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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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큰일을 해주고도 한상씨는 제게 단 한마디의 내색도 없이 절 유혹만 했어요.”

“유혹만 했다고?”

“네. 한상씨와 많은 진전이 있고서야 아빠한테 그 얘길 들었어요. 비자금 관련으로 잠도 못 주무시던 분이 어느 날부터 평온하게 지내셨고 모든 게 해결됐다고 한시름 놓으시더니 며칠 후 제게 강한상이란 남자를 혹시 아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한상씨가 힘 써줬다는 걸 눈치 채게 된 거죠.”

“그런 일을 강한상이 해결해 줬다고? 아무리 국회의원의 아들이었다고 해도. 아니. 그땐 이미 아무런 빽도 권력도 없는 종이호랑이였을 텐데.”

“.네? 그건 무슨 말이에요?”

“응? 응?. 아. 아니야.”

“.”

“그래서? 그 놈 유혹에 넘어갔다고?”

내 물음에 신이는 물이 1/3쯤 남은 잔을 잡고는 찬찬히 테두리를 검지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망설임을 뒤로하고 짙은 눈동자에 여운을 남기듯 물 잔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솔직히 저 그때 정말 힘들었어요. 안식처가 돼야 할 집은 항상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고, 부모님과 같이 있는 자리는 그렇지 않아도 침울한 집안에 이혼한 딸년으로서 죄인처럼 가시방석에 앉아 항상 고개조차 들지 못했고요. 집에 전화가 울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엄마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거렸어요. 모든 게 제 잘못처럼 느껴졌어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뚱이도 스스로 용서 못하겠는데. 그거 알아요? 차라리. 차라리 당신이,, 당신이 제 부모님한테 절 지켜주기 위해서 말 한대로 아이를 못 갖는 원인이 당신에게 있었다면. 정말 당신이 불능이었다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했다는 거. 그래서 제 자신을 더 용서 못 했어요. 그래서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다고. 모든 걸 놔버리고 싶다고.”

“그때 한상이가 도와준 건가? 혹시 나한테 연락 할 생각은. 안 해봤어?”

“당신한테 연락을 한다면. 당신이 절 도와줄 수 있어요? 설사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이혼한 전 남편에게 우리 아빠가 저지른 그 죄를. 당신한테 말 할 수 있겠냐고요. 제가.”

신이의 눈망울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눈동자가 흔들린 건지 아니면 살짝 맺힌 눈물방울로 커다란 눈망울이 흔들린 듯 보였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확실한 건 어느 때보다도 신이의 눈이 더 깊고 어두워 보였다는 것만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젠 상관없어요. 어차피 다 끝난 일이니까요.”

“그럼. 그때부터 한상이 놈의 말을 듣게 된 건가?”

“.네.”

“아무리 그래도 그 놈의 변태적인 성향까지 다 받아줬어야 했어? 아무리 고맙더라도. 그건 아니잖아. 혹시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너한테 접근 했던 거 아니야!? 그 놈이 널 가지고 놀려고, 그 새끼의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변태적인 취향으로 널 마음껏 주무르려고.”

“아니에요.”

“.뭐? 확신할 수 있어? 어떻게 확신하는데?”

“네. 확신할 수 있어요.”

“그래. 확신한다고 치자고. 그런데 말이야. 우리 같은. 아니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으로 돌아보자고,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아무리 변태적인 섹스를 즐겨도 단 둘이서 즐긴다고, 단 둘이서 즐기고 사랑하고. 음밀하게, 남들 모르게 사랑을 하지 이렇게 같이 공유하고 돌리는 행위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거 몰라?”

“당신은요?”

“.뭐?”

“어제 미지씨와의 섹스가 어땠어요? 만약 제가 당신처럼 평범한 사람이라고 치면. 다른 여자와 같이 당신을 공유한 것도 미친 짓이었고, 당연히 당신같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발기조차 되지 말았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

“만약 제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당신이 즐기는 동안 정말 죽여 버리고 싶다는 충동까지 일으켜야 되는 건 아닌가요? 마찬가지에요. 성적인 취향과 방법이 다르다고 사랑이 식거나 줄어든 건 아닌 거죠. 사랑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그걸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 할 수 없어요.”

“그럼 지금 당신은 강한상이를 사랑한다는 말이야?”

“.네. 사랑해요.”

사랑이라는 단어에 어금니를 꽉 깨물고 신이를 노려보지만 신이의 당당하기까지 한 똑바른 시선에 다시 주먹을 풀게 된다. 괜히 느껴지는 갈증에 신이가 만지작거리고 있는 물 잔을 뺏듯 낚아채 우선 목부터 축이고 냉정하려 애를 쓴다. 이런 대화에서의 흔들림과 조바심, 그리고 화는 내게 결코 도움이 안 되었기에 천천히 물을 삼키며 다시 한 번 침착하게 신이에게 말을 한다.

“이해가 안 가는 게. 아무리 당신이 한상이에게 빚을 졌다고 해도 그런 행위들을 용납하고 받아들였다는 게 이해가 안가. 내가 알고 있던 한신이라는 여자는 불임이란 자기 몸 상태 때문에 정말 괴로워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그런 행위를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었다고.”

“그건 불임이란 진단을 받기 전이었죠. 그리고 아직도 모르겠어요?”

“모르다니?”

“어제 느꼈던 쾌감. 당신이라면 잊을 수 있겠어요? 두 여자가 당신에게 지배당하며 몸서리치는 모습을. 기억에서 영원히 지울 수 있겠어요? 한상씨가 제게 요구한 게 당신과 지내는 동안은 당신만을 사랑하는 여자로 돌아가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어제의 섹스에서도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사랑했었고요.”

“사랑을 해?”

“네. 아까 말했죠. 사랑이란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그게 혹시 네토라는 걸 말하는 거야?”

“.”

내 입에서 네토란 단어가 나오자 신이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짓고는 이내 표정을 숨긴다.

“나도 네토란 단어 정도는 알아. 그런 것도 모르고 이 게임에 뛰어들 정도로 바보가 아니라고. 하지만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게. 어떻게든 한상이 놈이 당신한테 도움을 줬을 거란 예상에도 뭔가가 틀어졌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고. 그래. 이런 느낌만 아니었으면 내가 미쳤다고 전 재산을 걸면서 그 게임이란 것에 뛰어들 리도 없었겠지.”

“한상씨는요.”

“저.저기.”

주위의 소음조차 잊을 정도로 집중을 하던 난 갑자기 끼어든 낯선 목소리에 짜증이 확 밀려왔다. 방금 전 신이에게 작업을 걸던 남자일 게 분명했고 신이의 말대로 찌질 하고 집요한 남자에게 욕을 한 사발 퍼부어주려고 고개를 돌리며 벌떡 일어나는데.

“아까 저기서.”

군인총각이었다.

“아.아. 안녕하세요.”

“네?.안녕하십니까.”

얼떨결에 인사를 하게 된 난 또 엉뚱하게도 인사를 하는 군인의 경례를 반쯤 하다 만 손을 보며 움찔거리듯 고개를 숙이다 만다.

신이와의 대화로 몇 가지의 의문을 풀게 된 난 더 많은 걸 알고 싶다는 생각에 이 대화가 끊기질 않도록 군인총각을 돌려보내려 하는데. 

“두 분 뭐하세요. 앉으세요.”

신이가 군인총각을 빈자리에 앉혔다.

“갑자기 보자고 하셔서 놀랐습니다. 저도 스케줄이란 게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연락하시면 곤란하죠.”

“그건 미안한데. 알고 싶은 게 있어서.”

“뭐가요? 그런데 형님. 오늘은 근무 안하세요?”

“외근 나온 김에. 전화 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아무리 게임이 중요해도 생업만큼 중요한 게 없잖아요. 일은 제대로 하셔야죠.”

“.”

모든 걸 잃을 수 있는 내 입장을 조롱하는 강한상의 모습에도 태연함을 잃지 않는다. 이 남자는 어차피 이런 남자였으니까 말이다.

“어제는 어땠습니까? 형님과 밖에 나가서 외식한다는 소리까지는 들었는데. 그 이후로 아직 보고를 못 받아서.”

“신이가 매일 보고를 하나?”

“보고랄 것까진 없죠. 그냥 의무? 오늘 하루는 어떤 놀이로 즐기고 놀았다 그 정도가 다입니다. 연인들끼리 사사로운 것들까지도 통화하는 거 아시잖아요.”

“연인이라. 어제 젊은 군인과 처음으로 초대란 걸 해봤다.”

“네!? 와우 형님이 말입니까? 어제는 제대로 섰어요!?”

“.”

“크크크큭큭. 죄송합니다. 장족의 발전이네. 그래서 어제는 어땠습니까? 형님이 먼저 제안한건가요? 아니면 신이가 교육차원에서?”

“그 군인은 내가 데리고 왔는데. 먼저 신이를 어떻게 굴복시켰는지부터 말해주면. 나도 자세히 말해 주지. 아니. 어차피 넌 신이와의 옛 얘기를 나한테 직접 하는 걸 즐기잖아? 아닌가?”

“크큭.하하하하하하하하. 형님.”

“.왜?”

“형님도 이제 즐길 줄 아시는 군요. 좋습니다. 형님 말대로 신이와 클럽에서의 첫 만남 이후 어떻게 길들이기를 했는질 알려드리죠. 얘기가 엄청 길어질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곧바로 퇴근한다고 하고 나왔으니까 상관없다.”

“음. 그럼 보자.”

“내가 전화하지 말라고 했지!”

[허! 어제는 그렇게 좋아하더니. 이건 또 무슨 변덕이래? 잘 들어갔나 걱정돼서 전화했는데!]

“누.누가! 너 같은 변태새끼랑 엮인 내 잘못이다. 이 누나가 두 번까지는 그냥 넘어가 줄게. 요즘 내가 미쳤었거든! 다시는 연락하지 마!”

전화를 끊어버린 신이는 한숨도 못 자 피곤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게 된다.

클럽에서의 모든 상황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신이었다. 분위기란 것의 무서움과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자신의 육체에 자괴감까지 느끼며 신이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려 했다. 

“일어나셨어요?”

“어제는 몇 시에 들어왔니?”

“네?. 친구들하고 얘기가 길어져서.”

“넌 정신이 있는 애니? 지금 집안 분위기도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어요?”

“. 이혼을 했으면 남들 시선도 생각해야지. 아빠 입장이 뭐가 돼? 아무 일도 없지만 철없이 행동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야.”

“죄송해요. 엄마.”

“알았으면 좀 조심해.”

“그런데 아빠는요?”

“. 일 가셨어.”

“벌써요? 아직 7시 반 밖에 안 됐는데.”

“요즘 바쁘셔.”

“.네.”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집안의 분위기에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 신이다. 어머니의 가시 같은 ‘이혼녀’란 단어는 몇 번이나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 단어였다. 그러나 현실인 것만 확실했기에 우울한 기분에도 부모님 앞에서만은 애써 담담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하려 애를 쓰게 된 신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분위기가 이상해진 집안에서 신이는 그 원인이 자신 때문이라고만 생각했기에 더 그렇게 행동했고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외면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계속해서 푸념과 잔소리를 늘어놓는 어머니의 모습을 감수하고 더 아무렇지 않는 밝은 모습으로 대하려 애를 썼다.

“진서방은? 아니. 그 놈은 잘 먹고 잘 산다던?”

“네?. 태규씨 얘기는 그만 해요.”

“뭐가 태규씨야! 그 놈은 병신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니!? 애원하고 빌어도 모자란 마당에. 몇 번 찾아와서 고개 숙인 게 다야? 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엄마!. 태규씨도. 많이 힘들었어요.”

“힘들어야지! 씨 없는 수박이면 힘들어 해야지!”

“.”

“넌 빨리 다른 남자부터 만나! 그저께 갖다 준 프로필들 봤어?”

“.아뇨.”

“이것아! 너라도 정시차려야지! 언제까지 방구석에 처박혀서 혼자 찔끔거릴 거야! 거기다가 오랜만에 친구들 만나러 간다고 하더니 외박이나 하고. 정신 차려 이것아!”

“.네.”

안식처야 할 집은 신이에겐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었다.

이미 예견된 상황처럼 이혼 한 순간부터 신이는 죄인이 되었고 그 죄인을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는 너무나 가혹했고 냉정했다. 처음부터 반대하던 결혼을 한 신이었기에 더 죄스러워했고 자신의 입장을 어필할 수 없는 불임의 몸이란 사실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신이는 자신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빨리 주제를 돌리려 했고 항상 웃으려 애를 썼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 했던 신이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한참이나 더 듣고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침실로 향할 수 있었다. 부모에 대한 죄스러움과. 어제에 일에 대해 태규에게 느껴지는 죄스러움을 애써 감기지 않는 눈을 감으며 잠을 청했고 잊으려 한다.

잠을 자면.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것만 같다는 생각을 자가 최면처럼 몇 번이고 되새기며 눈을 감는다.

“요즘 뭐하고 돌아다녀?”

“.네? 그냥. 일자리 좀 알아보려고요.”

“일자리는 무슨! 집에서 신부수업이나 더 하면서 엄마가 소개시켜주는 남자랑 빨리 결혼이나 생각해!”

“.”

“여자가 이혼을 했으면 조신할 줄 알아야지! 에휴.쯧쯧쯧.”

“.”

오랜만에 가족끼리 모인 저녁식사자리였지만 신이에겐 오늘도 가시방석처럼 느껴진다.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던 아버지란 분은 신이 때문인지 많이 마르기까지 했고 예전보다 훨씬 더 수척해졌기에 일방적인 나무람에도 신이는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한 채 밥을 깨작거리게 된다.

“허허. 여자가 밥을 깨작거리니까 남자가 떠나지.”

“이 양반이. 왜 남자가 떠난 거예요! 말은 똑바로 해요. 진 서방. 그 놈이 능력도 없고 씨도 없어서 이혼한 거지! 왜 우리 신이가 쫓겨난 거라고 얘길 하냐고요!”

“누가 쫓겨났데! 남자가 떠났다고 말했지!”

“그게 그거죠!”

“허.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소리 몰라! 어디 재수 없게 밥상머리에서 큰소리야!”

“또! 암탉 얘기 하시네. 그러는 당신은!? 그렇게 잘나서 경찰 조사까지 받아요!?”

“어허!”

“경찰.조사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엄마?”

“.넌 몰라도 돼.”

“몰라도 되다뇨. 아빠. 경찰 조사를 받다니 무슨 소리에요?”

“이러니까 내가 집에 들어오고 싶겠냐고.”

숟가락을 소리 나게 탁자에 내려놓은 신이의 아버지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신이에겐 꼭 도망치듯 들어간 아버지의 모습처럼 보였기에 당황하며 어머니에게 다시 묻게 된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엄마?”

“별거 아니야.”

“혹시 저 때문에 그래요? 제가 이혼 한 것 때문에.”

“이혼을 했는데 왜 조사를 받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

“별거 아니니까. 넌 딴 생각하지 말고 가져다 준 프로필 사진에서 남편감이나 빨리 골라. 더 늦기 전에 새시집이라도 가야지. 너 지금 몇 살인 줄 알아!? 지금 낳아도 애가 대학 들어갈 땐 할머니야 너!”

“정말 별거 아니에요?”

“그럼!? 넌 아빠 일이 별게 아니길 바라니?”

“누가 그렇데요. 그냥 걱정이 되니까.”

“부모가 걱정이 되는 애가 이혼을 해?”

“.”

“넌 너 앞가림이나 잘 해!”

축처진 어깨로 다시 젓가락을 들어 밥알을 깨작거리는 신이의 행동에 그래도 안 돼보였는지 어머니가 조금은 작은 목소리로 신이를 달랜다.

“동료 비리 때문에 의례하는 조사야. 아빠 진급 때문에 걱정이 돼서 그러는 거니까. 넌 걱정할 필요 없어.” 

“.네.”

“넌. 다시 결혼해서 떡두꺼비 같은 손주나 아빠한테 빨리 안겨드려. 그게 효도고 효녀란 소리 듣는 거야. 외동딸이잖아 너. 아빠가 힘들어 하실 때 뭘 보고 힘을 내시겠니.”

“.”

어머니의 말에 차마 대답을 못 하는 신이였다.

몇 번이나 부모님에게 자신이 불임이라고 고백하려 던 신이였지만 한 번 시작 된 거짓말은 더더욱 부풀려져 사실처럼 받아들여졌고 신이조차도 그 거짓이 사실이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자신을 보호하려던 태규의 무정자증이라는 거짓을 차라리 사실이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신이는 이내 몸서리를 치듯 고개를 젓고는 식탁에서 일어난다.

“잘 먹었습니다.”

“다 먹은 거니?”

“.네.”

“그래. 들어가서 프로필 사진 좀 자세히 봐.”

“.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간 신이는 그제야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검은색 파일을 열어본다.

어머니가 집안 내력까지 꼼꼼하게 적어놓은 프로필 사진을 보던 신이는 또 깊은 한숨을 내쉬게 된다. 아무리 거짓을 현실처럼 받아드리려 악의적인 생각을 해본들 현실은 현실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어느 남자가 애를 낳지 못하는 자신을 기쁘게 신부로 맞이하겠냐는, 거짓으로 결혼을 한다 해도 언젠가는 밝혀질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뒤늦게라도 실망하실 부모님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자 소름까지 돋고는 눈물이 핑 돌았다.

태규란 남자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왜 그런 거짓말로 자신을 위로해서. 왜 그런 보호를 자청해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었는지. 

만약 처음부터 진실을 고백했다면 그때 힘들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당당.할 수 있을 텐데. 그나마 당당하게 부모에게 다시는 결혼 같은 건 안 할 거라고 말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또 다시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을 원망한다.

[따르르릉 따르르르릉]

엎드려 누운 채 신이는 귀찮다는 듯 울리는 핸드폰을 베개로 덮어버렸다. 그러나 핸드폰 벨소리는 계속해서 울렸고 끊어지길 반복하며 다시 울렸다.

강한상이란 남자의 번호가 아니었다.

“누구지. 여보세요?”

[.]

“장난 전화면 신고할 거예요.” 

[와. 진짜 더럽네. 내 번호가 아니니까 전화를 받냐?]

“.”

[뭐 해?]

“장난 칠 기분 아니다. 전화 끊.”

[야야야! 나 매독이래.]

“.뭐?”

[병원 가봤어?]

거의 삼일 만에 전화를 걸어온 한상은 어처구니없게 자신이 성병에 걸렸다며 포문을 열고 예고 없이 발사를 한다.

“무.무슨 말이야?”

[병원에서 관계한 사람하고 같이 오라는데. 넌 괜찮냐?]

“이. 미친. 지금 뭐라고 했어? 매.매독?”

[하하하하. 걱정 마! 주사 맞고 며칠 안정하면 낫는 게 매독이야. 뭘 쫄아서 말까지 더듬냐.]

“야!”

[그래도 같이 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혼자가면 쪽팔리잖아. 그나마 내가 아는 병원은 신분보장도 철저한데. 20분 후에 나와. 집 앞으로 갈게.]

“이.이 미친.”

[겁먹지 말라니까. 그냥 성병일 뿐이야. 간다.]

무섭기보단 기가 찼다. 아니! 이 미친놈의 말투와 행동에 신이는 크게 놀란 두 눈으로 몸서리까지 치며 분노를 표현해 베개 아래에 얼굴을 묻고는 있는 대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분하고, 서럽기까지 한 감정에 몇 분이나 소리를 지르며 울기까지 한다.

정확히 20분 후에 전화벨이 한 번 울리곤 받지도 않았는데 끊어졌다.

그때까지도 베게와 이불속에서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던 신이는 그 뻔뻔한 놈의 얼굴에 따귀라도 날려줘야 속이 시원해질 것만 같아 화장도 하지 않고 추리닝차림에 숄만 걸친 채 집 밖으로 나가게 된다.

“무슨 운동복에 한 맺힌 여자냐?”

“.”

‘휙턱!’

“내가 저번에 말했지! 한 번이면 족하다고.”

“너 미쳤니! 뭐? 매.독!?”

“기운이 넘치는 거 보니까 아직 발작은 안했나보네.”

“뭐!?”

“매독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모르지? 하긴 남편만 알던 여자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 그런데 이 동네에서 이렇게 큰소리로 매독매독! 거려도 괜찮나?”

“.이 나쁜.”

“타! 예약시간 얼마 안 남았어. 아니면 혼자 동네 병원에 갈래? 쪽팔려서 괜찮으면 나 혼자 가고.”

“.”

어쩔 수 없이 고급 외제 승용차에 몸을 싣는 신이다.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겨우 억누르며, 아니 때려서 피라도 묻으면 혹시나 걸리지 않았을지 모를 매독이란 것에 전염될까봐 더러워서 참는 신이였다. 그리고 강한상이의 말대로 이혼녀란 꼬리표까지 달고 있는 자신이 동네 병원에서 성병이 걸렸다는 소문이라도 난다면.

한편으로는 엉뚱한 곳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는 건 아닌 지라는 두려움을 뒤늦게 느끼게 되지만,, 다행이 한상의 차는 신이도 잘 알고 있는 서울에서도 2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는 종합병원의 입구를 통과했고, 오히려 두려움이 다른 공포로 다가오게 된다.

매독이라는 성병에 자신이 걸렸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현실로 다가오자 조수석에 앉아 안절부절 못한 채 조수석을 열어주는 한상의 행동에도 좀처럼 내릴 수가 없었다.

“뭐해?”

“진짜야?”

“뭐가? 아! 그럼 내가 거짓말 했겠냐?”

“너. 어떻게 이렇게 태평할 수 있어?”

“한두 번 걸린 것도 아닌데. 걱정 마라. 주사 맞고 약만 먹으면 다 낫는다.”

“.”

“뭐해 시간 늦었어!”

닦달하는 한신의 손에 이끌려 막상 차에서 내린 신이였지만 병원 건물의 웅장함을 고개 올려 쳐다보던 신이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처음도 아닌 이 병원에 이런 위압감을 느끼게 될 줄은 전혀 예상도 못하게 된 신이였다.

한상의 손에 이끌려 신이는 병원의 접수처가 아닌 엘리베이터로 곧바로 걸어가게 된다. 

“저.접수는?”

“예약 해 놨다니까. 3층이던가.”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다는 듯 한상은 얼떨떨해하는 신이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망설임 없이 복도를 걸어가 산부인과 김철희 과장실이라 적인 방으로 노크도 없이 들어간다.

“안녕하십니까!”

“.왔나.”

“하하하.”

“들어올 때 노크하라고 몇 번이나 얘기 했잖나. 매너도 모르나?”

“매너가 필요한가요?”

“.흠.”

“부탁드렸던 아줌만데요. 좀 봐주십쇼.”

“여기 앉으시죠.”

“네?.네.네.”

보통 성병이라면 비뇨기과로 가는 게 정설일 텐데. 라는 생각을 하게 된 신이였지만 강한상이란 남자가 특별히 아는 지인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의사가 앉으라는 책상 옆 동그란 의자에 앉게 된다.

“음. 상의 올리세요.”

“네? 사.상의요?”

“네. 위로 올리세요.”

“.”

강한상이 뒤에 있다는 것도 잊게 만드는 의사의 빠른 말과 냉랭한 말투에 신이가 잔뜩 겁을 먹고 시키는 대로 상의를 끌어 올려 브래지어에 담긴 작고 아담한 가슴을 드러낸다.

“그냥 다 벗으세요.” 

“네? 지.지금요?”

“그럼? 내일 벗을래요?”

“.”

의사다. 어차피 나 같은 환자를 하루에도 수십 수백을 보는 보고 검진을 하는 의사다. 라는 생각을 곱씹으며 신이가 옷을 벗는데. 벗다 말고 강한상의 존재를 뒤늦게 눈치 채고서야 벗던 옷을 내리며 강한상을 노려본다.

“안 나가!?”

“나? 왜?”

“나가라고! 지금 진찰 받는 거 안보여?!”

“누가 뭐래? 받으라고.”

“야!”

“어허! 지금 진찰 받기 싫으세요? 개인진찰이 얼만 줄 알고. 쯧쯧”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 남.”

“시간 없어요. 빨리 벗던가. 아니면 그냥 돌아가시던가. 바빠 죽겠구만.”

의사의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신이였지만 이 개인진찰이라는 말을 쉽게 흘려듣지 못하고 결국 상의를 완전히 벗게 된 신이였다. 남은 브래지어도 벗으라는 의사의 명령에 가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돌려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게 된다.

“오 밝은데서 보니까 훨씬 좋네”

“이씨.”

“야야. 그만 노려봐!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네.”

“장난 그만하고 똑바로 앉아요.”

“.네.”

의사의 짜증 섞인 말에 강한상을 무시하고 결국 다소곳하게 앉은 신이였다.

“음. 몇 Kg이시죠?”

“50.이요.”

“50kg이요?”

“.4요.”

“54kg에.키는?”

“168cm요.”

“몸매는 이상적인데. 흉골 노취하고 유두거리가. 흉골 거리도 그러고 250cc는 충분히 넣을 수 있겠네요. 유방상부의 두께도 이상적이고. 수술하면 예쁘게 나오겠네.”

“네?.수.수술이라뇨? 매.독이 수술도 해야 되요?”

“매독이라뇨?”

“풋.큭큭.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한상씨. 매독은 또 무슨 말입니까?”

얼굴이 새빨개진 채 그제야 자신의 가슴을 두 손으로 꼭 가린 신이는 매섭게 강한상을 노려보지만,, 배까지 잡고 땅바닥에 엎드려 웃기 바쁜 한상이였다. 그리고 이 이상한 상황이 뭔지를 겨우 깨닫게 된 신이가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에 대해서 후회를 하며 벗어놓은 옷부터 챙겨 입는다.

신이만큼이나 화를 내던 의사선생이었지만 정작 강한상에겐 무안만 줄 뿐 화를 내진 않았고 과장실을 나오는 끝까지 강한상은 눈물까지 빼며 신이를 보고 웃고 또 웃었다.

‘휙 턱’

“내가 두 번은 안 된.억!”

‘퍽!’

신이의 운동화가 강한상의 쪼인트를 인정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빡!’

“으억!. 이. 이게.”

그리고 엎드린 강한상의 뒤통수를 냅다 손바닥으로 후려갈긴 신이는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 지 계속 씩씩대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넌 이게 장난 같니! 내가 우습게 보여!? 여기 병원이 장난칠 곳이야! 정신이 있어! 없어!? 아무리 못 배우고 막돼먹었어도 장난칠게 따로 있지! 지금 웃음이 나와!”

“아.진짜.아프네. 야! 뭘 그렇게 힘들 게 살어.”

“무.뭐!?”

“장난 좀 친걸 가지고 뭘 그렇게 정색을 하냐고.”

“참나. 넌 정말 인성이 덜 됐다. 꺼져! 내 앞에서 다시 얼굴보이면. 강간범에 협박, 인격모독 성추행으로 다 신고할 테니까!”

“에이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그런 섭섭한 말을 하냐. 아 실컷 웃었더니 배고프다. 점심 먹었냐?”

“야!”

“큭큭. 가자. 진짜로 밥 사줄게. 아! 그런데 언제 할래?”

“.뭐!?”

“수술! 크큭.”

“이 나쁜.”

“크크큭. 사람들 다 쳐다본다. 안 쪽팔리냐? 난 먼저 간다 크크큭큭큭”

말을 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강한상의 모습에 정말 화가 난 신이는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의 어리숙함이 모든 근원이라는 것을 떨쳐버릴 수 없던 신이는 비상계단의 철로 된 문고리를 거칠게 비틀며 힘을 줘 확 열어보는데. 안전 바로 인해 문조차 쉽게 열리지가 않았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난 신이였다.

“내가 미쳤지. 저런 새끼랑 왜 엮여서. 지금 이걸 장난이라고. 미쳤어. 아니 돌았어! 제정신이 아니야 저 놈은!”

“크큭. 비 맞은 강아지처럼 뭘 혼자 중얼대면서 걷냐?”

“.누구세요? 갈 길 가세요!”

“진짜 매력적이란 말이야. 정말 너 내거 해라.”

“이게 미쳤나! 야! 내가 애만 일찍 낳았어도 너만 한 아들이 있어! 진짜 오냐오냐 해주니까.”

“그러셨어요? 그럼 아들하고 붕가를 한 엄마네.허”

“이.이.”

이를 악물고 부들부들 떠는 신이의 모습에도 계속된 비아냥과 조롱 섞인 농담으로 대응하는 강한상의 모습에 도저히 말로는 이 남자를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얼마나 분했으면 신이는 꽉 쥔 주먹과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도 모를 눈물을 주르륵 흘리게 된다.

“크크.어. 울어?”

“.”

“야!”

“이거 놔!”

“아나. 그렇다고 또 우냐. 사람 무안하게.”

“넌 이게 장난 같지!”

“알았어. 미안하다고. 미안해.”

“됐어.”

잡은 한상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 신이는 그대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듯 걸어 내려간다.

울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좀처럼 멈추지 않는 눈물을 한상이란 놈에게 보이는 것 자체가 굴욕적이란 생각에 한상이 앞에선 눈물조차 훔치지 않고 그대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데. 얼마 내려가지도 못하고 다시 한상의 손에 잡히게 된다.

“이렇게 가면 어떻게 해!”

“.나한테 도대체 왜 이러는데? 내가 장난감 갔니?”

“장난감이었으면 이런 수고도 하지 않지.”

“그럼?”

“모르겠다. 잘 모르겠는데. 괜히 네 암울한 얼굴만 보면 장난이 치고 싶어진다는 생각만 드네.”

“.”

“이혼을 한 게 자랑은 아니지만,,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항상 왜 죽을상을 하고 다니냐고?”

“내가 언.”

“아직도 태규란 남자를 못 잊겠냐?”

“.”

“합의이혼 아니었어? 알아보니까 합의이혼이던데. 그럼 서로 정나미가 떨어져서 합의를 한 거고, 이혼까지 한 거 아니야?”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그럼 알려줘.”

“.뭐?”

“솔직히 까놓고 말할게. 나. 이 세상에서 사랑이란 거 안 믿는 현실주의자에 개인주의까지 있는 놈이고 그래서 지금 막 살고 있거든.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아! 친구라고 떠벌이는 놈들하고 같이 여자들과 뒹굴기도 하고, 술에 쩔어 살면서 약도 하고. 돈? 그래 돈 많은 놈이 나야. 그런데 나한테 안기면서 딴 새끼 이름 부르는 년은 절대로! 절대로 눈뜨고 못 보는 성격이거든!”

“잘 났네. 그럼 그런 년들하고 놀아. 왜 나한테 이러냐고! 왜 나한테만 자꾸. 이러냐고.내가,,흑.내가 뭘 잘 못 했다고.흑.자꾸. 나한테만. 엉.어엉엉엉” 

결국 신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며 울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이혼을 결심한 후 태규 앞에서 일부러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던 신이는 이혼 후에도 부모님들의 눈치를 봐야했기에 제대로 울어 본적이 없었다. 자신의 몸을 원망하며 흐느끼듯 눈물을 훔친 적은 많았지만. 아이를 갖기 위해 몇 번이나 찾았던 이 장소에서 자신을 장난감취급하며 내는 화도 계속 장난으로 맞받아치는 강한상이란 남자에게 분해서, 그리고 서러워서 크게 울게 된다.

그런 신이의 모습에 강한상은 잠시 동안 침묵으로 바라만 보며 신이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는데. 신이가 강한상의 팔을 계속 뿌리치며 울어댔기에 한 걸음 떨어져 그런 신이의 눈물을 바라보게만 된다. 한참동안이나 울던 신이가 겨우 진정이 됐는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긴다.

오랜만에 마음껏 울고 나니 한결 가벼워져 시원해진 속을 뒤로하고 어처구니없는 자신의 행동을 또 후회하게 된다. 아무리 자신이 흐트러진 정신으로 만난 남자였고 한 번의 실수라고 넘기리라 다짐했던 사건이라고 해도 엄연한 강간범일 수 있는 이 남자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쎈 신이에겐 엄청난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끼도록 했고 그건 이 남자의 찾아올 다음 행동에 더 경계를 하게 된다. 

계속 된 장난과 성적 행동으로만 자신을 대하는 이 남자란 인간에 대해 이미 박혀버린 인상이란 게 너무 더럽기까지 했기에 더 그렇게 느끼게 된 신이였다.

“다 울었냐?”

“됐으니까.꺼져.”

“일어나. 따뜻한 연일차 먹으러 가자.”

“연일차?”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중저음의 목소리로 난생 처음 듣게 된 ‘차’ 이름에 훌쩍이던 신이가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하게 된다.

“응. 일어나. 요 앞 찻집으로 가자.”

“.”

“그리고. 이걸로 닦아. 서른도 넘었으면서 더럽게 콧물까지 흘리냐.”

강한상이 건넨 손수건을 보며 의외라는 생각을 하게 된 신이였다.

철없고 망나니로까지 보이던 강한상의 모습에선 볼 수 없었던, 차분하고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건넨 손수건이란 물건이 신기하게 보였다. 명품 손수건인 게 문제가 아니었다. 강한상이란 남자가 손수건이란 물건 자체를 지니고 다녔다는 게 신기하고 이상하게 느껴진 신이였고 지금까지 자신을 놀려주려고만 행동하며 항상 쳐다보던 시선이 아닌, 조용히 먼저 한걸음 앞서 계단을 내려가는 남자의 등에 묘한 흥미를 느끼기까지 한다.

꼭 자신만큼이나 고독과 고통을 알고 있는 듯한 힘없이 약간 처진 강한상의 어깨와 등에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되지만. 신이는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일어섰다.

강한상이 주문한 연일차라는 건 색다른 맛이었다.

향내가 은은한 국화 내음과 상쾌한 박하 내음이 조화롭게 번져 코를 평안하게 했고 씁쓰레한 칡의 맛은 오히려 심신을 차분하고 평온하게 만드는 듯 느껴졌다. 신이는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살짝 감고 향과 맛을 천천히 즐기며 따뜻한 차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좀 괜찮아?”

“.응.”

“다행이네.”

“. 안 놀려?”

“.뭐?”

“울었다고. 놀릴 거잖아.”

“놀렸으면 좋겠어?”

“아니!. 그건 아닌데. 정색하는 네 모습이 너무 어색해.”

“풋. 이건 뭐.넌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웃냐.” 

“.”

“뭐가 그렇게 서러웠어?”

“.아니야. 이제 괜찮아.”

“정말?”

“응. 나 집에 갈래. 데려다 줘.”

“왜?”

“.응?”

“아까만 해도 혼자 간다고 소리 지르고 날뛰더만. 내가 데려다줘도 돼?”

“근데 너. 왜 꼬박꼬박 반말이냐? 너 스물여섯이라고 했지?”

“응.”

“으응? 내가 몇 살 인줄 알아!?”

“나이 많은 게 자랑이냐?”

“이게 끝까지. 에휴. 이 누나가 참는다. 집에나 데려다 줘!”

“그러지 말고. 우리 쇼핑이나 할까?”

“야! 내가 왜 너랑 쇼핑을 해!”

“그러지 말고 응!? 너무 미안해서 그러니까. 백화점 가서 내가 명품으로 한 세트 맞춰줄게. 가자.”

“너 돈이면 세상이 다 되는 줄 알지?”

“아니야? 돈으로 사람도 사는데, 다가 아닌가?”

“사람을 사?”

“응!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통화로 못 살게 있나? 돈이 최고야. 이 세상엔 화력과 권력, 인력을 다 동원할 수 있는 게 돈이라고. 서른둘이나 먹었으면서 그걸 아직 모르나?”

“그래서? 지금 날 매수하겠다고? 아니. 회유인가?”

“아무러면 어때? 사준다는 데 안 받으면 바보지.”

“그럼 영화처럼 ‘어머 오빠 정말 고마워! 난 오빠밖에 없어’. 이러던가, 아니면! ‘그래 너 한 번 된통 당해봐라! 내가 오늘 아주 뽕을 뽑아주마!’ 라고 해야 되는 거니?”

“크크크 참 재밌어. 그건 마음대로 하고. 그래 보상이라고 해두자고. 좀 미안하기도 하니까 이걸로 퉁치면 되겠네.”

“.”

“왜 그렇게 노려보냐?”

“넌 부모도 없니? 아니. 부모님들한테 뭘 배우고 자라면 너 같은 애가.”

“없어.”

“.뭐?”

“우리 쩔고 위대하신 아부지는 몇 년 전에 죽었고, 지 잘난 줄만 알고 살던 엄마란 여자는 혼자 자살했어. 그래서 부모가 없다고.”

“.”

“사실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지만. 하여튼 네 말대로 그런 걸 가르쳐 줄 부모가 없다고.”

“.미안.”

“왜? 왜 네가 미안해?”

“.몰라! 너랑 얘기하고 있으면 내가 미치거나. 하여튼. 집에 갈래!”

“나 같으면 후자로 택하겠다.”

“뭐가?”

“너 성격 보니까 오빵하면서 달려들 것 같진 않고. 그래 너 된통 당해봐라! 가 어울리겠다고.”

“.”

“가자.”

“또 제멋대로. 싫어! 집에 갈 거야!”

“그래도 다 받아주네. 이왕 받아주는 김에 쇼핑까진 같이 가자고.”

“좋은 말 할 때 이거 놔라. 진짜.아! 아프다고 갈 테니까 이거 놓으라고!”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의 막무가내적인 행동에 신이도 결국 항복하듯 따라가게 된다. 괜히 눈물을 흘렸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따라가게 된 쇼핑은. 그 쇼핑마저도 전적으로 강한상의 취향에 결정돼버렸다.

오히려 신이를 이끌고 돌아다니며 높은 하이힐과 화려한 스타킹, 섹시한 드레스원피스와 작지만 엄청난 가격의 가방까지. 절대 신이의 취향도 스타일도 아닌 옷들만을 골라 몸에 대봤고 입어보라고 강요까지 했지만. 당연히 신이는 어느 하나도 입어볼 생각이 없어보였다. 

평범한 연인이라면 지친 남자친구가 투정을 부리며 결국엔 벤치에 앉아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형태의 쇼핑이 대다수일 텐데, 둘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백화점을 누비게 된다. 터프하게 걸어가던 강한상은 눈에 띄는 옷들과 구두, 액세서리들을 대뜸 신이에게 대보는 행동을 했고, 놔주질 않는 강한상의 손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이 백화점이란 곳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며 쫓아다니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여자의 기분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가는 곳곳마다 하게 된 신이였다. 취향도 취향이지만 여자라면 이런 쇼핑하나에도 자신의 외모를 가꾸고 돌아다니고 싶어 한다는 걸 너무나 모른다고 속으로 욕을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끌려 다니던 신이의 눈에 마음에 쏙 드는 예쁜 카디건이 들어왔다.

옅은 분홍색에 원단추로 아무 장식 없는 단조로움이 특색인. 색깔만으로도 포근하게 보이는 카디건을 신이가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리곤 강한상의 손이 느슨해졌을 때 가격표를 확인한다.

버릇처럼 가격표부터 확인하며 원단의 재질과 세탁기로 돌려도 되는 물품인지, 잘 늘어나는 건 아닌지.등등을 확인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몇 번이고 꺼내보길 반복했다.

“뭐해? 그것도 사줘?”

“됐어. 돈이 어딨다고. 태규씨 바지나 하나.”

“.”

너무 생각에 잠겨 있었던 신이는 자신도 모르게 버릇처럼 태규를 찾게 된다.

얼떨결에 말부터 뱉은 신이는 ‘아차!’라는 탄성을 속으로 되삼키며 한상을 향해 급하게 고개를 돌리는데. 한상의 얼굴엔 표정조차 없었다. 차라리 일그러지거나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면 당황할 신이가 아니었는데. 냉소적이기까지 한 강한상의 얼굴에 잠시 머뭇거리며 미안하다 사과를 하게 된다.

“미.미안. 나도 모르게.”

“.”

“아니지! 내가 왜 너한테 미안해야 돼? 내가 오자고 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네가 내 앤이라도 돼?”

“전 남편이 아직도 보고 싶냐?”

“뭐?.아니.”

“그런데 왜 중요한 타이밍마다 태규 이름이 나오냐?”

“내가 언제.”

“그런데 말이야. 왜 헤어졌냐?”

“그걸 내가 왜 말을 해야 되니?”

“말 안 해주면 나 홀로 망상모드로 변하거든, 내 머릿속이 얼마나 추잡한 줄 너도 알잖아. 음 보자. 그래! 속궁합이 잼병이였구나! 남편이 좆도 못했지? 혼자 끼고 몇 번 흔들다가 싸기만 했지? 아니면? 나한테는 꽤 괜찮은 크기라고 거짓말 한 거야? 혹시 새끼손가락 만 한 거 아니.”

“내가 언제 너한테. 에휴. 됐으니까. 이제 쇼핑 다 끝났지! 그럼 난 간다.”

“우리 첫 관계 때 기억 안나? 정말 기억 하나도 안 나냐고!?”

“네가 약.을 먹였잖아. 다시 생각나게 하지 말라고! 그나마 인간으로 보이려다가 당장 신고하고 싶어지니까!”

“약은 개뿔.자기도 좋다고 좀 달라고 할 땐 언제고. 참나”

“내가? 기억 안 난다고 막 지어내지 마! 진짜 확! 신고해버릴지 모르니까.”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다 증인이구만. 그리고 언니야! 신고하면 언니야도 같이 콩밥이야. 약물관리법 몰라? 그 공간에서 언니야가 나한테 달라고 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건 내가 술에 취해서. 그게 뭔지 자세히 알려주지도 않았잖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 신이가 목소리를 줄인다.

“참나 그렇게 좋다고 내 위에서 방방 뛰던 게 누군데.”

“.그만 하자. 내가 무슨 생각으로 여길 쫓아 홨냐. 내가 바보다. 내가 바보야!”

“못 믿어? 진짠데! 동영상도 찍어놨다니까!”

“무.뭐!? 사.진만 있다고. 그거 지우라고 분명히 얘기 했고,, 너도 지운다고 했잖아!”

“사진은 다 지웠지. 나 약속 하나는 잘 지키는 놈이걸랑. 그런데 동영상에 대한 건 약속 안했잖아.”

“.”

“잠깐 볼래? 음. 저쪽에 가서 보여줄게. 따라 와.”

“미.미친놈. ”

“아니면 여기서. 어!”

핸드폰을 손에 쥐고 흔드는 강한상의 빈틈을 단번에 노린 신이였다. 흔들고 있던 핸드폰을 단숨에 가로채 후다닥 엘리베이터가 있는 구석으로 달려가선 사진 파일들을 열어본다. 다행히 클럽에서 봤던 정말 간단한 패턴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핸드폰이었고 열린 파일들 중 가장 위에 있는 걸 눌러본다.

[아하]

‘다다다다다.’

엄청난 신음소리에 깜짝 놀란 신이가 다급히 핸드폰 왼쪽 아래 버튼을 찾아 소리를 줄이기 위해 연타하듯 누르게 되는데.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핸드폰에서 크게 울려 퍼진 신음소리에 깜짝 놀라 신이를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그곳을 빠져나오려 발걸음을 움직이는데 바로 앞에 강한상이 서서 지키고 있었다.

“봤지? 난 죄 없다고.”

“후. 애도 아니고. 아직도 이런 야동을 핸드폰에 넣어다니냐? 이게 나라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참나”

“진짠데. 넌 흥분하면 네 자신이 얼마나 음란하게 변하는지 모르는구나.”

“무.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못 믿겠냐? 차로 가자. 거기에 블루투스 있으니까 끼고 들어 봐.”

“.”

차에 올라 한상의 말대로 귀에 꽂은 블루투스 너머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와 얘기소리에 얼음처럼 몸이 굳어진 신이는 도저히 반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노려보게 된다.

천천히 허리를 흔들고 있는 뒷모습은 억지로 부정할 순 있었지만. 강한상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여자의 그 목소리와 내용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술에 취해 정신 줄을 놨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고 곧 시작된 정상위 체위에선 신이 자신의 얼굴이 고스란히 찍혀있었다. 

아프다며 계속 울먹이다 다시 신음소리를 뱉어내는 여잔 부정하려해도 자신이었다. 커다란 자지가 들어갈 때마다 고통스러움에 울먹이길 반복하면서도 탁한 신음소리를 뱉어내는. 혀가 잔뜩 꼬여 발음조차 부정확한 혀 짧은 소리로 연신 강한상의 말에 대답하는.

[죽이지? 아줌마 오늘 제대로 호강하는 거야.]

[아앙.앙 너.넘 넘 조아효 아.아파.아팡.아팡.흑흑.넘 아파효.하악.조하요]

[크크크. 졸라 크지? 내가 별명이 말 자지야. 여자들이 한 번 맛보면 다른 놈 건 손가락으로 쑤시는 거 같다고 하던데.]

[하앙.너.넘 켜.커효. 너무 커요. 허아악. 아.아파.아팡.아]

분명 혀 짧은 목소리와 고통과 쾌감에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의 주인공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밖에 모르겠지? 크크. 너도 다른 년들하고 똑같이 먹다가 싫증나면 버려줄게.]

[하아.아앙. 아.아파.아팡. 아]

[네가 누구 거라고?]

[항 앙. 태규씽. 태.태규씨꺼 하앙.아앙 너.넘 좋아효. 여보. 나. 나 미틸.아항]

거기서 동영상이 끊겼다.

흔들리는 떨림으로 핸드폰으로 찍은 듯 한 동영상은 갑자기 배경과 신이와 한상의 모습이 회전하듯 어지럽게 돌아가더니 엄청난 충격음과 함께 순간 정지해 버렸다. 화를 못 이기고 핸드폰을 박살내게 분명했다.

“잠깐. 신이가 내 이름을 불렀다고? 그게 언제.”

“정확히는 형님한테 보여드린 그 첫 동영상 이후였습니다. 시간상으로는 저와 신이가 처음 클럽에서 만나 술에 잔뜩 취해 제 친구 놈하고 그냥 따먹으려던 그 날이었죠. 저번에 말씀드렸던 클럽 이전입니다.”

“그럼. 첫날 내게 보여준 그 동영상 말인가? 그걸. 신이가 처음 본 건가?”

“친구 놈하고 같이 몸을 빨던 건 물론 안 보여줬죠. 그 이후에 저 혼자 찍은 동영상만 봤습니다.”

“그럼 그런 강간을 하고 다시 뻔뻔하게 다시 신이를 꼬셨다는 말이네.?”

“강간이라뇨. 남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 하십니다. 술에 취했다는 것뿐이지 분명히 쓰리섬에도 응한 게 신이였습니다. 물론 그 쓰리섬이란 게 뭔지 모르게 응했겠지만 요. 크크크”

“왜 그렇게 복잡하게. 흔해빠진 로맨스도 아니고 그렇게 수고를 할 필요가 있었나?”

“허 형님은 제가 개새끼처럼 보입니까? 제대로 연애를 하는데 동네 개새끼처럼 냄새 맡고 곧바로 빠구리부터 뜰까요? 처음이야 속궁합을 확인한 거고, 최고의 여자를 만났으니 최고의 대우로 유혹을 해야죠. 안 그렇습니까?”

“최고의 대우?”

“계속 말 끊으시면 얘기 그만 합니다.”

“아.알았어. 그래서?”

“식겁하던데요. 크크크크. 그 동영상이 합성이라고 우기는데. 빵 터졌습니다. 그래서 말 했죠. 지금까지 여자 안으면서 다른 새끼 이름 연발한 건 네가 처음이라고요. 그 이름이 언제까지 나오는 지 두고 보자고요.”

“.”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보자고 했습니다. 맨 정신으로 날 느껴보라고. 좆만한 자지로 만족도 제대로 못 시켰던 전 남편 이름이 언제까지 나오는 질 확인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끈질기게 찾아가고 장난치는데 지가 정이 안 들겠습니까? 자연스럽게 사귄다는 말도 없이 사귀기 시작해서 조금씩 마음을 허락하기 시작한 거죠.”

“그럼. 그렇게 사귀었다고 치고. 듣기론 사돈어른. 그러니까, 신이 아버님이 곤란한 일을 당했을 때 네가 도와줬다고 하던데. 그걸로 신이한테 점수를 많이 딴 건가?”

“네? 에이 제가 그럴 놈입니까? 원래 신이한테 말을 안 하려고 했었는데.”

“안했는데?”

“갑자기 저한테 찾아와서 화를 내더군요.”

“화를 내?”

“뭐. 자존심에 상처를 무지 받은 거 같던데요.”

그때가 생각이 나는 지 한상이가 잠시 테이블에 올려놓은 자신의 핸드폰을 빤히 쳐다본다. 그리곤 그런 자신의 본 얼굴이 싫은 듯 곧 미소를 짓고는 히쭉거리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건 뭐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자길 뭐로 보냐고, 값싼 동정심으로 사람 우습게 만들어서 기분 좋냐 는 말까지 들을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습니다. 생각해보십쇼! 사람도와주고 와서 따귀까지 맞았는데 기분이 좋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도와 준거지?”

“네?”

“그게. 공무원 비리잖아. 그것도 과장급이상이면 받아먹은 게 작은 것도 아닌데. 쉽게 막을 수 없었을 텐데 말이야. 신이 말로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시켰다고 하던데.”

“그거야 뭐. 그게 중요합니까?”

“.”

“하여튼 그렇게 도와줬더니 와서는 막 짜증을 부리는데 그게 또 애처롭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나이도 저보다 훨씬 많은 아줌마가 짓는 표정이라는 게 말이 안 되게 귀엽게 보였다는 거. 그런 적 없으십니까?”

“그럼. 그 전에 이미 신이와 몸을 섞었다는 말인가?”

“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왜.웃지?”

“그게 중요합니까? 이미 섹스를 먼저 한 상태에서 신이를 만나기 시작한 건데?”

“자.발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건 확실히 차이가 있으니까. 네 말대로라면 신이와 사귀고 난 후에. 몸을 섞기 시작한 이후에 그 일이 터진 거잖아. 그럼. 그 이전은.”

“그러니까 그게 왜 중요하냔 말입니다. 생각해보십쇼. 형님은 술을 처음 먹은 게 중요합니까? 아니면 술을 먹기 시작해서 쓴 맛보다 달달한 맛을 느끼기 시작한 게 중요합니까?”

“그야. 처음으로 술을.”

“그렇죠! 술을 처음 먹은 건 그래도 기억하지만, 술을 먹다가 이 술이란 걸 언제부터 즐기기 시작했다는 건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죠. 마찬가지 아닙니까? 첫 경험이 최고이든 최악이든 머릿속에서 분명 지워지지 않는 것과 그 섹스란 걸 즐기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지. 어느 것이 머릿속에 더 각인처럼 남아있겠냐는 말입니다.”

“.”

“아직도 그런 걸 연연하시다니. 좀 실망스럽네요.”

“그럼. 네가 말하는 그 첫 경험. 스와핑이나 그런 건 언제부터 시작했나? 아니. 그걸 쉽사리 받아들이던가?”

“설마요! 처음엔 정말 칠색 팔색 했죠. 생각해보십쇼. 어느 누가 사귀기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다른 놈한테 자길 돌린다는데 좋다고 하겠습니까!? 크크”

“그럼?”

“음. 그러니까. 제 압박에 가슴성형까지 하고나서. 한 5개월이 지나고 나선 가?”

“.”

“처음에 제가 신이한테 했던 말, 섹스중독이라는 말 기억하시죠? 그것처럼 제 발기상태가 유지가 안 되는 이유가 신이가 싫어서가 아니라고 설득에 설득을 하고, 명령까지 했었죠. 아실까 모르겠는데 신이가 약간 섭 기질이 다분한 여자라 서요.”

“섭?”

“섭 모르세요? 섭!?”

“.”

“아! 그래서 그때 SM이라고 말했을 때 이상한 눈으로 보셨구나.하하하하하하하하.”

“SM이란 게. 난 사람을 막 때리고 패고. 그런 건 줄 알았으니까.”

“하하하하하. SM이란 단어가 무슨 약자인 줄은 아십니까?”

“.”

“Sadism Masochism의 첫 글자들을 줄여 SM이라고 부릅니다. 상대에게 육체적 정신적 가학을 가해서 성적 쾌감을 얻는 사디즘과, 상대에게 육체적 정신적 가학을 당하는 입장에서 쾌감을 얻는 걸 마조히즘이라고 해서 두가리를 같이 붙여서 SM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사디즘의 가학을 하는 사람을 뭐라고 부를까요? 돔이라고 부릅니다. 그럼 상대방은요. 네. 섭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워낙 유명한 야동들에서 무조건 채찍 들고 때리고, 묶고 강간하고. 이런 것도 SM이 맞긴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말씀드렸듯 육체적 정신적 가학 중 전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 가학에 더 치중하는 편이란 말이죠. 그런데 신이는 그런 제 행위에 잘 참고 따랐고, 쾌감까지 얻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말입니다.”

“그게 지금 대화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하 이러니까 신이가 뭘 바라는지도 모르셨지. 섭기질이 있다는 건 일반적인 쾌감에도 훌륭하지만 남자의 명령에서 오는 복종의 쾌감에 더 크게 느낄 수 있다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물론 개인적인 성적 취향이 더 중요하겠지만, 신이는 잘 길들어진 섭일 때 더 즐거워 한다는 겁니다.”

“그럼. 네 명령으로 신이가 다른 놈하고 아무렇지 않게 잠자리를 했다는 거야?”

“아무렇지가 아닌 게 아니었죠. 아시잖아요. 신이가 자존심이 얼마나 센지,. 내 성적 취향이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처음엔 많이 혼란스러워 하더군요.”

“.”

“그래서 술 좀 많이 먹고 친구 놈들하고 같이 쌍쌍으로 모여서 게임도 하면서 놀다가 자연스럽게 분위기 잡고 시작하는데 알코올의 기운을 빌려서 조금은 대담하게 노출도 하고, 어린놈들 앞이라서 빼는 게 덜 한 것처럼 행동하는데 그게 말같이 쉽습니까? 우리들이야 뭐 워낙 그렇게 평소에도 잘 놀던 놈들이니 상관없었지만 신이는 게임벌칙으로 바로 앞에서 키스하고 몸 더듬는 것만 봤는데도 계속 맥주를 마시더군요. 크크크. 그러다가 신이도 벌칙으로 다른 놈하고 키스하다가. 결국엔 69벌칙까지 당첨이 됐는데 얼마나 망설이던지. 친구 놈들의 성화에 결국엔 할 거면서도 애들 앞에서 술에 취했는데도 또 다시 심호흡까지 했다니까요. 하하하하. 그렇게 분위기에 휩쓸려서 몸이 반응을 하는데. 이건 도저히 아닌 거 같다고 끝끝내 몇 번이나 망설이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첫 날엔 그냥 딱 거기까지 만 했었죠.”

“게임이라고?”

“네. 분위기 띄우는 댄 게임만한 게 없죠. 더군다나 20대에 좀 노는 애들이라면 옷 벗기 게임은 기본이고 터치도 제대로 즐길 줄 알고요. 하긴 신이가 나이가 있어서 좀 껄끄럽긴 했을 거예요. 막내동생뻘 되는 남자애들 자지를 빨아야 되는 벌칙이란 걸 당했으니. 물론 패스권이라고 해서 술로 대처할 수 있었지만,, 생각해보세요. 거기서 술에 만취하게 되면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를. 신이가 그런 쪽으로는 또 똑똑하잖아요. 차라리 알딸딸하더라도 필름만은 끊지 말자는 각오로 감당할 수 있는 벌칙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건데.”

“똑똑한 여자가 그런 모임에 참가를 하나?”

“허 형님. 섹스에는 똑똑하고 멍청하고 가 없죠.”

“뭐?”

“명품으로 휘감고 있어봐야 다 벗겨놓으면 막대 달린 남자랑 구멍 뚫린 여자고, 뚱뚱하거나 마른 게 다인데 뭘 똑똑하고 멍청하고를 가립니까? 솔직히 까놓고 얘기해서 알몸으로 무인도에 던져놔 봐요. 법을 공부할겁니까? 잘난 법 공부해서 다른 놈 심판할 수 있어요? 아니면 적분이나 미분 같은 걸로 로켓이라도 발사 할 수 있습니까? 어차피 무인도에서는 마실 물과 먹을거리가 제일 중요하고, 그것들이 풍족하다면? 다음엔 뭘 찾게 되는지 아세요? 나머지 욕구들이에요. 그거랑 똑같다는 말입니다. 술에 몸을 맡기고 음악에 취해서 본능에 충실하다보면 다 똑같아 진다는 그 말이죠.”

“뭔 말도 안 되는 억지 같은 소리를.”

“크크크 형님도 이 생활에 뼈 속까지 물들게 되면.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의식주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그 다음으로 가장 왕성하게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게 성욕이란 걸 말이죠.”

“그럴까? 사람의 본성이란 건 아무리 변하려고 노력해도 바뀔 수 있는 한계란 게 있다고 난 생각하는데!?”

“그거야 형님이 아직 절실함이 없어서죠.”

“그래서 날 이런 게임이라는 걸로 낚은 건가? 절실함이란 걸 깨닫게 해줄고? 그럼 그 절실함이란 걸 깨닫게 해서 뭘 얻으려고? 같은 물에서 노는 동료라도 필요한 거야?”

“네? 하하하하하하하하. 또 오버하신다. 동료라면 형님이 굳이 필요할까요? 널린 게 하이에나 같은 새끼들에 발정난 개 같은 놈들인데?”

“그럼.”

목이 타들어간다.

지금까지의 한상에 모습과 행동, 그리고 신이의 모습에서 유추했고 결론지었던 이 게임이란 것의 의도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봤던 한상이 놈의 의도를 직설적으로 물으려 준비를 하자 목부터 마르기 시작했고, 난 컵에 담긴 물을 천천히, 조급해보이지 않게 천천히 마신 후 말을 이어간다.

“신이를 정말 사랑해서 날 아예 같은 최악의 나락으로 떨어트리려는 거 아니냐? 신이가 날 아직도 사랑하니까?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신이의 정신까지는 못 가지니까?”

“정신이라.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신이가 아직도 형님을 그리워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뭐?”

예상외의 긍정에 나도 모르게 되묻게 된다.

사람의 맥을 다 뺄 정도에 한상의 표정변화 없는 긍정은 다른 무엇인가를 나로 하여금 또 고민하게 만든다. 

“음 뭐라고 할까. 형님은 제가 안 갖고 있는 걸 갖고 계시다고 하더군요. 돈으로 살 수 없고 인맥으로 구할 수 없는. 하긴 나중엔 그 모든 걸 다 사는 제 모습에 신이조차 놀라는 눈치였지만.”

“그게 뭔데?”

“.네?”

“신이가. 내가 갖고 있다고 한 게 뭐냐고.”

“와 너무 꽁으로 드시려고 한다.”

“.”

“그런 시답잖은 얘기는 그만하시고. 제 분위기를 다 깼으니까. 이번엔 형님이 말씀하시죠.”

“.뭘?”

“벌겋게 충혈 된 눈동자를 보니 어제 잠 한 숨 못 자신 거 같은데, 어떠셨습니까? 누굴 어떻게 불러서 즐기셨어요?”

“어제?”

“네! 어차피 신이가 말 해주겠지만 형님이 얘기해주시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겠네요. 누가 주도를 했습니까? 신이는 아닐 테고. 당연히 형님이 하셨겠죠? 아니면 부른 초대남이란 남자가 주도를 했어요? 혹시. 어제도 안 커진 거 아니죠?! 크크크크”

“신이가 오늘 전화를 못 했다고 했지?”

“네? 네.”

“나도 내가 이렇게 변할 줄은 전혀 예상을 못 했어. 신이가 즐기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미친놈처럼 달려들어서 신이를 괴롭혔다고 해야 할까? 아니지. 네 말대로 정말 제대로 즐기기 시작했지. 어제 부른 남자는 군바리였어.”

“군바리라면? 군인이요? 직업군인?”

“아니. 일병 휴가를 나온 현역 군인. 역시 군인이 체력하나는 끝장이더군. 통제하기가 좀 힘들어서 그랬지 정말 장난 아니던데.”

“.”

“결국엔 신이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조금만 쉬자고 부탁을 하는데도. 와 휴가가 빵꾸나서 67개월 만에 처음 나온 휴가라고 하더니 정말 많이도 묵혀놨더군.”

“신이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고요?”

“그럼? 그렇지 않으면 너한테 전화를 왜 못 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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