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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트레인-475화 (475/519)

475화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중에 알아서 좋을 일도 있고 모르는 것이 오히려 좋을 수도 있었다. 최인범은 백삼수가 남긴 서책을 보다가 알아서 좋을 일이 아닌 내용을 보고 말았다.

순간 잠시 서책의 내용을 보고 분노했지만 차분해졌다.

‘이놈이 사람의 심리를 묘하게 흔들려고 이런 짓을 벌였어.’

남을 중상모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결 조건이 있었다. 하나의 거짓을 말하기 위해 아홉의 진실을 말해야 믿는 것이다. 사람이란 본시 매우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산다고 자부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보통 알게 모르게 이성적인 사고력보다는 감성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인간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란 인생을 살만한 것이다.

백삼수의 서책은 분명 악의를 품고 그것을 마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있다는 내용을 적어 놓았다. 정작 중요한 내용은 거짓으로 적어 무서운 복수를 획책한 것이다.

‘이런 음흉한 놈을 내가 옆에 두고 있었다니 일찍 헤어지길 잘했어.’

이렇게 판단한 최인범은 백삼수가 남긴 서책을 화로에 던져 태워버렸다.

화르륵 화르륵.

기름종이에 써놓은 서책이라 잠시 거센 불길이 일어났다.

이때 최복동이 다가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폐하, 무슨 서책을 태우고 계세요?”

“별것 아닙니다. 스님들이나 불자들이 중요한 사실을 자백하던가요?”

“넷! 자백을 받다보니 가정제와 왕 황후는 문둥이로 위장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모든 문둥이의 붕대를 풀도록 해 찾았습니다. 우선 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수고 많았군요. 덕분에 큰 짐을 덜었어요.”

명나라의 왕도인 북경을 기습적으로 공격해 함락했다. 하지만 가정제와 왕 황후 그리고 그녀의 아들인 태자를 잡지 못해 온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최복동은 다시 보고했다.

“배도치 사령관은 천연동굴 안에서 황제의 옥쇄와 금은보화를 모조리 찾았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재물을 얻게 되었습니다.”

“재물이 많다면 서경직할시에서 벌일 사업들을 빨리 끝낼 수 있겠군요.”

“폐하, 감축 드립니다. 드디어 원수를 모조리 잡았습니다.”

명나라 황제의 옥쇄도 찾았다니 이제는 명나라를 완전히 굴복시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최인범은 명나라 황제를 어찌 처리하는 것이 좋은지 고민이 생겼다.

‘생포했으니 봉황성으로 데리고 가야 하나?’

대륙에서는 황제를 사로잡을 경우는 자국의 수도로 데리고 가서 포로로 잡아 살려두는 것이 통상적으로 행해지는 방법이다.

그러나 정신병자인 가정제나 잔악한 왕 황후를 살려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니 나름 고민이다.

‘여기서 그들을 처형해 버리면 나를 포악한 군주라고 해서 한족들이 뭉칠 수 있는 명분을 주는데.’

이런 생각이 들자 최인범은 즉시 지시를 내렸다.

“우선 감옥에서 꺼내서 자금성의 전각에 가두어 두세요.”

“넷!”

최인범은 지하 감옥에 있던 죄인들을 다시 재판에 무죄로 방면하거나 또는 효수나 태형을 가해 모조리 처리했다. 그리고 지하 감옥에는 가정제나 왕 황후와 같이 있던 환관이나 고관대작들을 가두었다.

지하 감옥에서 나온 최인범은 가정제가 있는 서궁으로 가게 되었다.

서궁으로 가자 가정제를 비롯한 왕 황후가 어린 아들을 안고 넓은 마당에 엎드려 바들바들 떨었다. 그들의 주변에는 궁녀들과 환관 그리고 고관들도 같이 있었다.

별로 의미는 없지만 가정제가 옥쇄를 바치며 항복하게 되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이미 말도 거의 못하고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가정제에게 항복을 받는 과정이라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저런 놈을 잡자고 고생하다니 한심하군.’

더구나 어린 아들을 안고 두려워서 떠는 왕미미를 보자 분노보다는 측은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다만 어린 아이를 보니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 어린 것을 꼭 내손으로 죽여야 하나?’

실제로는 백삼수의 아들이지만 어찌 되었건 가정제의 아들로 되었으니 살려두면 화근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평생 옆에 데리고 있으며 돌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있어야 황족들을 처리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최인범은 이렇게 생각하지만 주위에 있는 부하들은 다들 신이 났다.

“폐하, 감축 드리옵니다.”

“고맙소. 이런 사실을 널리 알리도록 하시오.”

“넷!”

명나라 황제인 가정제를 잡은 사실을 널리 공포했다. 명나라는 이제 완전히 망했다고 선포하게 되자 실질적으로 전쟁은 끝났다.

가정제와 왕미미는 자금성의 서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같이 있던 환관이나 또는 고관들은 모조리 효수되어 오문 밖에 걸리게 되었다.

특히 호국사찰에서 잡혀온 스님들은 모두 전에 있던 스님을 모조리 죽였다. 명나라의 고관들이나 또는 호위병들이 위장하고 있어 그들도 모두 효수되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명나라 사람들은 누구하나 동정하는 경우가 없었다.

“잘 죽었어. 저런 놈들은 죽어야 돼.”

“지질이도 못난 황제에 빌붙어 떵떵거리며 호강하고 살더니 말년에 처참하게 죽는 것이 당연해.”

일부 한족들은 효수로 끝난 것이 너무 싱겁다고 평했다.

“갈가리 찢어 죽이는 능지처사를 해야 하는데.”

“태왕께서 죄인들을 봐 준거야.”

능지처사(凌遲處死)란 대역죄를 범한 죄인들에게 과하는 최대의 형벌이다. 머리, 양팔, 양다리, 몸통 등에 밧줄을 걸어 우마가 끌게 해서 여섯 부분으로 찢어 각 지방으로 보내는 형벌이다.

명나라나 조선에서는 그런 형벌이 있지만 대진국은 반역도도 모두 효수가 최고형이다. 그래서 모조리 효수하고 끝낸 것이다.

최인범은 가정제와 왕 황후 그리고 그녀의 아들을 어찌 처리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척계광, 자네가 좋은 묘책이 있으면 생각해 보게.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어 보고.”

“넷!”

최인범은 혼자서 결정하기보다는 주변의 측근들에게 가정제의 처리 방식을 논의해 보라고 지시했다. 공개적으로 처리하는 문제를 논의하지 말고 은밀하게 의견을 모으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런 지시를 받은 척계광은 제일 먼저 최복동을 만났다.

“원장님, 폐하께서 왜 저러시는지 혹시 아세요?”

“척 비서관, 아직도 폐하를 잘 모르는군. 폐하께서는 어린 아이인 태자를 죽이는 것이 별로 내키지 않아 저러시는 거야.”

“그렇군요.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겠군요.”

척계광이 이렇게 말하자 최복동이 즉시 답했다.

“자네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모르겠군. 나도 딱 한 가지 방법뿐이라고 생각하는 데.”

두 사람은 서로의 생각이 같은지 글씨로 적어 보았다. 그리고 문구는 다르지만 똑 같은 의미의 계책임을 알자 최복동을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허어, 자네가 나와 똑 같은 생각이라니 기분이 너무 좋군. 아무튼 우리야 생각이 같지만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같은지 들어 보세.”

“넷!”

“나는 우리의 계책이 성공할 여건이 되는지 알아보겠네.”

이런 대화를 나눈 최복동은 서둘러 국가정보원의 서경 지부 요원들에게 총동원 명령을 내렸다.

“특수 요원들은 모두 장안으로 침투해 적들의 움직임을 살피도록 해.”

“넷!”

남쪽으로 도망친 관리들이 제일 많이 모여 있는 장안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것이다.

한편 가정제를 잡아서 큰 짐을 덜었다고 판단한 최인범은 서경개발을 위한 조치를 내리며 자금성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소피아가 있는 교태전에서 지내지 않고 건청궁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가정제와 그의 가족을 처리하면 봉황성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건청궁에서 혼자 밤을 보내며 몇 가지 문제를 놓고 매우 고심하고 있었다.

‘어찌 처리하지?’

다음날 새별 일찍부터 천리장성인 성곽 축조 공사 현장을 돌아보고 나서 밤이 되어 교태전으로 돌아오자 소피아가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폐하, 오늘은 어인 일로 이곳을?”

“왜요? 내가 여기에 오면 불편한가요?”

갑자기 약간 까칠한 투로 응수하자 영문을 전혀 모르는 소피아는 화들짝 놀랐다. 뭔가 기분이 나쁜 일이 있는지 며칠간 자신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으니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퉁명스럽게 응수한 최인범은 속으로 참으로 한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별 수 없는 속물이야. 그런 모략을 마음속에 담고 있으니.’

백삼수가 남긴 서찰의 내용 때문에 소피아와 접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백삼수는 유언서로 남긴 서책에 천진에서 소피아에게 잡혀 있을 때 자금성에서 오게 된 상궁과 궁녀들을 요리한 사실을 적어 놓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런 와중에 소피아와도 접한 사실이 있다고 고백했다.

치졸한 음모라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지만 감성으로는 영 꺼림칙한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소피아와 잠자리하는 것이 어색한 것이다.

‘후우! 내가 죽은 놈의 술수에 신경을 쓰다니. 너무 한심해.’

인간의 마음이란 매우 간사한 것이다. 같이 침대에 누워도 등을 돌리고 자는 태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소피아는 정말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아니면 다른 여자를 취하고 싶어서 이러시나?’

아무튼 백삼수가 죽으며 남긴 서책 때문에 최인범과 소피아 사이는 냉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서로 어색해 하는 태도가 지속되고 있었다.

한편 북경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 남경의 헌강왕은 그제야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며 독자적인 국가를 선언했다. 그는 명나라를 계승한다면서 남명이라고 칭하고 남경을 수도로 정했다.

이런 선언이 알려지자 동쪽의 주산 담로에서는 전과 다르게 남경과의 교역을 중단해 버렸다. 헌강왕이 독립하면서 황제 국가를 표방한 것이 문제라고 판단한 것이다.

김신완 총통은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남경의 헌강왕은 이제는 우리와 적국이라고 선포한 셈이니 경계를 강화하도록.”

“넷!”

주산군도야 바다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남명에서 군대를 보내 침공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육지인 상해 시는 연결된 지역이라 경계를 대폭 강화하는 것이다.

“상해에 정규 보병사단 규모로 병사들이 주둔하도록 장비를 보내.”

“넷!”

김신완 총통은 서둘러 주산도에 주둔 중인 육군을 상해 시로 보냈다. 그리고 주산도에 비축되어 있던 화포를 비롯한 많은 포탄을 운반했다. 전쟁을 대비해 전력을 대폭 증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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