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화
나이 많은 노인이 멍한 시선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질척한 땅에 덜컥 주저앉아 있었다. 자식들과 같이 피난을 떠났으나 그만 자식과 떨어지자 이제는 혼자의 힘으로 이동이 불가능한 것이다.
삶의 끝자락에서 자식에게 버림 받은 슬픔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 자체를 모조리 거부당하는 제일 참혹한 사건이다. 그저 당장 죽고 싶을 뿐이다.
피난의 와중에도 약해 보이는 사람은 도둑놈들의 표적이 되어 약탈당하고 있었다.
“아이고! 내 딸,”
“이놈아! 쌀을 가져가면 우린 굶어 죽으라는 거야? 차라리 지금 죽여!”
거리 주변에는 처참한 광경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었다. 길가에는 죽어버린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왜군들은 튼튼하게 구축한 방어벽을 사용해 보지도 못했다. 또한 많은 병사들이 있었으니 접전을 벌이지도 못하고 후퇴하고 말았다. 오직 도망만이 살길이라고 판단해 정신없이 동쪽으로 달아났다.
보병 사단장은 포병들을 내세워 대포만 발사하고 나서 무혈 입성하듯이 성으로 진입했다. 전혀 백병전을 벌이지 않고 야마구치 성을 점령했다.
“와! 성공이다.”
“대진국 만세! 만만세!”
야마구치 성을 완전히 점령하자 대진국의 병사들은 환호했다. 그나마 포격이라도 해서 차지했기 때문이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무용담은 적을 죽인 자랑은 하나도 없고 오직 누가 먼저 선착순으로 성에 진입했느냐 뿐이다.
야마구치 성의 점령을 끝내자 일단 어수선한 치안부터 바로 잡았다. 그러자 이미 내정된 산구 도지사가 수하인 관료들과 같이 빠르게 행정 업무를 인수받았다.
보병 사단장은 행정업무와 차안을 담당할 도지사에게 당부했다.
“도지사님은 행정을 장악하고 치안을 담당할 경찰서를 설치한 뒤에 바로 잡신들을 모시는 신사부터 정리하세요.”
“신사요?”
“그렇습니다. 왜의 신사(神社)는 모두 불교 종파인 홍익종에서 인수합니다. 그래서 조선과 똑 같은 방식으로 운용될 것이니 행정력과 경찰력을 동원해 모조리 압수하세요.”
“넷!”
조선과는 전혀 다르게 강제로 신사의 재산을 몰수하는 작업을 전달했다. 지엄하신 태왕의 명령이니 예외는 없고 어길 수도 없는 일이다.
“신사에 보관된 모든 재물이나 유물도 압수해서 도청에 모아 두세요. 그리고 목록을 작성해서 폐하께 보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죠.”
“신속하게 움직이세요.”
이런 전달 사항을 전하고 나자 사단장은 다시 입을 열었다.
“도지사님은 반드시 알아둘 일이 있습니다. 행정 구역상 여기에 도청을 두는 것은 임시라는 것을 유념해 두세요. 야마구치는 시청으로 존립시키고 추후에 도청은 히로시마로 가게 되니 그렇게 아세요. 그래야 도청 소재지가 지리나 경제 활동 중심으로 보나 가장 중심지역이 되니까요.”
“잘 알았소.”
아직은 히로시마가 점령지로 변하지 않았다. 우선 야마구치에서 도정 업무를 보고 다음에는 히로시마로 도청을 정해 하나의 도(道)리고 정한 것이다.
도지사에게 행정과 치안을 넘긴 사단장을 신속하게 동쪽으로 부대를 이동시켰다.
“전진!”
“진격하라!”
다음 목표는 후쿠야마로 그쪽은 남쪽 해안 지역이라 해군과 합동 작전을 펼쳐야 한다. 또한 그곳을 통과해 오카야마를 지나 오사카로 진격할 수 있었다.
사단장이나 총사령관인 척계광이 태왕으로부터 작전명령을 받은 내용은 그 지역까지다. 이후의 작전 계획은 다시 명령을 받아야 한다.
왜에서 최강인 오우치 군대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를 하자 왜는 이제 더욱 큰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태왕이 작심하고 노려 오우치 영주를 저격해 버리자 지리멸멸하게 허물어져 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먼 조상 때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궁술 솜씨로 막강한 오우치 가문의 군대를 분쇄해 버렸다.
본시 동이족은 동쪽에 있는 큰 활을 가진 민족이란 뜻이다. 동이(東夷)에서 이(夷)란 흔히 오랑캐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대궁(大弓)을 지닌 민족을 뜻한다.
대륙에서 사는 민족은 항상 동쪽의 기마민족인 동이족을 두려워했다. 말을 타고 강력한 활을 사용하는 동이족은 그들로는 언제고 자신들을 멸망시킬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다.
그런 두려움의 결과물이 만리장성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자금이나 인력을 동원해서 길고긴 성을 쌓아둔 것이다. 그것으로도 너무 불안해 항상 대륙통일을 이루면 동쪽을 침공하는 전쟁을 일으켰다.
동쪽에서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면 항상 자신들의 지배자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최인범이란 인물이 나타나자 그들은 별로 힘을 써보지 못하고 철저하게 패배해 사분오열로 갈라선 것이다.
최인범은 대저택에서 왜의 역사서를 보며 한숨을 토했다.
“왜놈들은 백제가 자신들의 조상이라면서 항상 못된 짓만 저지르고 있어. 천왕가가 차라리 백제의 후손이라고 하지를 말지 무슨 속셈으로 그렇게 주장하는지 모르겠군. 그러다가 힘이 강해지면 잃어버린 조상 땅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한반도를 침공하려는 속셈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분명해.”
남의 나라를 침공하려면 대외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이 필요했다. 지금 최인범은 배신한 오우치 가문을 처벌하고 이어서 천왕이란 호칭을 놓고 시비를 걸어 전쟁을 일으켰다.
잠시 이런 생각을 하던 최인범은 그것으로 명분이 약해 새로운 명분을 내세우기로 했다.
‘그래, 고구려에서 파생된 나라가 백제고 백제의 담로로 시작된 나라가 왜니 과거를 내세워서 한반도에 속한 나라라고 주장하는 거야.’
이런 생각을 하다가 보니 왜를 정벌하고 다스리려면 뭔가 더 좋은 방법이 있나 고심했다. 황제의 나라는 흔히 주변국을 통제하거나 또는 합병할 경우 본시 그곳에서 있던 나라의 왕족을 황족의 방계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최인범도 조선을 합병하면서 조선 왕실의 왕족을 황실의 방계로 받아 들였다. 또한 처음 나라의 기틀을 만들기 위해 여진족 부족장의 아내였던 진빈도 후궁인 아내로 받아 들였다.
‘왜도 그런 전례를 따르는 것이 좋겠어.’
왜의 천왕제도는 말살해 버려야 되지만 그들의 후손은 적당히 봉황성으로 끌고 가 명분만 남게 되는 왕족으로 만들기로 했다.
‘그게 제일 현명한 방법이야.’
조금 과격하게 처리하는 방법도 있다. 전쟁의 혼란을 틈타서 천왕 일가를 모조리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모조리 죽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하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앞으로 전개되는 상황에 따라 천왕 일족 처리는 보다 과감하게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이때 전령이 찾아와 야마구치 성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자 최인범은 친위기마부대 대대장들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후방에서 도착한 말을 충분히 가지고 해안선을 따라 최대한 빨리 이동해서 오다에 있는 은광을 점령하도록.”
“넷!”
왜에서 제일 큰 은광이라 야마구치 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은광에서 채굴된 은괴를 가지고 도망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화약이 왜에도 있으니 은광을 파괴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물론 다시 개발하면 되지만 그렇게 되면 시간과 많은 재물을 투자해야 된다.
“은광을 온전하게 점령해.”
“명을 따르겠나이다.”
시급한 작전이라 대대장들은 신속하게 후방에서 도착한 3천필의 말을 추가로 인수했다. 기존에 예비로 가지고 있던 말을 포함해 모두 6000필의 말을 확보하자 해안선을 따라 신속하게 이동했다.
두두두두
실제 병력은 2000명이지만 말의 수는 개인당 3필씩 보유하고 떠나는 것이다. 그리되면 쉬지 않고 달려서 오다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기마부대의 기동성을 최대한 높인 것이다.
최인범은 호위무관과 경호원들과 같이 10척의 함선에 올라 해로를 통해 동쪽으로 이동하게 됐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보다 안전한 이동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러자 대마도에서 오게 된 배들도 이곳에서 공출한 건초나 청초 그리고 곡물들을 싣고 서둘러 태왕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동해에서 부는 순풍을 타고 빠르게 운항하고 있었다.
쏴아아! 쏴아!
서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동해를 가로지르는 대형 함정들은 위풍당당했다.
함정에 오르자 최인범이나 철씨 삼형제는 모두 그동안 항상 입고 있던 특수 갑옷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후! 이제야 홀가분하군.”
“바다바람이 아주 시원합니다.”
아무리 몸에 익숙한 갑옷이라지만 벗고 있을 때가 홀가분한 것이다.
“철갑웅, 사냥해서 먹다 남은 멧돼지 고기를 이참에 구워먹자.”
“넷!”
최인범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실로 오랜만에 멧돼지 고기를 구워놓고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주위에 있는 경호원들이나 여자 무관들에게도 소주를 넘겨주며 지시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다들 소주를 마시고 푹 쉬도록 해.”
“넷!”
멧돼지 고기가 많지 않으니 경호원이나 여자 무관들은 자연스럽게 왜에서 많이 나오는 생선을 구워 먹거나 또는 회를 떠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고 있었다. 여자들이 끼어서 술을 마시니 분위기가 매우 화기애애하다.
“야! 맛나네.”
새로운 방식으로 생선을 먹어보며 다들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추가 한반도로 유입되자 최인범을 시작으로 새로운 음식 문화가 전파되고 있었다. 고추씨를 구해 보내면서 기본적으로 요리법도 알려줬었다.
범선은 바다에서 바람의 힘으로 이동하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끝없이 이동했다. 또한 식사 시간이 별도로 필요 없다. 그러다 보니 오다(大田)에 도착할 때에는 기마부대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오다에 도착하자 나이 많은 촌장이 환하게 웃으며 반기고 있었다.
“폐하! 오실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정보를 보내느라 고생 많았소.”
촌장은 이미 오래 전에 재물을 주어 포섭했다. 그의 자식들을 대진국으로 데리고 가 군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촌장의 큰 아들은 지금 친위기마부대 장교로 근무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왜로 보면 촌장은 오랜 고정간첩인 셈이다. 촌장이 대진국과 가까운 사이다보니 주민들 역시 매우 호의적이다. 그래서 최인범은 오다에서 머물기로 했다.
촌장이 술상을 거하게 차려오자 최인범은 술잔을 넘겨주어 따라주면서 말했다.
“조금 있으면 아들을 만날 수 있을 거요. 편하게 드세요.”
“아, 그놈은 은광을 접수하러 갔군요.”
“그렇습니다. 이제 200명의 기마부대를 이끄는 중대장이 되었습니다.”
“폐하! 너무 감사합니다. 저희 가족을 이렇게 보살 펴 주니 정말 감사합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술이나 드세요.”
촌장과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 경호원들이 밖에서 약간 큰 목소리로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렸다.
“경호실장, 밖이 소란한데 무슨 일인가?”
“폐하! 마을 주민들이 막 잡은 생선을 폐하께 진상한다고 가져와 거절하느라고 소란합니다.”
“알았어. 가지고 온 성의가 있으니 일단 다 받아 두고 나중에 떠날 때 정상적으로 가격을 쳐주도록 해.”
“명을 따르겠나이다.”
사소한 재물도 가난한 민초들의 소유는 공짜로 차지하면 안 된다는 소신이 있어 이런 지시를 내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