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화
순간 나른해지는 몸으로 옆에 누운 소피아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폐하, 저는 당분간 여기서 지낼까 합니다. 아직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알았소. 여기서 일하기를 원한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진한 정사를 벌이고 나자 백삼수가 던지 미묘한 화두를 쉽게 떨칠 수 있었다. 또한 백삼수와 관계가 깊은 왕 황후까지 죽었다니 마음이 개운해졌다.
백삼수가 남긴 서책을 왕미미도 봤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무튼 그런 요상한 소문이라도 떠돌면 소피아 황비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자칫하면 이상한 추문을 퍼트릴 염려가 있는데 조용하겠어.’
이런 생각을 하며 최인범은 소피아의 몸을 어루만졌다. 오랜 만에 남편의 품에 안겨 진하게 정사를 벌인 소피아는 매우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평안한 마음으로 꼭 껴안고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벌인 정사라 그런지 매우 격렬한 밤을 보낸 최인범은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소피아와 같이 움직였다.
떠나기 전에 소피아 황비가 여기서 해야 할 일들을 정해주기 위해서다.
소피아 황비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그녀는 천진과 북경을 거점으로 주변국과 대규모의 교역을 담당해야 한다.
다른 나라의 영토를 무력으로 침공해 점령할 수는 있다. 하지만 국민들을 이주시키고 또 정착시키는 사업은 엄청난 재물이 들어간다. 그것을 모두 나라의 재정으로 충당할 수는 없으니 소피아가 나서서 발해 상단을 운영해 소요되는 자금을 충당해야 한다.
더구나 하북성 지역은 일부만 대진국의 영토로 편입되고 나머지는 다소 기이한 형태인 구역으로 변했다. 그래서 그곳은 발해 상단이 교역함으로 경제는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해줄 생각이다.
“황비, 하북성 지역은 현재 치안을 담당하는 관료를 통해 교역하는 방식으로 통제하시오.”
“알았어요.”
하북성 지역은 각 현감이 보유한 치안을 담당하는 군졸 이외에는 어떤 나라의 군대 주둔하지 않는 완충지대로 관리할 요량이다.
“황비, 하북평야에서 생산되는 곡물은 모조리 매입해 비축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이런 방법은 이곳만 적용하는 것은 아니다. 만리장성 북서쪽과 대흥안령산맥의 초원지대인 내몽골 지역의 몽골 인들도 똑 같은 방법으로 관리할 생각이다.
제일 먼저 소피아와 같이 살피는 곳은 지하 감옥 시설이다. 지하 감옥은 모두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최인범은 소피아에게 넌지시 권했다.
“황비, 이곳 지하 감옥은 앞으로 술 창고로 사용해요. 포도주와 인삼주를 담가서 저장하시오. 과일주도 오래 보관해도 될 거요.”
“오래 보관할 특별한 술을 담가놓으면 되겠네요.”
“그렇소.”
포도주를 담가 놓고 대를 물려 오래 보관해야 된다. 그 때문에 일반상인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장기적인 사업이다. 그러니 재력이 좋고 장기간 거액을 투자할 수 있는 황실만이 가능했다.
‘나중에는 재력이 좋은 민간인들도 하겠지.’
최인범은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도록 포도주를 담그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리고 혹시 몰라 서책에 자세하게 기록해 넘겨주었다.
“포도에 다른 첨가물은 절대로 넣지 마시오. 빨리 숙성시키려면 소주를 넣어도 되지만 그럴 경우는 빨리 판매해야 될 거요.”
“그렇군요.”
타국으로 술을 판매할 생각으로 다시 강조했다.
“조선의 소주를 몽골이나 타타르 왕국으로 판매해 보시오. 앞으로 조선출신들이 많이 이주하게 되니 그들 중에 소주를 잘 담그는 기술자도 있을 거니 그들을 잘 활용해 보시오.”
“그렇게 해보죠.”
곡물을 외국으로 수출하는 것도 이득금이 많았다. 그보다는 곡물을 가공해 술을 제조해 판매한다면 더 많은 이득금을 기대할 수 있었다. 넓은 영토를 차지했으니 이제는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된다.
대규모로 술을 제조해 주변국으로 판다는 것은 사실 경제적인 이유도 있다. 하지만 고도의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 술 소비가 많은 민족은 아무래도 강한 나라가 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주변국이 약할수록 우리나라가 편해.’
민간인에게 술의 대규모로 제조해 판매하라는 당장 쉬운 국내 소비에 중점을 두게 된다. 그 때문에 황실에서 제조공장을 운영해 전부 외국으로 수출하는 양조 사업을 벌이려는 것이다.
“앞으로 천진은 발해 만에서 생산되는 수산물을 거래하는 경매시장을 운영하도록 하시오. 멀리 운반해야 되니 되도록 대형으로 건조대를 만들어 건어물을 만들어 판매하시오.”
“폐하, 천일염은 여기서 생산하지 못하나요?”
“충분히 할 수는 있지만 발해만은 황하의 황톳물 때문에 소금의 품질이 좋지 않으니 산동 반도 남쪽에서 생산하는 소금을 들여와 판매하시오.”
“그렇군요.”
이미 대형 염전이 요동의 남쪽 지역에 있었다. 산동반도 남쪽에 대규모로 염전을 만들어 천일염을 제조해 대륙이나 또는 몽골 그리고 타타르 왕국으로 수출하라는 뜻이다. 지역 발전을 위해 산업시설을 골고루 분산하는 것이다.
당산에는 석탄도 많이 생산되지만 고령도도 많이 매장된 곳이라 그곳은 도자기 생산을 장려하기로 정했다. 명나라 기술과 조선의 기술을 결합해 새로운 형태의 우수한 도자기를 생산하기로 했다.
“최고급 도자기 생산도 좋지만 중저가품인 도자기를 대량으로 생산해 국민들의 삶에 보탬이 되도록 하시오.”
“그렇게 하죠.”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한 대진국이라 국민들은 차츰 생활수준이 향상되자 도자기 수요도 대폭 늘어났다. 도자기를 국민들에게 대량 공급을 위해서는 반드시 대규모의 공장도 운영할 필요성이 있었다.
최인범이 서경직할시 지역의 경제 발전을 위한 조치들을 내렸다. 그런 가운데 멀리 장안에서 새롭게 건국한 후당에서 사신이 찾아 왔다.
건청궁에서 사신을 만나게 되었다.
“폐하, 저희 후당국은 앞으로 대진국을 황제국으로 모시겠습니다. 허락해 주옵소서.”
“알았소. 그렇게 합시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후당 왕국은 신생국으로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없으니 대진국의 제후국으로 충성한다는 것이다. 최인범은 타타르 왕국과 교역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후당왕국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었다.
충성맹세를 하고 군왕은 책봉서를 받게 된다. 조종무역이 아닌 민간차원으로 무역하도록 허락했다. 과거 명나라처럼 때로는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거나 또는 조공을 함으로 오히려 손해를 보는 이상한 무역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짐과 타타르 왕국은 혈맹인 사이니 서로 협조하며 잘 지내도록 하시오.”
“넷!”
“그렇게만 한다면 타타르 왕국도 청해성과 감숙성을 벗어나 그대들의 영토 쪽으로 진출하지는 않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서로 협조하면서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제태국에서도 사신이 찾아오자 최인범은 양국의 사신을 같이 만나서 국경선을 정해 주었다.
“다를 이해관계가 다르겠지만 짐이 권고하는 국경선을 참고하세요.”
말이야 그저 참고하라고 했지만 사실상 두 왕국의 영토를 확정해 주는 것이다.
다른 지역을 간섭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대진국과 국경선을 접한 두 왕국의 경우 영토를 확정해 줘야 관리가 편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후당은 섬서성과 산서성을 통치하면 됩니다. 또한 제태국은 현재 영토로 확정해 통치하고 있는 산동성만 통치하도록 하시오.”
장안을 수도로 삼게 된 후당 왕국은 섬서성과 산서성을 영토로 차지하도록 대진국의 허락을 받은 것이다. 또 다른 제후국인 제태국의 경우는 유방을 수도로 삼고 산동 운하가 건설되는 서쪽만 차지하기로 결정되었다.
두 왕국과 인접한 하남성 지역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자 이상해서 제태국의 사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하남성은 어찌 하시려는지요?”
“그곳도 왕을 칭하는 세력이 있지만 그곳은 짐이 인정하는 곳이 아니요. 필요하면 두 왕국이 반으로 나누어 통치해도 됩니다. 하지만 짐이 보기에 무리하게 영토를 늘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지금 차지한 영토만 잘 다스리면 백성들을 충분히 잘 살게 할 수 있으니까요.”
“명심해서 잘 다스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최인범은 대륙이 전국시대로 접어들자 더 이상 대륙의 영토 싸움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국경선과 연결된 두 나라의 영토만 정해주었다.
하북성을 자국의 영토로 삼지 않고 다소 이상한 형태로 놔두는 이유가 있었다. 필요에 따라 그곳에도 새로운 왕국을 만들어 두 나라를 견제할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치를 내리고 나자 최인범은 경호원들과 같이 북경을 떠나게 되었다. 오문 앞에서 소피아 황비와 작별하며 당부했다.
“황비가 너무 외부에서 오래 지내면 백성들 사이에 이상한 구설수가 떠돌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황궁으로 들어오시오.”
이런 말에 소피아는 다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대제국을 이룬 대진국의 황비인 자신을 두고 구설수에 휘말린다는 소리에 매우 놀랐다.
‘어머나,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야?’
소피아가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최인범은 이내 말에 올라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산해관으로 가자.”
“넷!”
말을 타고 급하게 떠나는 태왕을 배웅하며 소피아는 조금 전 던진 말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했다.
‘왜? 그런 이상한 말씀을 하시지? 정말 이상하시네.’
뭔가 깊은 뜻이 담긴 말이 분명했다. 소피아는 멀어지는 태왕을 계속해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혹시 누가 나에 대해 무슨 이상한 모략을 했나?”
옆에 있던 심복인 허후화 상궁이 이내 답해 주었다.
“마마, 얼마 전 폐하께서 계속 교태전으로 오시지 않고 따로 기거한 것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마! 아무리 다른 황비님들과 사이가 좋다고 하지만 궁중이란 중상모략도 많고 이상한 소문도 떠도는 경우가 있사옵니다.”
“이상한 소문이라니? 설마 내가 딴 남자를 만나기라도 한다는 건가?”
“마마, 그런 뜻은 아니겠지만 황궁에서 멀리 떨어져 지내다 보면 아무래도 이상한 소문이 날 수도 있사옵니다. 그러니 그 점을 고려해 앞으로는 황궁에서 지내는 것이 좋사옵니다.”
막상 허후화의 말을 듣고 보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많은 여자들이 태왕의 부인으로 있으니 표면과 다르게 요상한 중상모략도 능히 벌어질 수 있었다.
특히 각자 모시고 있는 분이 다른 상궁이나 시녀들 사이에는 경쟁이 심했다. 알게 모르게 모시는 사람의 영달을 위해 과잉충성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칫하다가 이상한 일이 생길 수도 있겠어.’
나라를 위해 사업을 벌여 충성하는 것도 좋고 친정을 위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여러 부인을 거느린 태왕과 살려면 신경 쓸 일들이 많았다. 소피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서둘렀다.
“허 상궁, 타타르로 연락해서 연타발을 빨리 귀국하라고 전해.”
“마마, 앞으로 황궁에서 지내시려고요?”
“태왕폐하께서 황궁에서 지내라니 가는 것이 좋겠어.”
소피아는 이곳의 사업을 모두 연타발에게 인계해 그가 관리하도록 조취를 취하고 봉황성으로 갈 결심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