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화
<조선 왕실의 몰락>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어느새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른 봄.
꽁꽁 얼어붙었던 하천의 얼음이 녹아 흐르고 있었다. 들에서는 농민들이 봄 파종으로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황궁의 전보다 많이 밝아진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봄이 오자 황궁에는 봄꽃들이 화사하게 피고 웃음소리가 간간히 들리고 있었다. 무척 평화로운 모습이다.
그러나 많은 궁녀들이 사는 황궁은 알게 모르게 작은 암투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부분 궁녀나 상국들이 벌이는 암투로 황비들이 모두 임신한 상태라 벌어진 현상이다.
“우리 마마님은 반드시 태자님을 낳을 거야.”
“무슨 소리야. 내가 알아보니 공주님이라고 하던데.”
태교에 집중하는 황비들이야 시기 질투하는 경우가 없지만 그녀들이 데리고 있는 여자들 사이에는 작은 다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심한 정도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고 있었다. 황후가 관리하는 감찰상궁들의 감시도 있고 사실 황비들이 서로 다투지 않으니 작은 말다툼만 간혹 벌어지는 정도다.
황비들이 모두 임신하거나 수유 중인 상태라 최인범은 다시 진유향을 자주 찾았다. 너무 잠자리를 탐하다가 호되게 혼이 난 진유향은 이제는 적당히 자중했다.
“폐하, 오늘은 몸이 조금 불편하니 황후님을 찾아 가옵소서.”
“아니요. 몸에 무리가 된다면 그냥 잠이나 잡시다.”
사람이란 버릇을 들이기 나름이라더니 최인범은 이제는 밤에 여자가 옆에 없으면 너무 허전했다. 그래서 배가 불러오는 황비나 태자를 끼고 사는 황후 대신에 진유향과 같이 지내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황후는 조심스럽게 권했다.
“폐하, 후궁을 새로 들이세요.”
“아니요. 나중에 들이지요.”
황실에는 많은 미녀들이 있지만 최인범은 후궁을 들이기를 거부하고 진유향과 같이 지내고 있었다. 최인범은 부인이 많다고 판단해 다른 여자를 거부하지만 황후나 황비 그리고 각료들은 전혀 다르게 판단했다.
‘이상하시네. 진 빈만 애지중지하고.’
태왕께서 진 빈과 같이 지내자 진 빈의 위상은 조금 올라가고 있었다. 그렇게 되자 두문불출하던 진명하가 황궁을 찾아와 진 빈을 자주 만나는 일이 벌어졌다. 다시 벼슬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그러나 진명하를 내치기로 결정한 최인범은 단호하게 진유향에게 지시했다.
“앞으로 진명하를 황궁으로 부르지 마시오.”
“폐하, 한직이라도 벼슬을 주면 아니 되나요?”
“아니요. 그는 너무 욕심이 많으니 가깝게 지내지 않아야 하니 진 빈도 앞으로 만나지 마시오.”
태왕의 이런 지시에 진유향은 더 이상 조를 수 없었다. 더 이상 조르다가 자칫하면 노여움으로 오히려 해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태왕은 자주 근정전으로 찾아와 국정을 살피고 있었다. 주로 조선에서 벌이는 각종 국책 사업을 챙기고 있었다. 조선의 온산 광산에서 금이 생산되는 보고를 받자 좋아했다.
“됐소. 이제는 조선의 개발 자금도 어느 정도 확보하게 되었소.”
“폐하, 남경의 화폐제조창으로 모조리 보내야하나요?”
“그렇게 하시오.”
“넷!”
최인범은 전년도에 남주 사신이 찾아와 동왜에서 무려 600척의 함선으로 복건성을 침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태왕은 빠른 조치를 내렸다.
봄이 되자 조선으로 떠났던 최복동이나 각료들이 봉황성으로 돌아 왔다. 왜에 대해서 항상 예민하게 반응하는 태왕은 근정전의 집무실에서 각료들을 불렀다.
회의실에 모여든 각료들을 만나자 제일 먼저 국가정보원장에게 물었다.
“왜에서 600척이나 되는 전투함을 건조해 복건성을 침범했다니 그게 사실인가?”
“넷!”
“어찌된 일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소?”
“폐하, 동왜의 영주들이 그동안 해안이 아닌 강에 조선소를 만들어 계속해서 함정을 건조했사옵니다. 저희가 명나라와 교전을 벌이자 그 틈을 노리고 남주 지역을 침범했사옵니다.”
남해도에 많은 함정이 가있는 상황이나 그들은 모조 안남지역으로 안남미를 구입하기 위해 이동해 왜구의 침범을 알고도 제지하기 못했다.
“남해도의 해군이 왜구를 막지 않은 건가?”
“폐하, 마침 남해도에 남아 있던 함정의 수가 너무 적었습니다. 남해도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이제이 수법으로 왜구들이 남주의 힘을 약화시킨다고 판단해 그대로 뒀다고 하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구가 600척이나 동원되었다면 앞으로 문제가 아니요?”
“그렇습니다. 소신의 판단으로는 동왜가 너무 세력이 커지는 것 같사옵니다.”
소규모로 함선을 보유한 것이 아니고 무려 600척이나 보유했으니 소홀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국가정보원장의 보고는 계속되었다.
“폐하, 왜왕은 완전히 동왜와 같이 움직이고 있사옵니다.”
“왜왕이 교토를 떠났다는 겁니까?”
“그러하옵니다.”
왜는 이미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대진국에서 통지하고 있었다. 멀리 유구왕국은 제후국으로 변했다. 북해도는 이미 동해도로 변해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규슈 지역은 하카타 담로와 나가사키 영주가 분할 통치하는 구역으로 변했다. 그리고 대진국에게 충성하는 오우치 가문이 혼슈의 서쪽을 지배하고 동쪽만 천왕과 밀착한 동왜 세력이 있었다.
‘흠!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힘이 약화되었다고 조용히 지낼 것이라고 판단했더니 왜왕을 중심으로 다시 머리를 쳐들고 있군.’
조선의 합병도 중요하지만 동왜 세력이 다시 해군력을 양성하고 있다니 여간 신경 써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래도 또 다시 함대를 동원해 동왜를 공격해야 될 것 같았다.
멀리 복건성으로 함대를 보내기보다 동왜 지역을 공격하는 것이 더 수월했다. 그래야 동왜의 세력을 확실하게 약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밟아 주지.’
저번과는 다르게 직접 함선을 이끌고 가서 초토화시킬 계획이다. 그래서 두 번 다시 다른 나라를 침공할 생각을 못하도록 만들기로 했다.
‘왜놈들의 침략적인 근성을 이참에 완전히 뿌리 뽑아야 돼.’
제 1함대를 동원해 동왜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전함이 반드시 필요했다. 제1함대를 이끌고 직접 왜로 떠날 생각이라 최인범은 임인기 해양부장관에게 지시했다.
“해양부장관은 신속하게 제 1함대의 전함을 건조해 놓으시오.”
“넷!”
동왜에 대해서는 일단 나중에 준비가 끝나면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대규모로 군사작전을 계획하기 때문에 조선을 먼저 합병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최인범은 이황 국무총리에게 지시를 내렸다.
“국무총리께서는 조선의 한양으로 직접 찾아가서 조선 군왕을 압박해 행정권까지 완전히 인수하시오.”
“폐하, 너무 빠르지 않나요?”
윤 대비가 섭정하고 있으니 그녀 주변 인물들을 압박하면 쉽게 행정권까지 넘겨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혹시라도 사대부들이 주축이 되어 반발할 염려는 있었다.
이황 국무총리는 그런 점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인범은 합병을 더 이상 미루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이번에 흡수하기로 결정했다.
“국무총리 생각처럼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선을 천천히 흡수하는 것이 좋지만 동왜가 자꾸만 세력이 커지니 서두르는 것이 좋겠소.”
“알겠습니다. 바로 조선으로 떠나겠습니다.”
“한양으로 갈 때 최소한 조선에서 도지사를 할 관료들은 미리 선정해서 데리고 가시오.”
“명을 받들겠나이다.”
조선 왕실이야 이제는 자체적으로 군대를 전혀 보유하고 있지 못하니 완전히 허수아비가 된 상황이다. 그러나 혹시 사대부들이 뭉쳐 반발이 있을까 염려해 천천히 합병할 생각으로 느슨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최인범은 동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기 전에 조선을 먼저 합병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행정권만 차지하면 조선 왕실이야 있으나 마나하니 그런 정도로 끝낼 생각이다.
‘원 역사 그대로 진행된다면 명종은 후손이 없으니 자연히 조선 왕실은 사라지게 돼.’
조선의 왕실에는 많은 왕족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별로 힘도 없으니 다시 군왕을 추대해 반란을 일으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태왕의 명령을 받은 이황은 황궁을 나오자 즉시 비서관에게 지시했다.
“행정권을 인수할 관료들은 모아.”
“넷!”
태왕께서는 도지사만 데리고 가라고 지시했지만 실무를 담당하는 국무총리로는 그런 정도로는 인수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많은 관료를 조선으로 데리고 갈 생각이다.
“사법부 장관에게 통보해서 판사들을 빨리 모집하도록 해.”
“넷!”
대진국에서 일단 관료들을 데리고 가지만 조선의 행정권을 일시에 차지하려면 많은 관료가 필요했다. 그래서 군수나 읍면장들은 일단 기존에 관료들을 그대로 임명할 계획이다.
‘조금은 혼란스럽게 되겠어.’
최인범이 조선 합병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황궁 안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정강대군이 사는 동궁의 전각에서 불이 났다.
“불이야! 불!”
“소방관을 불러.”
“넷!”
봄의 건조함과 산들바람으로 불길은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평소에는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던 동궁으로 많은 소방관들이 소방차를 끌고 달려왔다. 동궁에 머물던 정강대군이 지내는 서재와 옆의 전각에서 불이 났다.
“영차! 영차!”
양쪽에서 4명씩의 소방관들이 소방차를 힘차게 상하로 누르고 있었다. 소방관들은 긴 갈고리로 불이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도록 건물을 부수고 있었다.
드디어 소방차에서 거세게 물이 품어졌다.
쏴아아! 쏴!
빠르게 물을 품어내자 불길은 쉽게 잡혔다. 그러나 처음 화재가 발생한 작은 전각은 불에 모조리 타버려 검은 재로 변했다. 불에 타버린 잔해를 소방관들이 치우며 화재 원인을 찾고 있었다.
“실화인지 방화인지 확실하게 단정하기가 곤란하군.”
“내가 보기에는 방화 같은데.”
소방관들이 방화라고 판단하는 이유는 잔해에는 의외로 전각에는 비치되지 않은 작은 항아리 파면이 보였기 때문이다. 작은 항아리 안에는 의외로 타다만 송진이 잔뜩 담겨 있었다.
누군가 해하기 위해 송진을 작은 항아리에 담아 불을 지른 것이 확실했다. 이렇게 되자 황실의 내명부 기강확립을 담당하는 감찰 상궁과 감찰궁녀나 시녀들이 나서서 철저하게 조사를 벌이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