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화
소피아는 의외로 제주도에서 생산된 감귤을 먹고 나자 구토를 멈추게 되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아무래도 태자인 것 같습니다.”
“그런가?”
무슨 근거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복중의 용정이 공주보다는 태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저 덕담을 건네는 것이다.
소피아의 심하던 구토 증상이 멈추자 허후화는 슬며시 갑판 위로 올라왔다. 타타르 왕국에서 오게 된 먼 친척으로 17살 처녀인 허상화에게 조용히 당부했다.
“나는 이제 황비마마 곁에서 떠나 다시 북경으로 돌라갈 예정이다. 네가 앞으로 소피아 황비님을 옆에서 잘 보살펴 드리도록 해.”
“알았어요.”
처음에야 평생 소피아 옆에서 살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타고난 성품이 매우 활동적이라 답답한 황궁에 처박혀 살기는 어렵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알게 된 자금성의 북문에서 수문장으로 근무하는 사내에게 은근히 연정을 느끼고 있었다.
허후화는 오래전부터 자신이 떠난 이후를 철저하게 준비했다. 그 때문에 허상화는 비록 타타르 왕국에서 살았지만 한어도 잘하고 한글도 교육시켜 놓았다. 허상화를 충분히 자신의 뒤를 이을 궁녀로 길러 놓았다.
“나는 실패했지만 너는 기회를 봐서 태왕께 잘 보여 성은을 받아 보도록 해.”
“예.”
허후화는 나름 타타르 왕국을 위해 자신의 후임자를 만들어 두었다. 밀정 노릇을 하라는 뜻이 아니다. 나름 타타르 왕국과 지금과 같이 교류가 되도록 힘을 보태라는 것이다.
허후화의 친척인 허상화 같은 역할을 수행할 여자들이 무려 5천명이나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황궁으로 많은 수가 궁녀로 들어가길 기대했다.
“나이가 많던 적던 네가 중심이 되어 타타르 출신들을 잘 다루도록 해. 황비마마를 잘 보필하고.”
“예!”
어느새 찬바람이 강하게 부는 늦은 가을이다. 수확도 거의 끝나가는 대진국에 새로운 일이 벌어졌다.
단동에서 하선한 미녀들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다들 놀랐다.
“와! 미녀들이 떼로 들어 왔어.”
“모두 황궁으로 보낸다고 하네.”
“설마. 저 많은 수가 황궁으로 가겠어. 전처럼 또 대대적으로 혼인을 시키겠지.”
“앞으로 봉황성에서 살려면 미녀인 부인과 살아야 되겠어. 미녀들이 점점 많아지니 못생긴 부인을 데리고 살면 기분이 별로 일거야.”
“이 사람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부인은 본시 미모보다는 마음 씀씀이가 후덕해야 제일 좋은 거야.”
“자네는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고 미모가 뛰어나면 마음씨도 곱다는 소리도 들어 보지 못했나? 본시 사람의 마음이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는 거야.”
실없는 소리지만 봉황성에는 미녀들이 모여드는 것은 사실이다. 대부분의 미녀들은 본래 황궁의 궁녀나 후궁으로 보냈지만 태왕의 명령으로 봉황성 주변에서 근무하는 관료나 군인들에게 시집을 보내서 벌어진 현상이다.
더구나 그런 여자들 중에 사회생활을 하는 여자들이 많다가 보니 봉황성은 미녀들만 사는 곳으로 점차 알려지고 있었다.
봉황성으로 1만명이나 되는 미녀들을 데리고 소피아 황비가 돌아왔다. 그러자 황후는 여자들에게 필요한 조치를 내렸다.
“모두 봉황산성에 있는 예술 학교로 보내시오.”
“마마, 예술 학교에 1만명이나 되는 여자를 수용할 능력이 없사옵니다.”
“일단 강의실이나 체육관 그리고 연주하는 강당에서 임시로 지내도록 하시오. 그래도 모자라면 우선 봉황사의 승방으로 보내고 여학교나 여자준사관 학교로 보내시오.”
“넷!”
봉황성 남쪽에 있는 예술학교는 이미 현대식의 시설들이 있었다. 벽돌과 화강암이나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물론 창문도 조각 유리로 만들어 거의 현대식과 비슷한 시설이다.
봉황사의 승방은 전에 많은 조선에서 오게 된 궁녀 출신인 여승들이 임시로 지냈다. 그 때문에 그래도 몇 백명을 수용할 시설이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 환속해서 모두 시집을 가는 바람에 거의 비어 있었다.
일시에 너무 많은 미녀들을 황궁으로 들여오자 문제가 생긴 것이다.
황후의 지시로 미녀들은 임시로 분산해서 숙소를 마련해 주었다. 황후는 새로 황실로 보낸 여자들의 문제를 가지고 황비들과 만나 상의했다.
“폐하께서는 필요 이상으로 황궁 안으로 궁녀나 시녀를 들이지 말라고 하시니 앞으로 그 미녀들을 어찌 처리했으면 좋겠소?”
이런 물음에 문제를 일으킨 당사자인 소피아 황비가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황후마마, 지금까지는 궁녀나 시녀를 최소한으로 줄여서 지냈지만 그동안 건물도 늘고 황족도 늘어났으니 조금은 늘여야 하옵니다.”
“알았어요. 그 문제는 내가 폐하를 만나서 허락을 받아서 처리하죠.”
설사 황궁에서 궁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한정된 수에 불과했다. 그래서 미녀들에게 선택권을 주기로 했다. 시집을 가길 원하는 여자들은 공개적으로 대상자를 모집해 혼인시키기로 했다.
“군대로 보내는 것도 검토해 보세요.”
“예.”
미녀라고 보냈지만 개중에는 미모는 별로지만 신체가 건강하고 체력이 좋은 여자들이 있었다. 준사관학교나 또는 간호학교로 입교하도록 조치를 내렸다.
“최대한 빨리 한어를 익히게 해서 그런 쪽으로 진출하게 처리하죠.”
“그게 좋겠네요.”
이런 결정을 내리고 나서 황후는 태왕을 만나 미녀들의 처리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까지나 태왕이 결정할 사안이기 때문이다.
“폐하, 갑자기 오게 된 미녀들 때문에 봉황성이 시끄러우니 빨리 처리해야 되옵니다. 그러니 황궁의 내부 규정을 약간 변경해야 되옵니다.”
“알았소. 그 문제는 황후가 알아서 처리하시오.”
결국 황후는 내명부의 직제 규정을 바꾸었다. 그래서 자신이 궁녀와 시녀를 100명을 거느리게 되고 서궁에서 사는 황비들은 50명씩 궁녀나 시녀를 두기로 했다.
다른 전각에는 20명씩 배치하는 조치를 내리게 되었다. 나중에 태자들이 지낼 동궁 지역에도 미리 궁녀나 시녀가 거주할 수 있도록 새로운 규정을 만들게 되었다.
결국 소피아 황비는 자신이 데려온 타타르 미녀들 중에 200명을 황궁 안에서 지내는 궁녀로 끌어 들였다. 그리고 나이어린 여자들은 최대한 예술학교로 보냈다.
이런 일들이 끝나자 그동안 계속 옆에서 보필하던 허후화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북경으로 돌아가서 자금성 내에서 하는 주조사업을 관리하고 혼인하게 되었다.
“하 상궁, 하필이면 수문장인 상사와 혼인을 하나?”
“마마, 저야 허세만 심하고 실속이 없는 고위직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그렇죠. 이번에 원사로 진급하니 저와는 제일 적당한 사내죠.”
“허 상궁이 그리 좋다니 내가 더 이상 말리지 못하겠군.”
“허락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옵니다.”
허화후가 북경으로 떠나고 나자 그녀가 하던 업무는 어린 허상화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제 17세인 허상화는 미모가 너무 뛰어나고 가무에도 능했다. 더구나 음식 솜씨까지 뛰어나 가히 팔방미인이라고 볼 수 있었다.
소피아는 어리고 너무 뛰어난 미인인 허상화를 보면서 은근히 질투심이 생겼다.
‘다방면에서 뛰어난 애야. 이런 애가 굳이 황궁에서 산다고 하니 뭔가 노리는 것은 확실해.’
본능적으로 허상화는 장차 자신들의 경쟁자가 될지 모른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특히 임신해서 그런지 매사 예민해지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궁녀로 들인 여자들은 전과 달리 너무 미모가 뛰어나.’
소피아 황비도 이렇게 생각했고 황후나 다른 황비들도 다들 똑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향 공주는 자신에게 배당된 남경에서 왔다는 2명의 궁녀를 보자 그만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세상에나, 저런 미녀도 있었어.’
한명은 엷게 웃으면 주변이 모두 환하지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을 묘하게 찡그리면 날씨까지 우중충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얼굴 표정으로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여자다.
다른 여자는 늘 우수에 잠긴 얼굴로 여자인 자기도 안쓰러워 보여 품에 안아주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니야.’
미녀라고 선발된 1만명의 여자들 중에서 또다시 고르고 골라 300명이 궁녀로 황궁으로 들어 왔으니 한 결 같이 독특한 미모를 자랑하는 여자들이다.
황궁에서 지내는 여자들을 궁녀와 시녀로 구분하는 기준이 있었다. 궁녀의 경우는 아직 처녀의 몸으로 황궁 안에서 지내는 여자들을 뜻한다. 시녀의 경우는 전에는 궁녀가 되지 못한 어린 여자나 또는 수라간 등에서 일하는 여자들을 칭했다.
이제는 어린 생각시는 모조리 예술학교로 보내고 16세가 넘은 여자만 궁녀로 칭하게 되었다. 시녀의 경우는 이미 혼인해 외부에 살면서 출퇴근하는 여자들을 칭했다.
궁녀들에게 대범하던 황후도 여자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주변에 독특한 미녀들이 모여들게 되자 은근히 신경이 써지고 있었다.
‘내가 공연히 너무 이래서는 안 되는데.’
출산한지 얼마 안 지난 설화는 의외로 매우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태왕폐하의 후손이 많아지면 매우 잘 된 일이야. 천손이 많으면 그만큼 우리나라는 만년을 이를 기반이 닦아지는 것이니 아주 잘 됐어.”
이런 말에 여진출신인 상궁이 조심스럽게 경고했다.
“마마, 자칫하면 폐하께서 미녀들의 치마폭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무슨 소리야? 천손이신 폐하께서는 그렇게 무질서한 분이 아니야. 그런 성품이면 벌써 후궁을 들였어. 그러니 앞으로 그런 걱정은 하지 말도록 해.”
“알았어요.”
시녀들의 경우 전에 궁녀로 지내다가 출궁해 혼인한 여자들이다. 대부분 황제의 직속부하들인 경호원, 호위병, 근위기마병과 혼인했다.
황궁에서 벌어지는 일등은 보안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 때문에 시녀들이 사는 주택은 황궁과 붙어 있고 사실상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된 곳이다. 그래서 봉황특별시에서도 특별한 구역이라 특별구(特別區)라고 칭했다.
특별구에는 장관이나 차관 등 고관들의 관사인 숙소도 있었다. 그 때문에 1만 가구가 사는 곳으로 3-4층으로 지어진 현대식 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특별구에서는 매일 같이 혼인하는 경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또 10명이 합동으로 결혼식을 해?”
“다음에는 40명이 동시에 혼인한다네.”
그동안 혼자서 살던 친위기마병이나 또는 호위병과 경호원들은 많은 미녀들이 오게 되자 단 한사람도 예외가 없이 모두 혼인하게 되었다.
새롭게 많은 미녀들이 봉황성으로 와서 각자 자의반 타의반으로 새로운 곳에서 둥지를 틀었다. 이런 가운데 황궁에서는 또다시 경사가 있었다.
정향 황비도 드디어 임신하게 되자 다들 축하하는 분위기에 휩싸였다. 황후는 태자에게 직접 모유를 먹인다는 이유로 태왕과의 잠자리를 피했다. 난설 공주를 낳은 설화 황비도 같은 이유로 잠자리를 피하는 중이다. 그리고 남은 두 황비도 모두 임신하자 태왕은 자연히 진유향을 찾아가고 있었다.
진유향은 일이 이렇게 되자 매우 만족했다. 영영 버려질 운명이라고 생각하다가 좋은 기회를 만나자 너무 신이 났다.
‘나도 보란 듯이 태왕의 아이를 낳을 거야.’
그러나 애절한 여인의 간절한 바람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생의 살업(殺業)이라도 있는 것인지 세상사는 절대로 그녀의 뜻과 같이 되는 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