런 것들도 다 대행으로 사서 자기가 만든 것처럼 선물한다고 하던데.”
“그래요?”
“응. 그런 게 은근히 많다더라고.”
“요즘은 물질만능주의잖아요. 돈만 있으면 다 할 수 있는. 애인도 그렇고. 심지어 부모까지도 살 수 있다던데요.”
“부모까지? 말세구나. 말세.”
“그만 얘기하고 안 먹히더라도 이것 좀 먹어봐요.”
“응. 앗!.뜨뜨.”
“또 미련하게. 에휴. 잠깐만요.”
그릇을 다시 들고 나간 신이가 싱크대 수도를 틀어 바가지에 담고는 그 안에 그릇을 집어넣는다.
물이 그릇 안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담근 신이는 ‘후후’불면서 그릇 안에 담긴 미음을 숟가락으로 휘휘 젓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숟가락을 퍼 입술에 살짝 가져다 대 본다. 그리곤 내게 가져와 다시 미음그릇을 쟁반위에 올려놓는 신이였다.
먹기에 딱 정당할 정도로 식은 미음 이였기에 허겁지겁 입속에 털어 넣게 된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신이가 긴 머리카락을 질끈 뒤로 묶고는 팔까지 걷어붙이는 행동을 하며 안방에서 나가는데. 정말 배가 고팠던 나였기에 커다란 냉면그릇에 담긴 미음을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비워버리게 된다.
“신이야.”
“.응? 왜요?”
“혹시. 미음 더 없나?”
“벌써 다 먹었어요?”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더니.”
“더 끓일게요.”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다른 건 없지?”
“그럼 잠시만 더 기다려 봐요.”
“응.”
‘위위이이이이이잉잉잉’
믹서기의 전동음이 들리더니 곧 정체불명의 붉고 흰 주스를 가져온 신이였다.
“이게 뭐야?”
“배하고 대추요.”
“아! 맞네. 당신이 환절기에 자주 갈아주던 건데.”
“잔말 말고 마셔요. 열은 좀 어때요?”
“많이 내렸어. 그것보다 내 핸드폰 못 봤어?”
“충전중이에요. 바꿔 낀 배터리도 달랑달랑 하던데요.”
“충전 안 해놨었나. 아. 이거 말고 다른 핸.”
“.네?”
“.아니야.”
“부축해드려요?”
“아니야. 당신 덕분에 몸이 한결 가벼워졌네.”
“몸도 안 좋은데 점퍼는 왜 챙겨 입어요!?”
“응?.아니. 담배 한 대.”
“.”
신이의 따가운 시선에 말을 얼버무리며 입던 점퍼를 마저 챙겨 입고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쌀쌀하고 차가운 시원한 바람이 내 볼을 쓰다듬어 준다. 그러나 그 시원함은 곧 으스스함으로 내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었고 그 으스스함을 달래듯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이곤 안주머니에 숨겨있는 폴더형 핸드폰을 꺼내 뚜껑을 연다.
역시나 무음으로 해둔 핸드폰에는 부재중 통화가 4통이나 걸려 와 있었다.
이 핸드폰의 번호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주인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 했었네.”
[이제 전화 하냐?]
“미안. 깜빡 잠이 들었었다. 컥.컥컥.”
[목소리가 왜 그래?.감기 걸렸냐?]
“조금. 그런데 왜?”
[사진은 우선 다 훑어 봤는데. 개인금고까지 빌려서 숨겨둘만 하네 이거.]
“뭔데?”
[우선 검은 장부처럼 보이던 책 말이야. 회원 명부에 비자금 장부더라고. 이거 다 카피했으면 진짜 어마어마한 스캔들 하나 제대로 터지게 만들 수 있을 텐데 진짜 아깝다. 대충 사진에 찍힌 놈들만 찾아봤는데. 잔챙이들은 현직 탤런트부터 시작해서 검찰하고 의사들, 정치인들도 수두룩하다만.]
“그건 버릴 증거잖아. 그리고?”
[토지부대장 이거 말이야. 쪽발이 새끼들이 얼마나 서민들 등을 쳐 먹었는질 적나라하게 보여 주더만. 금싸라기 땅들 중에 너도 이름만 들어도 아 하고 놀랄만한 건물들도 몇 개 보이더라. 아! 그 중에 정부청사도 있는 거 알고 있냐? 졸라 웃긴 게 친일파 재산 소환인가 뭔가로 국가에 귀속시켰는지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
“그럼?”
[이런 방법이 있는 줄은 난 꿈에도 몰랐다. 와 이 새끼들 머릿속은 진심 나라 빼돌리는 컴퓨터가 들어 있는 게 분명한 가 봐! 몰수한 부지라고 언론에 발표를 해서 현 정부 점수를 우선 따 놓고는 거기에 정부청사를 짓는 거야. 그럼 당연히 국가 소유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환영을 하겠지? 그런데 정작 그 건물은 누가 짓냐? 이 새끼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장난질을 치는 거더라고. 소유주는 정부라고 해놓고는 건축은 다시 친일파 명부에 있는 놈한테 돌리고 부실 공사 운운하지만 그것도 금세 묻히면 또 수리비로 국가 돈 빼돌리고. 그러다가 건물 수명 다하면 헐값에 매각을 하는데. 그게 누구한테 가겠냐? 다시 그 놈들한테 경매로 헐값에 팔아 버리는 거지.그런데 그것도 도중에 반환신청인가 뭔가 집어넣어서 70% 이상은 찾아간다더라. 손 하나 깜짝하지 않고 꿩 먹고 알 먹는 거지. 건물도 지들이 지어놓고는 반환까지 받아 봐. 와. 진심 대박이네 이 새끼들.]
“알았으니까. 그 병원 서류는 조사해 봤어?”
[아! 김철희 과장이라고 알아?]
“김철희? 그게 누군데?”
[넌 니 씨앗을 줬던 남자 이름도 모르냐?]
김철희. 김철희.
어디선가 들었던 이름이 분명했다. 뭔가 임팩트가 큰. 머릿속에서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자꾸 거슬리듯 김철희라는 이름이 입속에서 맴돌며 엄청난 답답함을 내게 선사했었다.
[OO종합병원 산부인과 과장이던데,. 몰라?]
“아! 기억난다.”
[그걸 이제 기억하냐!?]
“자. 잠깐만.”
[.왜?]
“그 의사가 내 정액을 제공받은 산부인과 과장이라고?”
[그래. 왜 그래?]
“잠깐만.”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 김철희라는 이름 석 자 때문에 미칠 것 같다.
분명 최근에 들었던 이름이 분명했고 그 이름에 뭔가 강한 충격을 받았던 싫은 기억도 함께 했을 거란 아련한 직감에 그 이름 석 자를 몇 번이나 되새겨 입 밖으로 커버 닫은 변기위에 앉아 불러보게 된다.
‘아!. 강한상이 내게 신이의 과거를 얘기 해주던. 종합병원의 산부인과 과장. 맞다! 매독이라는 성병으로 신이를 속여 데리고 간 산부인과에서 정작 성병 검사가 아닌 가슴 성형수술에 관한 얘기로 내 혼을 빼놨던 강한상의 얘기 속 병원 과장이 분명했다.
그럼 왜.
일부러 내게 그 이름을 불러주면서까지.
스릴을 느끼기 위한 장난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큰 힌트로 오히려 게임을 망칠 수 있었을 텐데. 한상이의 의도를 짐작하려 잠시 동안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현민의 목소리를 잠시 무시하게 된다.
[야! 태규야!. 이거 먹통인가. 이래서 핸드폰을 좀 좋은 걸 준비.]
“기억났다.”
[기억났어?]
“현민아. 혹시 말이야. 가슴 성형을 하러 가는데. 그 큰 종합병원의 산부인과를 찾아 가는 게 맞는 일일까?”
[맞다니?]
“내 지식으로는 가슴 성형은 성형전문외과에서 하는 거잖아? 그리고 산분인과에서도 가슴을 성형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용이 아니고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거고. 맞지?”
[그럴걸? 그런데 왜?]
“그럼 당연히 전문 미용 성형외과로 찾아 가는 게 성형만이 목적이라면 맞겠지?”
[.아! 답답하게. 뭔데?]
“아니야. 나중에 더 자세히 알아보고. 그때 얘기하자. 그럼 여권은? 해빈이 여권은 진짜가 맞는 거 같지?”
[그건 위조 수준이 아니라더라. 사진으로만 봐서는 모르겠지만. 식별 번호도 그렇고 생년월일까지. 지금이라도 그 날을 경계 이후로 찾으면 나올 거라고 하던데.]
“생년월일?”
[그래. 그러니까 삼? 사 주? 그 정도 후에나 세상에 존재할 사람의 여권이 정식 절차를 통해서 이미 존재한다는 거지.]
“자.잠깐만. 지금 삼 주 후라고 했어?”
[삼주는 아니고. 삼 사주정도일걸.]
“.”
[왜?]
“이 게임이란 거. 앞으로 삼 사주면 끝이잖아.”
[아! 맞네! 그럼. 9개월 전부터 이 걸 준비했다는 거야?]
“.그건 아닐 걸. 아니. 신이가 준비를 했다고 하기엔 좀.”
[소름끼치네. 뭐야 이거.]
“다른 건. 사진 속에서 건진 건 없냐?”
[음. 사진은 신이씨가 아닌 거 같은데.]
“아니라니?”
[나도 신이씨 성형하기 전의 얼굴인 줄 알았는데.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사진자체가 요즘 프린터 형이 아닌 거 같은데. 그리고 아래 날짜도 그렇고 말이야.]
“날짜?”
[응. 많이 바래서 흐릿하게 찍혀있긴 한데. 1999년도잖아.]
“19.9.9년?”
[그래. 넌 정신없어서 그냥 신이 사진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나본데. 사진 상태를 보면 찍힌 년도가 대충 맞는 거 같더라고. 그럼 신이씨가 아니고 다른 사람 사진이 아닐까?]
“.”
[더 자세히 알아보고 얘기 하자. 아! 그것보다 해빈이는 어쩔 거야? 조사해서 그 주소까지 알아낸다고. 당장 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고. 신이랑 네 아이라는 보장도 없잖아. 이것도 한상이 놈 장난이면.]
“아니. 내 아이가. 신이 아이가 맞을 거야. 확실해.”
[그걸 어떻게 확신 하냐? 한상이 놈이 보통 놈이 아닌데.]
“확실해. 신이가 왜 이 게임에서 내가 질 수밖에 없다고. 말을 했는지. 그리고 왜 그런 무리한 행동까지 하면서 이런 게임에 날 끌어들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미 답은 하나밖에 없더라.”
[그럼 그렇다고 치자고. 어렵게 조사해서 위치까지 찾아냈다고 하면? 당장 데리고 올 수 있냐? 대리모란 게 한국에서는 불법이야! 아니. 중국에서도 불법이던가? 하여튼 법적으로도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는 말이라고 이 친구야.]
“그렇겠지. 그래도 찾아야 돼. 무조건!”
[하. 진짜 미치겠네. 사막에서 바늘 찾으라는 것도 아니고. 그 여권에 찍힌 주소가 맞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아! 차라리 신이씨한테 말하고 주소를 받아보는 건 어때? 네 감이 맞으면 신이씨도 널 도와줄 거 아니야?]
“아니. 그건 안 돼.”
[아 또 왜! 좀 편하게 가면 안 되냐!?]
“만약 신이가 먼저 알 게 된다면. 한상이한테 우리 계획이 들 킬 위험이 너무 커지잖아. 아무리 신이가 내색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게임이란 것에 결정자가 신이란 건 변화가 없으니까. 행동에도 당연히 변화가 있을 거야. 그럼 한상이 놈이 낌새를 챌 위험성만 커질 뿐이다.”
[.아씨! 뭐가 이리 복잡하냐! 이거 머리 나쁜 놈은 어디 게임이란 걸 할 수나 있겠냐?]
“난 머리가 좋냐?. 죽자 살자 덤비다보니까. 하나라도 건지려다보니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게 되는 거지.”
[알았다. 우선 더 조사 좀 해보고. 다시 얘기하자.]
“그래. ”
딱 한 번 빨아들인 담배가 어느새 필터까지 타들어가고 있었다. 몸이 다시 안 좋아지려는 지 사타구니에 아릿한 느낌이 들며 오한이 다시 떨려오기 시작한다. 현민이와 통화에 너무 열중을 했는지 한기조차 느끼지 못하곤 무리를 하게 된 게 분명했다.
서둘러 다시 집으로 들어간다.
현관문을 열고 잔뜩 움츠린 몸을 신이가 걱정할까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거실로 들어가는데. 신이가 배즙을 또 한 잔을 내게 내밀며 마시라 한다.
“배즙으로 배 채우겠다.”
“마셔요.”
“알.았어.”
신이의 목이 좀 잠긴 듯 허스키한 쉰 소리가 먼저 들려왔기에 우선은 건넨 배즙 잔을 손에 쥔다.
신이는 배즙을 건네곤 다시 거실로 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거실과 방까지 채워가며 신이가 유달리 요란하게 설거지를 하며 시위를 하는 듯 내게 고개조차 돌리질 않는다.
끊기로 약속한 담배를 피운다는 얘기에 화를 내는 게 분명했다.
아니지. 이 전 만남에서도 담배는.
“다 마셨으면 가져다줘요. 아예 설거지 하게.”
“음.응? 응.”
급하게 남은 배즙을 목구멍 속으러 다 털어 넣고는 싱크대 위에 올려놓는다.
잠시 동안의 침묵에 묘한 긴장감이 거실에 흐르기 시작했다. 이 긴장감은 익숙하면서도 느끼기 싫은 분위기임이 분명했고 그건 결혼 생활 때 술을 잔뜩 마시고 돌아온 다음 날 저녁의 설거지를 하는 신이의 모습과도 비슷했다.
“혹시. 강한상이한테 전화 왔었나?”
“.네? 아니요.”
“.”
“왜요?”
“아니. 갑자기 분위기가 쎄 해서.”
“아니에요.”
“.”
“태규씨.”
“응? 왜?”
신이가 설거지를 대충 끝내곤 몸을 돌려 내가 앉아 있는 거실로 걸어온다. 설거지를 하기 위해 걷어붙인 소매를 다시 끌어내리곤 내게 걸어와 다리를 옆으로 꿇고 않은 후 작은 심호흡을 한 후에 입을 연다.
뭔가를 얘기하고 싶은 듯 잠시 입술을 뻐금거리다 말고는 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답답함을 느끼며 그런 신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게 되는데. 신이가 금세 표정을 바꿔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 한다.
“우리. 야외노출 사진 찍을래요?”
“.뭐?”
엉뚱한 신이의 소리에 내 두 눈이 크게 커졌고 입도 다물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을 짓게 된다. 말을 뱉어내고는 자신도 창피한 지 내 시선을 피하며 잠시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신이였다.
“야.한 사진을 찍어야 되잖아요.”
“갑자기 무슨? 아! 게임 속 게임?”
“네. 한상씨한테 한다고 했으니까. 찍어야 되잖아요.”
“그렇긴 한데. 갑자기 야외노출이라니.”
“내일 찍어요. 같이 나가서.”
“야외노출이란 게. 한 번도 안 해봤는데.”
“누군 해 봤나.”
“그런데 어떻게 찍냐?”
“무.뭐. 나가봐야 알죠.”
“.허. 갑자기 웬 야외노출이야?”
“해보면. 그것도 쉽겠죠.”
“.”
“내일 나가요.”
“그.러던지. 참나. 갑자기 무슨 야외노.출이 냐.”
신이가 날 똑바로 쳐다보며 강하게 말을 하는 모습에 얼떨결에 대답을 하곤 이내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게 되는데. 날 똑바로 바라보는 신이의 눈두덩이가 착각일진 모르겠지만 조금 부어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데. 뭘 입고 나가지? 우리 집엔 섹시한 옷이라곤 없는데.”
“.옷. 필요 없지. 않을까요?”
“필요 없어?”
“그냥. 예전에 있던 떡볶이 반코.트. 이고 나가면. 될 거 같은데.”
“반코트? 아!. 엉덩이 바로 밑까지 오는 거? 그럼 안에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