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화
이무렵 한양의 대궐에서는 대진국의 은밀한 움직임 때문에 매우 긴장했다. 대비 전으로 들어온 윤원형은 초조한 눈빛으로 윤 대비와 대화를 나누었다.
“마마, 대진국에서 회덕에 큰 도시를 건설할 계획인 것 같습니다.”
“뭐? 그게 사실이오?”
“그러하옵니다. 충청남도 관찰사의 보고에 의하면 그곳에서 대대적으로 큰 건물들을 세우고 주택들도 새롭게 지어지고 있다고 하옵니다.”
충청남도 관찰사는 공주에서 지내며 자주 한밭지역으로 찾아가 그곳에서 벌어지는 공사를 살피고 한양의 조정으로 보고했다. 자세한 보고를 받자 윤 대비는 사태를 어느 정도 짐작했다.
“결국 대진국이 합병을 시작하려고 움직이는군.”
“마마, 그러하옵니다. 그러니 왕실도 대비해야 되옵니다.”
“그렇군. 우선 재물을 모아 놔야 되겠어.”
조선 왕실은 여전히 행정권은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경찰력까지 빼앗긴 형편이라 사실상 행정권도 거의 사라졌다고 볼 수 있었다. 이미 조선의 화폐인 상평통보는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사라지고 대진국에서 발행한 대진통보만 유통되고 있었다.
어찌어찌 하다가 보니 조선 왕실은 이제 완전히 허수아비와 같은 신세가 되어 버렸다. 진행되는 상황으로 보아 조선 왕실은 독립적으로 관료를 임명할 수 있는 제후국 보다 못하게 변했다. 대진국의 태왕께서 취하는 조치들로 보아 조선 왕실은 그저 재산을 많이 보유한 조금 특별한 황실의 방계인 왕족인 지위만 보장 받게 생겼다.
윤 대비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지시했다.
“왕실은 그대로 존속될 것 같으니 최대한 재물은 잘 관리해야 되겠어. 그러니 영상도 집안의 재물을 철저하게 관리해 두시오.”
“넷!”
윤 대비는 왕실 비자금을 관리하던 내소사에서 그동안 시중에 고리로 빌려주던 자금을 모조리 회수하게 되었다.
“이자를 대폭 탕감해 주더라도 원금을 모조리 회수하시오. 판매가 가능한 왕실이 소유한 토지도 모조리 매각해서 금으로 보관하시오.”
“넷!”
윤 대비는 조선 왕실에서 소유하던 염천도 판매하기로 했다.
“염전도 판매하고 대신 금이나 은괴로 보관하도록 해.”
이런 지시를 받자 내소사의 수장인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마마, 엽전을 판매하면 다음에는 수익이 전혀 없게 됩니다.”
“나중은 없소. 그러니 빨리 매각해 버리시오.”
“넷!”
염전까지 판매하는 이유는 대진국으로 흡수되면 왕실 소유 재산은 자연스럽게 대진국 황실 자금으로 빼앗길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왕실의 재산을 매각하자 내시부 소속인 내시들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왕실이 사라지면 우리도 벼슬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니 미리미리 살길을 찾아보자고.”
“그래야 되겠어.”
왕실과 가문의 재물을 챙기고 있는 가운데 한양의 양반들도 재산을 정리했다. 이미 토지가격이 하락하고 있지만 매각하고 나서 대부분 금은보화로 보관하기 시작했다.
농본위주인 조선이라 한양의 사대부들은 전국에 걸쳐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토지를 지금처럼 가지고 있다가 빼앗길 수 있어.”
“그런 정책을 시행할 조짐이 보이나?”
“나는 그렇게 보네.”
분위기가 너무 이상하다고 느낀 고관들은 재빨리 토지를 급하게 매각했다. 그들이 토지를 매각하는 이유는 앞으로 대진국이 완전히 행정권까지 차지하면 토지 정책을 어찌 변화시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토지를 강제로 소작인에게 나누어 준다고 할 수 있으니 빨리 토지들을 팔아서 금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제일 안전해.”
“당연하지.”
“서두르세. 꾸물거리다 보면 더 가격이 하락하니까.”
“알았네. 벼슬이고 뭐고 고향으로 가서 토지부터 팔아야 하겠어.”
한양의 양반들이 토지를 급하게 팔게 되자 자연히 토지 가격은 대폭 하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가운데 왕실과 조정에서는 돈을 받고 벼슬을 파는 일들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쌀 몇 섬만 주면 양반이 될 수 있다는데 이번 기회에 나도 벼슬이나 살까?”
“이 사람아. 앞으로 양반 상놈이 없는 시대가 돌아오는 새로운 세상이 오는데 뭐 하러 쓸모가 전혀 없는 양반을 사나. 더구나 양반은 군대도 못가서 대진국의 관료를 하지 못하는데.”
“그런가?”
설사 그렇더라도 양반을 하고 싶어 한이 되다 싶은 사람은 모조리 양반을 사고 있었다.
토지 매입 과정이야 잘 공작해 비밀을 유지했지만 한밭에서 벌이는 대규모 공사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그러자 그 여파는 한양을 비롯해 전국으로 퍼지고 있었다.
조선 전역에서는 때 아니게 금과 은의 시세가 대폭 오르고 토지 가격은 대폭 하락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미 상업이 농업보다 빨리 재물을 모은다고 판단한 백성들은 실제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토지를 매입했다.
“쌀 때 사두면 나중에 오를 거야.”
“내가 보기에는 토지 가격은 오를 것 같지는 않아. 워낙 떨어져서. 나는 이번 기회에 밭이나 산을 사서 인삼이나 더 많이 재배해 봐야겠어.”
회덕현 근처에서 큰 공사가 시작되면서 조선은 부동산 가격이 요동치고 금과 은괴의 가격이 엄청나게 올랐다. 그러자 광산을 개발하려는 사람들이 대폭 늘어났다.
조선에서 부동산 가격이 요동치고 금 가격이 대폭 오르자 봉황성에서 지내는 최인범은 흑룡도에서 생산된 금괴를 조선으로 보내 판매하기로 했다.
“자순 태감, 금괴를 가지고 빨리 조선으로 가서 학교시설을 만들 부지를 매입하시오.”
“넷!”
“학교가 건립되면 주변은 자연히 토지가격이 오르니 충분히 매입해 놓으시오.”
“명을 따르겠나이다.”
최인범은 조선의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자 기회에 필요한 토지를 싸게 매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학교나 관공서를 지어서 토지 가격이 오르면 매각해서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로 했다.
학교부지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부지다. 최인범은 조선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도청 소재지에는 앞으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건립할 예정이다.
“우선은 직할시에 대학교를 건립하고 도청 소재지에는 고등학교만 건설하니 참고하고.”
“넷! 명을 받들겠나이다.”
드디어 조선을 합병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조선으로 들어가 활동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에서 토지를 마음대로 매입할 수 있는 것은 오래 전부터 대진국의 국민도 조선에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사다난하던 묵은해가 지나고 새해인 무신(戊申: 1548년)년이 밝아 왔다. 흥무(興武) 5년이다.
연호가 상징하듯이 대진국 군사력으로 최강의 나라로 성장했다. 전년도에는 드디어 대륙의 강자인 명나라를 멸망시켜 전국시대를 열었다.
북쪽에 절대강자인 대진국이 있으나 북경을 점령하고 더 이상 남하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륙은 크고 작은 나라들이 난립해 연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대진국의 수도인 봉황성으로 조선을 비롯한 주변국에서 사신들이 찾아왔다.
태왕께 신년 하례를 드리고 대진국과 군사, 경제협력을 새롭게 협상하기 위해서다. 조선 조정은 충청남도 회덕 현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건설 공사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성이 있었다.
영의정인 윤원형이 정사로 임명되어 찾아왔다. 태왕의 지시를 받아 외무장관인 서계가 협상 대표로 나서서 윤원형을 만나게 되었다.
외무부의 회의실에서 윤원형은 장관인 서계를 만나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관님, 3군단이 주둔하는 회덕 근처에서 큰 공사가 진행되는 중이온데 무슨 시설을 하는지요.”
이미 태왕께서 마칠복 형제를 통해 한밭의 토지를 대부분 매입했다. 그리고 각료들에게 지시를 내려 당분간 비밀을 유지하라고 했다.
서계는 윤원형의 이런 물음에 태연하게 응수했다.
“제 3군단 소속인 군인이나 가족들이 사용할 시설들은 건축하려는 것이오.”
“그럼, 신도시를 건설하는 군요.”
“그렇지는 않소. 주둔군이나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시설에 불과하오.”
“장관님, 그렇게 많은 건물을 건립하시면 그건 신도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옵니까? 신도시 건설이야 왕실과 상의해야 되지 않습니까?”
“비슷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소.”
아직은 행정권까지 넘겨받은 상태가 아니라 시치미를 때고 있었다. 뭔지 알아야 대처하게 생긴 윤원형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관님, 그곳의 공사는 신도시 건설이 분명하오니 어떤 목적으로 그곳에 그런 큰 도시를 만드는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영상 대감께서는 참으로 이상하시군요. 신도시를 건설한다면 당연히 대도로 공사를 먼저 시작해야 되지만 아직 그런 공사를 하지 않는데 자꾸 이러시는지 모르겠군요.”
이렇게 답하고 나서 서계는 그곳에 짓고 있는 건물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부대의 주둔지 근처에 장병들의 가족이 지낼 주택을 건설하고 있소. 또한 군사들의 자녀가 다닐 학교를 건립하고 있으니 조선에서 관리하고 싶다면 조선에서 재정을 투입해 학교를 건립해서 운영하세요. 물론 군단 사령부도 지을 계획이라 터를 고르기 시작한 거요.”
조선은 아직도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가 있는 양반을 위한 성리학 중심의 교육제도다. 그러니 딱히 서민들까지 다니는 학교를 건립할 이유가 없으니 그 문제로 이의를 걸 수가 없었다.
윤원형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관님, 고급 학교는 어디에?”
“한양에는 이미 성균관이 있으니 우선은 사단 주둔지에 학교들을 세우고 차츰 각 도청을 중심으로 고등학교를 건립할 겁니다.”
더구나 군사권과 경찰권이 넘어가 있으니 필요한 군인이나 경찰을 양성하기 위한 학교 건립도 탈을 잡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런 공사를 위해 인부들이 지낼 주택을 짓는 공사도 역시 마찬가지다.
서계는 윤원형에게 전혀 다른 사안을 제안했다.
“부산포에서 의주까지 군사도로를 만들어야 되겠소. 부산 쪽으로 왜가 쳐들어오면 방어할 군대가 별로 없어 한밭이나 또는 봉황성에서 군대를 보내야 하니 군사도로는 꼭 필요하오.”
부산포에서 멀리 의주까지 군사도로를 내고 협조해 달라니 기겁했다.
‘흠! 군사도로를 개설해야 된다니 거절할 수 없군.’
행정권을 넘긴 상태가 아니라 산업도로라고 주장하면 이런 요청에 대해 거절할 수 있다. 하지만 도로의 용도가 군사도로라니 반대할 수 없었다.
서계는 윤원형을 만나 조선에 주둔 중인 6개의 정규사단이나 예비보병 여단들이 있는 도(道)를 서로 연결하는 군사도로를 내겠다고 협조를 요구했다.
“지금 사용하는 도로를 조금 더 확장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와 더불어 조선의 치안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각 도에 경찰서를 설치하고 그곳에 지방검찰청과 지방법원을 만들겠다고 했다.
이런 요구에 윤원형은 이제는 완전히 조선은 끝났다고 판단했다.
‘이제 왕실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변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