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1화
소방청에서 보내온 방화 추정시간에 궁녀들의 행적을 모조리 조사했다. 확실하게 행적이 밝혀진 궁녀나 시녀를 제하다 보니 용의자가 나타났다.
2명은 동궁에서 근무하는 궁녀들이고 1명은 동화전에서 일하는 궁녀다. 감찰 상궁이 3명의 용의자를 따로 불러 매섭게 추궁했다.
“네가 벌인 짓이지?”
“아니옵니다. 저는 동궁으로 잠시 심부름 갔을 뿐입니다.”
동궁에서 근무하는 궁녀들은 모두 조선 왕실에서 오게 된 여자들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같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결국 정황으로 보아 동화전에 있는 명나라 출신 궁녀의 소행으로 짐작됐다.
황궁에서 벌어진 방화사건이라 신중하게 처리해야 되고 또한 비밀을 준수해야 된다. 감찰 상궁은 근정전으로 찾아와 태왕께 보고했다.
“폐하, 용의자를 잡았으나 실토하지 않으니 어찌 처리해야 하는지요?”
“협의점이 많으나 자백하지 않는다고?”
“넷! 유력한 용의자는 모두 3명입니다.”
용의자를 3명이나 잡았지만 범죄 사실을 자백하지 않고 있으니 고문해야 되는지 묻는 것이다. 대진국은 조선이나 또는 이웃한 다른 나라와 달리 죄인들에게 고문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실 내부에서 벌어진 사건이나 반역죄의 경우에는 그런 조항이 해당되지 않는다. 왕정국가다 보니 제일 큰 범죄는 황족을 해하거나 또는 반역하는 범죄행위가 제일 무겁다. 그 때문에 그런 사건이 발생하면 철저하게 조사하기 위해 그대로 놔둔 것이다.
감찰 상궁의 물음에 최인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흠! 쉽게 자백하지는 않겠어.’
황궁으로 들어와 방화해서 정강대군을 해하려는 범죄 행위다. 정강대군은 황실의 방계라 그를 해하려는 행위는 반역죄에 해당된다. 누구라도 동궁에서 지내는 궁녀들이 조선 왕실의 사주를 받았다고 판단할 사건이다.
‘조선에서 정강대군을 해할 이유가 정말 있을까?’
배후로 지목될 것이 분명한데 조선 왕실에서 이런 짓을 저지를 이유가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다른 쪽으로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복잡한 사건이 될 수 있겠어.’
자신이나 황실에 원한을 품을 상대에 너무 많았다. 그리고 타국이 아니더라도 내부에서도 불만을 가진 무리는 있을 수 있다. 세상사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으니 어떤 때라도 불만세력은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런 사건의 경우 배후야 항상 감춰지거나 또는 역으로 공작을 펼칠 여지가 많았다. 어떤 이유서건 정강대군을 해하려고 황궁에 불을 지른 행위는 용서할 수 없었다.
‘신중하게 생각해서 철저하게 조서하는 것이 좋아.’
이렇게 판단한 최인범은 감찰 상궁에게 지시했다.
“사건의 배후를 캐기 위해 용의자를 고문하지 말고 밀실에 감금해 놓도록 해.”
“넷!”
“자살할 위험성이 있으니 철저히 감시하고.”
“명을 따르겠나이다.”
용의자로 지목된 궁녀들은 모두 3명이었으나 2명은 조사결과 무죄로 밝혀져 풀리고 한 명만 감금되었다.
동궁에서 근무하던 여자들의 협의가 풀린 것은 사건이 일어난 시각에 둘의 행적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둘이 몰래 숨어서 동성애를 줄기다 보니 그 또한 중죄로 취급되어 자신들의 행적에 대해 함봉하고 있었다.
이런 보고를 받자 최인범은 즉시 지시했다.
“두 궁녀는 모두 예술 학교로 보내도록 하시오.”
“예이.”
동화전에서 근무하던 궁녀만 남게 되어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그녀가 감금된 곳은 서궁의 작은 전각이다.
서궁이나 황궁 내에는 특별히 지하 감옥이나 또는 감찰부의 조사실이 별도로 없었다. 그런 시설을 해놓으면 나중에는 그런 시설 자체가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는 장소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만들어 놓지 않았다.
최인범은 범인으로 지목된 궁녀를 만나자 매우 놀랐다. 눈에 확 뜨이는 미녀로 나이도 이제 16세에 불과했다.
‘와! 기가 막힌 미녀야.’
용의자가 미녀라 그런지 최인범은 궁녀에게 조금은 호의적으로 대하며 그녀의 행정에 대해 자세하게 물었다.
“그 시간에 무엇을 했냐?”
“폐하, 소녀는 사실 동궁의 연못에서 정강대군과 같이 있었사옵니다.”
“뭐라? 그런데 왜 말하지 않았나?”
“소녀가 어린 정강대군을 꼬이려고 했다고 모함을 받을까 너무 두려워서.”
최인범은 정강대군을 만나 확인해 보니 궁녀는 본시 그림을 잘 그려 정강대군이 가끔 불러서 그림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배우던 그림은 여인들의 몸매를 그리는 춘화도라 함봉하고 있었다.
‘정강대군이 어리지만 여자들 틈에서 살다보니 조금 빠르게 성에 대해 관심이 많군.’
결국 용의자로 지목된 궁녀도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유력한 용의자 3명이 모두 혐의가 없다고 드러나자 사건의 진상을 쉽게 알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흠! 사건이 점점 애매모호해 지는군.’
이런 사건의 배후가 쉽게 밝혀질리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과감하게 결정했다.
‘일단 실화로 발표하고 사건을 조용히 끝내는 것이 좋겠어.’
태왕의 이런 결정으로 황궁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은 방화가 아닌 실화로 발표되었다. 출동이 늦었다는 소방관서의 수장이 문책성인 조치로 감봉만 받고 끝났다.
그러나 황궁의 방화 사건은 국가정보원에서 담당해 조사를 계속했다. 사실상 광범위한 조사가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최 원장, 예술 학교로 보내진 궁녀들의 행적을 철저하게 조사해.”
“넷!”
국가정보원에서 요원을 보내 황실로 들어와 궁녀들을 조사할 수 없으니 일단 예술 학교로 보내서 계속 조사하도록 조치를 내렸다.
일단 필요한 조치를 내린 최인범은 화재로 불타버린 동궁의 서재로 찾아와 태일 태감에게 지시했다.
“동궁의 서재는 귀중한 책을 보관하는 곳이니 목조가 아닌 석재와 벽돌로 신축해.”
“넷!”
황궁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으로 소방청의 기구가 확대되었다. 또한 소방 장비를 대량으로 생산해 봉황성을 비롯해 지방으로 보내라는 지침이 하달되었다.
황궁에서 처음 일어난 중대한 사건이라 여파는 매우 컸다. 다소 방만하게 운영되던 황실의 내명부는 새롭게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황실 감찰부의 기능이 더 강화되고 지금까지는 조금까지 황궁으로 들어오는 궁녀나 시녀의 출신 성분이나 과거에 대해 다소 소홀하게 조사하던 문제가 치밀해졌다.
황후는 외국에서 오게 된 궁녀들은 모조리 예술 학교로 보냈다.
“전에 폐하께서 데리고 왔던 궁녀들로 빈자리를 채우도록 해.”
“넷!”
“앞으로는 궁녀나 시녀를 새로 황궁으로 들일 경우에는 반드시 내 허락을 받도록.”
“명을 따르겠나이다.”
황궁에서 일어난 방화사건이라 황후는 자신은 물론 태자의 안전을 위해서도 궁녀들이나 시녀들의 행동을 감찰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비빈이 많은 황실이라 지금과는 달리 나중에는 별 이상한 사건도 벌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제일 안전하다고 보는 명나라 고아출신으로 태왕을 신처럼 여기는 궁녀들을 황궁 안에 배치했다.
황궁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최인범은 새로운 사건이 터지게 되어 신경 쓰게 되었다.
편전에서 검찰청장을 만나 살인사건에 대해 보고받았다.
“폐하, 사람을 3명이나 때려죽인 살인범입니다. 마땅히 지방 검사의 기소 내용과 같이 법원으로 보내 재판해서 효수형에 처해야 하옵니다.”
“청장, 이대로 기소하면 법원에서야 당연히 살인범이라고 효수형을 처하겠지만 너무 억울하다고 진정서가 들어 왔으니 신중하게 처리하시오.”
“명을 따르겠나이다.”
“사건이 터진 퉁화로 직접 찾아가서 재조사하시오.”
“넷!”
아주 단순하고 경미한 폭행이나 또는 미풍양속을 해치는 사건의 경우 경찰서에서 며칠간 구금하거나 또는 가벼운 벌금형으로 끝난다. 그보다 중한 범죄의 경우 검찰에서 정식으로 기소해 법원의 판결로 형을 집행하게 된다.
이번에 황궁으로 진정서가 들어온 사건은 3명의 청년들을 몽둥이로 때려죽인 살인범에 대한 처벌을 감면하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살인 등 중범죄의 경우 대법원에서 판결하고 형이 집행된다.
태왕에게 진정서가 보내진 살인 사건이었다. 어린 딸이 3명의 청년들에게 강간당하고 나서 자살하게 되자 아비가 범인들을 찾아가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검찰총장이 직접 통화로 가서 사건을 조사해 보니 조금 복잡했다. 아비는 딸이 죽어버리는 사건이 터지자 통화경찰서로 찾아가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서장은 3명의 강간범들을 무죄라고 풀어주었다.
그러자 아비는 다시 검찰청으로 고발장을 제출했다. 그래도 다시 무죄라고 통보를 받게 되자 아비는 법을 믿지 못한다고 강간범들을 찾아가서 몽둥이로 때려죽인 것이다.
엄한 사법제도가 존재하지만 태왕께서 직접 개입하면 사법부 위에서 재판이 진행된다. 자연히 살인죄를 저지른 아비와 증인들 그리고 경찰서장이나 지방 검사가 황궁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검찰총장이 경찰서장이나 지방검사를 압송해 오자 최인범은 조용히 지시했다.
“경찰서장을 어찌 할 생각인가?”
“소신 판단으로는 아비는 태형 20대를 가하고 뇌물을 받아먹고 중범죄인은 무죄로 풀어준 경찰서장은 파직과 동시에 강제노역 10년을 가하고 뇌물을 받아먹은 지방 검사도 똑 같이 처리해야 되옵니다.”
“지방 검사가 그대의 처조카라던데.”
“폐하, 소신은 이번 일과는 무관하옵니다.”
“짐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소. 그대가 검찰총장으로 있으니 이번 사건이 더욱 복잡해진 것이오. 물론 총장의 말이 사실 이겠지만 백성들이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소. 조용히 집으로 가서 쉬도록 하시오.”
“에이.”
최인범은 검찰총장이 강간범은 때려죽인 아비를 효수형으로 처하라고 했던 사실로 이미 법의 집행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검찰 총장을 경질함으로 이번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다.
‘살인이 무거운 죄인 것은 사실이지만 딸이 그런 험한 꼴을 당하고 자살한다면 나라도 돌아버리지 제 정신이 아니야.’
결국 사람을 때려죽인 아비는 태형 10대의 벌을 받고 불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경찰서장이나 지방 검사는 그보다 더 중한 태형 30대에 강제노역 20년형에 재산이 몰수 되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들의 죄를 엄하게 처리한 이유는 사법관인 그들이 애초에 아비의 억울함을 들어 주었으면 살인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진국은 점차 행정이나 사법 제도가 정착되었다. 처음에는 드물던 뇌물 사건들이 가끔 터지고 있으나 이번에 일어난 사건 때문에 관료들의 기강은 매우 엄해졌다.
한편 조선 왕실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매일 같이 일찍 출근해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렸다. 이들이 술렁이는 이유는 대진국의 국무총리인 이황이 여러 명의 각료를 대동하고 찾아와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 관료 임명권을 달라니 드디어 대진국이 합병하겠다고 나오는 것이야. 지방 관료는 대부분 재임명한다고 방침이 세워졌다고 하더군.”
“그리되면 우리 중앙의 관료들은 모조리 해직되나?”
“당연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