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화
기마부대 대대장은 항복하는 촌장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죽이지 않을 것이니 그런 걱정하지 말고 마을에서 보유한 식량이나 건초를 모조리 내놓으시오.”
살아남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굴종하는 것이 최선이다. 늙은 촌장은 계속해서 굽실거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군인들이 필요하다는 물건만 내놓으면 목숨은 구하게 생겼다. 촌장은 급하게 마을에 있는 곡식과 건어물 건초나 청초를 넘겨주었다.
“대장님, 이것이 전부입니다. 더는 없습니다. 어촌이니 당분간 물고기를 잡아 연명하시오.”
“예,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는 조개도 많이 나와 당분간 식량 없어도 지낼 만은 합니다.”
식량을 확보한 대대장은 늙은 촌장에게 대진국의 재무부에서 발행한 약속어음에 식량과 건어물 수량을 적어 넘겨주며 말했다.
“이건 약속어음이니 나중에 대진국의 관리가 찾아오면 보여주시오. 우리 대신국의 군대에 협조한 마을이라 특별히 보호를 받게 될 거요. 지금 우리에게 넘겨준 것과 똑 같은 물건을 돌려받거나 또는 그에 해당하는 은괴나 다른 재물로 받게 될 거요. 그러니 이 서류를 소중하게 다루시오.”
“예! 예! 알겠습니다. 살려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의 행적을 외부로 발설하지 마시오.”
“예! 예! 명심하겠습니다.”
촌장은 이런 약속어음이 생소한 서류다. 하지만 필요한 물건만 차지하고 떠나려는 기마부대가 너무 감사했다.
오랜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영주가 수없이 바뀌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단 한명의 청년도 죽지 않고 단 한 명의 처녀들도 해를 당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좋은 군대인가? 너무 부드럽네.’
중간에서 충분한 식량을 확보한 기마부대는 동해안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스치듯이 지나가는 마을에서 급하게 필요한 식량이나 또는 건초를 챙기고 이동했다.
스치는 가벼운 봄바람이련가?
거센 폭풍처럼 갑자기 밀려온 기마병과 수많은 말들이 사라졌다. 촌장은 긴장이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손에 든 약속어음이 구명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판단했다.
‘목숨은 구할 수 있게 됐어.’
대진국의 침공으로 전쟁이 터진 상황에 매사 호불호를 기대할 수는 없다. 오직 가족과 자신이 무사히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3개 기마대대는 지나가는 마을마다 수많은 약속어음을 발행했다. 대대의 재정을 담당하는 선임하사는 그것을 정확하게 기록했다. 나중에 해외원정군 총사령관의 군수 참모에게 보고해야 한다. 또한 전비를 모두 책임지는 황제에게로 보고서가 올라가니 허수를 적으면 극형을 당하는 수가 있다.
‘공연히 공짜로 푼돈 벌려다가 골로 가는 수가 있어.’
기마부대는 언놈이 어떤 연줄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황제의 비밀 감찰요원이 병사들 틈에 평범하게 숨어서 동행할 수도 있다. 그러니 먼 타국이고 외상이라고 해서 함부로 지출할 수는 없었다.
기마부대가 이런 식으로 식량을 조달하며 동진하는 중, 태왕이 이끄는 해군 함정들은 필요한 물이나 식량은 작은 섬에서 조달 받았다. 보유하고 있는 보급품이 많지만 필요할 경우 기마부대에 공급해 줘야 하기 때문에 섬에서 주로 건어물들을 매입했다.
“철갑웅! 비단이나 무명으로 계산을 정확하게 해.”
“넷!”
이렇게 되자 놀라서 두려움으로 떨던 섬사람들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해군함정을 타고 이동 중인 태왕은 기마부대와 보조를 맞추어 최대한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지나가면서 필요한 물자를 구하고 적당히 보상을 해주거나 또는 약속어음을 발행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의 이동은 외부로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남쪽에 비해 마을이나 도시의 크기가 작다. 대부분은 가난한 어촌이라 외부와는 별로 교류가 없었다. 공연히 외부로 연락해야 자신들의 마을이 졸지에 전장으로 변할 수 있으니 그저 입 다무는 것이 최선이다.
‘시절이 하수선할 때는 눈과 귀를 닫고 입만 봉하면 최선이야.’
태왕 일행의 움직임은 매우 은밀했다. 남쪽의 왜 진영은 물론 바로 이웃한 마을도 잘 모를 정도다. 그저 스치는 바람과 같이 나타났다가 빠른 속도로 동쪽으로 향했다.
한편 남쪽의 해외원정군은 태왕의 명령으로 보병사단을 함정에 싣고 시모노세키 항구를 떠났다. 바다를 통해 동쪽으로 이동하는 해외원정군은 드디어 오사카만으로 들어서는 아카시 해협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적들도 자신들이 오는 것을 아니 어느 정도는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척계광은 함대를 정지시키고 쾌속정을 전방으로 보내 적진을 살피도록 했다.
“정확하게 살피고 돌아와.”
“넷!”
해군 함정들은 이곳으로 오는 동안 몇 번의 짧은 전투가 있었다.
큰 항구에 정박한 왜의 해군함정이나 상선들과 어선을 만나자 포격으로 격침시켰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짧은 시간에 적들의 해군을 전멸시켜 버렸다. 그런 공격의 뒤에는 마지막으로 마치 크게 인심이라도 쓰는 듯이 부두에서 가까운 큰 저택을 노리고 포탄을 날려 파괴해 버렸다.
포격으로 큰 항구의 지휘부는 모조리 파괴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중간에 있던 왜군들은 서둘러 동쪽으로 일부 도망치거나 또는 산발적으로 내륙 깊은 산으로 도망쳤다.
“호랑이도 겁나지만 포탄의 공격이 더 겁나.”
“화전이나 일구고 살아야 하나?”
“일단 산속으로 들어가고 나서 생각해 보자고.”
왜는 대부분의 인구가 해안의 도시나 마을에서 거주한다. 그 때문에 해안 도시들에 대한 함포 공격은 매우 효과적이다.
이런 공격 방법은 왜인들에게 공포감과 혼란을 주기 위한 방편이다. 또한 중간지역을 그대로 놔두고 동진한 뒤에 후미를 공격당해 뒤통수를 맞기 싫으니 그런 요소를 제거해 버렸다.
해외 원정함대는 폭이 좁은 해협에 도착하자 잠시 멈추었다. 전방으로 먼저 척후선인 쾌속선들이 전진했다.
여름 날씨지만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가득했다. 자칫하면 폭우라도 쏟아질 수 있을 정도로 꾸물꾸물했다. 넓은 오사카만으로 진입하기 위해 정찰 업무를 나갔던 쾌속선이 돌아왔다.
척후병은 지휘함정으로 올라 척계광에게 보고했다.
“총사령관님, 왜의 해군 함정들이 100여척이 모여 있사옵니다.”
“무장 상태는?”
“함선에는 대포가 전혀 없고 소형 함정으로 우리 함정으로 접근해 백병전하려는 것인지? 기름을 싣고서 돌진하려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망원경을 살펴도 정확하게 알 수 없나?”
“넷! 저의 판단으로는 기름을 싣고서 화공을 펼치려는 것 같습니다. 또한 남쪽의 아와지(淡路) 섬이나 아카시 성에서 대포를 발사해 공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았어! 우선 양쪽 언덕에 있을 대포들만 조심하면 되겠군.”
해협의 폭이 너무 좁아 양쪽에서 대포를 쏘면 치명적으로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상태로는 전진하기가 어렵다. 시간이 촉박하니 우회하는 방법은 피해야 한다.
적의 방어 전략을 파악한 척계광은 즉시 양쪽 해안에 있을 수 있는 포진지를 향해 함포를 발사하라고 명령했다.
쾅! 콰광! 쾅!
전투함에서 함포들이 발사되자 이어서 왜군들도 대항하기 위해 대포를 발사했다. 그러나 왜군들의 대포들이 쏜 포탄은 함정 가깝게 떨어지기는 하지만 함정에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바다에 작은 파문들만 무수히 만들었다.
퐁! 퐁! 퐁!
왜군들의 포병부대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어설픈 공격으로 오히려 자신들의 위치만 발각된 것이다.
함장들은 포수들에게 명령했다.
“양쪽 해안의 포진지를 향해 전포로 정밀 사격!”
“정밀 사격!”
두둥 두둥둥 두두둥
고수가 대북을 두드리고 깃발이 올라가자 전투함들은 쌍렬로 된 전포를 발사했다. 함포의 공격으로 아와지 섬이나 아카시 성의 높은 고지에 포진한 포진지들이 파괴되고 말았다.
펑! 펑! 화르륵!
“으악!”
“악!”
멀리서도 들릴 정도로 커다란 비명 소리가 끝없이 이어지면서 왜의 포병들이 죽어 갔다. 정밀 사격에 이어 조금 해안으로 다가간 전투함들은 이번에는 좌우 측방에 설치된 함포들을 발사했다. 무지막지한 포격이 시작되었다.
쾅! 과과과광! 과과광!
웅장한 소리를 내며 함포들이 발사되자 포진지가 설치된 언덕지역은 완전히 민둥산처럼 변해버렸다. 아름드리나무며 바위 그리고 대포는 물론 포병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실로 대단한 화력이다.
망원경으로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척계광은 중얼거렸다.
“적의 포진지는 완전히 사라졌군.”
“총사령관님, 이제 해협을 통과해서 전진할 수 있사옵니다.”
해군함정에 타고 있던 보병사단 병사들은 이런 광경에 다들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실로 어마어마한 화력을 지닌 전투함들이다. 함정에 타고 있던 육군 포병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기가 죽어 버렸다.
“진짜 대포는 해군이 다 가지고 있어.”
“당연하지. 저런 큰 대포는 육군은 이동하기 어려워 보유할 수 없어.”
좁은 해협을 통과하려는 대진국의 함정들을 목표로 구축한 왜의 포병진지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제는 오사카만으로 진입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전방에 포진되어 있다는 왜선들이 문제다. 만약 화공이라도 펼치면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척계광은 태왕의 작전명령서 내용이 떠올라 즉시 명령을 내렸다.
“함대, 신기전 발사!”
“넷!”
태왕께서는 화공에는 신기전을 발사해서 원거리에서 파괴하라는 작전 명령서를 작성해 보냈었다. 화약의 힘으로 멀리 날아가는 신기전이 준비되어 연달아 왜선들을 향해 발사되었다.
쉬쉬쉬쉬 쉬쉬쉬
하늘에는 수많은 화살들이 높이 날아올랐다. 화살에 달린 화약통이 타면서 하얀 연기를 품어내며 동시에 괴이한 소리를 냈다. 화차에 장착된 신기전은 동시에 100발의 화살이 발사된다.
신기전 발사에는 재화 소모가 많지만 엄청난 화력을 지녔다. 수많은 화살이 하늘높이 나르자 오사카만의 하늘은 일시에 검게 변했다.
펑! 펑! 화르륵! 화르륵!
적함들에게 날아간 신기전은 명중되면서 화약이 폭발했다. 그러자 적함들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이어서 거대한 폭발로 이어지고 있었다. 척후병의 예측대로 왜군은 화공을 펼치려고 배에 화약이나 기름을 싣고 있다가 화공을 받자 폭발한 것이다.
펑!
“으악!”
화르륵
“으아아악!”
화공을 펼치려다가 오히려 대진국의 무지막지한 화공으로 당했다. 일시에 많은 배들이 침몰해 오사카만의 깊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배에 기름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불길은 아주 거셌다.
불길 너무 거세지자 척계광은 급하게 외쳤다.
“전 함대 후퇴!”
“후퇴!”
불길이 미치지 못하도록 약간 뒤로 후퇴했다. 척계광은 지휘함의 높은 누각에서 망원경으로 적함들이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구경 중에 불구경이 볼만하다더니 거세게 타오르는 불구경은 할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