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8화
<애절한 여인의 마음>
자금성을 떠나는 왕 황후는 참담한 표정으로 멀리 보이는 태왕을 바라보았다. 한때 태왕의 품에 안기기를 기대하면서 밤잠을 설치던 어린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왕미미는 결국 눈앞에 보이는 부귀영화를 위해 가정제의 후궁으로 들어왔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한때 막강한 권력도 행사해 보았다.
‘화무십일홍이라더니 내가 그런 꼴이 났어.’
왕미미는 점점 멀어지는 자금성을 바라보며 눈가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공연히 서럽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생겼다.
그녀의 애잔한 슬픔이련가? 아니면 망해버린 명나라의 운명을 다타내는 뜻인지 검게 변한 하늘에서는 거세게 폭우가 내렸다.
쏴아아! 쏴아아!
북경의 자금성을 떠나 하루 종일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왕미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미래를 구상하고 있었다.
‘잘하면 살아날 길이 있을 수 있어.’
그녀가 생각하는 살길이란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원세창을 유혹하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자신이 발탁해서 막강한 총병관으로 임명한 인물이니 잘하면 유혹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황제는 죽여 버리고 아들을 황제로 추대하고 원세충을 섭정왕으로 임명하면 서로 서로 좋은 일이니 어쩌면 협상이 가능해.’
이대로 권력의 중심에서 완전히 사라지기가 싫었다. 폭우가 내리자 가던 길을 멈추게 되자 왕 황후는 조심스럽게 작은 동경을 꺼내 들고 얼굴을 살폈다.
‘아직은 내 미모가 남보다 뛰어나.’
관리를 잘 못해서 약간 피부가 상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자신의 미모에 대해 자신감은 팽배했다.
한편 호송 책임자인 원세충은 갑자기 내리는 폭우 때문에 남쪽으로 향하던 발길을 멈췄다. 계곡을 흐르는 물이 불어나 도저히 이런 상태로는 길을 갈수 없었다.
“정지!”
명령을 받은 군사들은 발길을 멈추고 급하게 비를 피하기 위해 나무 아래도 몸을 숨겼다. 주변에는 아름드리나무들이 가득한 골짜기다.
콸! 콸! 콸!
갑자기 내린 폭우 때문에 계곡 물이 점점 불어나 큰 소리를 내려 흐르고 있었다.
무려 50만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요동 정벌을 나섰었다. 그러나 패장이 된 처지로 이제 겨우 2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장안으로 가려니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마치 일장춘몽 같은 일이었어.’
무장으로 수많은 부하를 잃고 항복해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문뜩 너무도 치욕스럽게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세충은 부하들이 쳐놓은 차양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고 있는 초라한 꼴이 마치 거지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황제를 죽이고 나도 자결하고 깔끔하게 끝내버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잠시 스치는 잡념일 뿐이다.
황제와 같이 왕 황후와 태자를 호송해 장안으로 떠나라고 하자 나름 미래의 계획이 있었다. 황제는 먹잇감으로 노리는 장안의 관리들에게 넘겨줄 생각이다. 여전히 미모가 뛰어난 왕 황후를 차지하고 우선은 태자를 황제로 옹립해 세력을 확장해 볼까 구상을 했다.
‘호송하는 중에 기회를 봐서 황후와 협상해 봐야겠어.’
대진국의 포로에서 풀려나고 안전해 지자 다시 권력을 향해 집념을 보이는 것이다.
원세충은 2만명의 군대를 잘만 활용하면 새로운 길이 있다고 생각했다. 문관들만 많은 장안으로 가서 쉽게 그곳에 있는 무리들을 장악해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세상사는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는 원세충에게 부하가 급하게 다가와 보고했다.
“장군, 폐하께서 방금 승하하셨습니다.”
“뭐라?”
아무리 보잘것없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가정제지만 그래도 황제다. 원세충은 급하게 가정제가 타고 가는 마차로 달려갔다.
마차는 호송하는 병사들이 전혀 없는 소나무 숲에 있었다. 주위가 풀숲이고 병사들도 없어 방치한 상태로 놓여 있었다. 황제라지만 병사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장안으로 가야 죽을 놈인데 신경 쓸 필요가 없어.’
급하게 다가온 원세충은 마차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다가 기겁하며 놀랬다.
“헉!”
마차의 문을 열자 비릿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사방에는 붉은 피가 보였다. 마차에 타고 있던 가정제의 목덜미에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같이 타고 있던 왕 황후의 가슴에서도 붉은 피가 흐르고 어린 아들도 목에 칼이 깊이 박혀 죽어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장군, 조금 전까지 울던 태자님께서 갑자기 울음을 멈추고 마차 안이 너무 조용해서 열어보게 됐습니다. 보다시피 왕 황후가 황제와 태자를 죽이고 자신도 가슴에 칼을 박고 자결했습니다.”
“누구 마차에 접근한 사람은 없었고?”
“전혀 없었습니다.”
황제의 죽음을 목격한 원세충은 잠시 넋을 잃었다. 장안까지 황제를 호송해 주고 그때 자신의 앞날을 계획하려고 생각했다. 잘하면 장밋빛인 미래가 펼쳐질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미 황제와 황후 그리고 태자가 모조리 죽어 버렸으니 자신이 품고 있었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미 죽어 버렸지만 장안으로 가서 세력을 넒이려면 시신이라도 가져가야 한다.
“시신을 수습하고 빨리 이동해.”
“넷!”
여름이라 시체가 빨리 부패한다. 급하게 근처의 마을로 가서 문짝으로 관을 대충 만들어 3구의 시신을 넣었다. 시신을 수습하면서 원세창은 조금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어라? 황후는 왼손잡이인데 이상하게 오른 손으로 단검을 잡고 있네.’
더구나 무술이 전혀 없다고 알려진 왕 황후가 순간에 황제와 태자를 단 숨에 죽이고 자살했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그러나 외부의 침입 흔적이 전혀 없으니 의문은 이내 떨쳐버렸다.
‘설마, 누가 암살할 이유가 없지.’
가정제가 죽고 나자 무섭게 내리던 폭우가 멈추었다. 병사들이 3구의 시신을 수습하는 동안 개울의 물로 조금 줄어들었다. 졸지에 황제가 타던 마차는 시신을 운구하는 마차로 변했다.
원세충과 부하들이 이미 죽어버린 황족의 시신을 마차에 싣고 떠났다.
“빨리 이동해.”
“넷!”
그들이 멀리 떠나고 나자 황제의 마차가 있던 숲에서 몸집에 매우 호리호리한 사내들이 나타났다. 사람 키만 큼 자란 풀 속에서 모습을 슬며시 드러냈다. 모두 3명으로 검은 야행 복을 입고 있었다.
“다행이 들키지 않았어. 빨리 돌아가 보고하자.”
“넷!”
이들은 빠르게 숲에서 멀어지더니 작은 마을로 가서 그곳에서 기다리던 다른 사람들과 합류했다.
“모두 서경지부로 철수해.”
“넷!”
이들도 사라지고 나자 황제를 포함한 가족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황제와 황후 그리고 태자까지 죽었다고 하자 사람들은 혹평했다.
“미친 황제 놈이니 너무 잘 죽었지. 추하게 살아서 뭐해.”
“황후가 황제와 태자를 죽이고 자살했다던데. 그게 정말인가?”
“그렇다고 하더군. 비참하게 사느니 깔끔하게 자결하는 것은 그나마 나은 거지.”
“무슨 소리야? 저승이 아무리 좋아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더 좋다는데.”
가정제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주원장이 홍건적의 무리를 이끌어 몽골족의 원나라를 물리치고 세운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생을 끝내게 되었다. 명나라의 명맥을 이어줄 옥쇄도 이미 대진국이 차지했으니 완전히 망해버렸다.
이런 소식은 파장이 엄청나게 컸다. 이미 스스로 왕이라 칭하던 북쪽의 세력들은 왕을 넘어서 황제로 칭하는 무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허어, 이제 황제도 개나 소나 아무나 하네.”
“이 사람아, 그거야 제 잘난 맛에 멋대로 칭하는 거지 황제야 오직 한분뿐이지.”
“그렇군. 공연히 허세 부리다가 죽으려고 환장한 놈들이지.”
북경 부근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대진국의 태왕을 황제라고 칭했다. 비록 국경선은 천진과 북경을 이어가는 천리장성으로 구분하고 있지만 대륙의 주인은 태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륙에 새로 생긴 나라들은 스스로야 황제라고 칭하지만 다들 왕이나 장군으로 칭했다. 드디어 대륙은 많은 나라가 세력을 다투는 전국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북쪽에는 황제국인 대진국이 있고 동쪽의 산동 지역에는 제태국, 서쪽에는 타타르 왕국이 있었다. 남쪽에는 남주와 남한이 있었다. 다른 곳의 세력들이야 왕이나 황제라고 칭하지만 세력의 규모로 보아 백성들 사이에서는 그저 장군 정도로 칭하고 있었다.
북경을 떠나 장안으로 집결한 선비나 관료들은 원세충이 호송해온 죽어버린 황족의 시신을 보자 다들 환호했다.
“드디어 원수 놈이 죽었어.”
“내 아버님을 죽인 황후도 죽었으니 이제야 속이 후련해지는군.”
그래도 황제라고 작은 묘를 만들고 비석을 건립해 장사를 지냈다. 장안성에 모여든 사람들은 누군가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할 필요성이 있었다.
문관들이 모여서 앞날을 고려해 의논했다.
“여기에도 나라를 세웁시다.”
“그럽시다.”
“나라를 세우려면 왕이 있어야 되지요.”
“누가 좋은지 말해 보시오.”
사방에서 도적의 무리인 황건적이 날뛰니 이대로 살 수는 없었다. 그러니 나라를 세워 치안을 유지해야 살아남게 생겨 서두르게 되었다.
며칠 간 나라를 세우거나 군왕으로 추대한 인물을 두고 활발하게 논의했다. 몇몇 사람들은 황족을 만나서 왕으로 추대하자고도 했다. 그러나 일부는 현재는 난세이고 무력이 있어야 된다고 해서 원세충을 추천했다.
“원세충 장군이 제일 적임자요.”
“주변에 황건적도 많고 대진국과도 사이가 좋으니 그를 추대합니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문관 출신들은 결국 2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원세충을 군왕으로 추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어 장안이 오래전 당나라의 수도였다는 점을 고려해 후당이라는 명칭으로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산서성, 섬서성을 아우르는 후당(後唐)이 새롭게 건국한 것이다. 대륙은 이제 큰 덩어리로 따져도 몇 개의 왕국으로 조각났다.
한편 대륙에 우후죽순 격으로 많은 나라들이 생겼다. 그런 가운데 북쪽의 하북성 지역에는 누구도 자기 세력권이라고 주장하지 못했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과거에 임명된 현감들이 각 지역에서 치안을 유지하며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다.
대진국이 자국의 영토라고 확정한 지역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위세에 눌려 감히 하북성을 차지하겠다는 무리는 없었다.
북경의 천리장성 공사장에서 기거하는 최인범에게 최복동이 찾아와 보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