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화
<색이 다른 여인의 향기>
솔 냄새가 솔솔 풍기는 산사는 잠시 정막감이 감돌았다. 두려움으로 덜덜 떨고 있는 민비의 모습은 너무 애처로워 보호해주고 싶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나를 너무 두려워하는군.’
이제 20세를 겨우 넘긴 민비는 마치 어린 소녀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두려워서 떠는 모습이라 그런지 더욱 어려 보였다.
‘흠! 부침이 너무 심한 인생을 살다보면 나이에 비해 노련해 지는 법이야. 그런데 민비의 얼굴은 이상하게 전혀 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나네.’
최인범은 자신의 아내들은 모두 시간이 지날수록 매우 노련한 모습으로 변했다. 특히 전에는 소녀와 같이만 느껴지던 황후도 많이 달라졌다. 화려한 미와 고고함을 품어내서 그런지 매우 성숙한 여인의 향기가 느껴졌다. 전에 느끼던 아름다움이 변했다.
그러나 민비는 전혀 다른 색을 품어내자 물끄러미 얼굴을 바라보며 깊이 생각에 잠겼다.
‘이런 여자가 평생 혼자 살게 된다니 너무 안타까운 일이야.’
최인범은 별다른 뜻이 있어서 해보는 생각은 아니다. 그저 너무 특이한 향기를 품어내자 약간은 경이로운 새로운 느낌이 들어 바라보는 중이다.
민비는 가깝게 접하기 어려운 태왕이다. 바로 코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너무 뚫어지게 바라보자 너무 당황했다. 저절로 고개가 깊숙하게 숙여지고 있었다. 이미 남자를 아는 몸이라 환속이 뭐를 뜻하는지 너무 잘 안다.
‘왜 이러시는 거야? 내 뜻은 이미 잘 아실 건데.’
민비는 두려움과 더불어 어떤 부끄러움이 피워 오르며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우람한 체구에 무섭게 생긴 부리부리한 눈을 마주하니 본능적으로 요상한 두려움까지 생겼다. 주책없지만 한번 눌려 심하게 당하면 그 즉시 죽어버릴지 모른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너무 무서운 분이야.’
태왕은 자신에게나 죽은 남편에게 어떤 위해를 가한 사실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어린 아들을 귀하게 대해주지만 너무 두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아들을 잡은 두 손에 힘을 주며 덜덜 떨었다.
태왕께서 계속해서 민비의 파랗게 질려 있는 얼굴을 바라보자 주변에 있는 상궁이나 또는 비서관 그리고 경호원들은 다들 놀랐다.
‘폐하께서 저렇게 관심을 두는 여자가 지금까지는 전혀 없었는데. 너무 이상한 일이야.’
황궁에는 황비나 진빈 이외에 미녀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래도 태왕께서는 미녀들을 자세하게 바라보는 경우가 전혀 없었다.
주변에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미녀들이 있는지 없는지 잘 알지 못한다는 정도로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니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경우도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미 태왕폐하의 심중은 완전히 드러난 거야. 민비는 환속해야 되겠네.’
미모로는 분명히 황후나 황비들이 민비보다 더 뛰어났다. 하지만 자신들이 보기에도 민비는 미묘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태왕폐하의 성품이 워낙 특이해서 민비의 특별한 모습에 반했다고 판단했다.
‘옛말이 전혀 틀리지 않아. 진짜 오입쟁이는 여승이나 수절과부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하던데.’
민비의 얼굴을 계속해서 바라보니 그녀의 몸에서 야릇한 솔향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아마도 솔방울을 넣은 물로 목욕을 했거나 아니면 산사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자연히 몸에 배어서 나는 솔향기 같았다.
‘솔향기가 너무 좋군.’
최인범은 주변의 측근들이 자신의 태도를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부드럽게 지시했다.
“경호 실장, 지금 즉시 솔방울을 따도록 해.”
“넷!”
솔향기가 느껴지자 작은 솔방울을 따서 술을 담을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저 작은 솔방울을 따서 소주만 부어 놓으면 되기 때문에 이렇게 지시를 내렸다.
최인범은 초롱초롱한 눈매로 자신을 유심하게 올려보는 정강대군을 내려다보며 문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추가로 지시했다.
“다람쥐도 있으면 잡아오고. 송진도 많이 수집해 오도록 해.”
“넷!”
봉황사에는 목각하는 스님도 있고 탱화를 그리는 스님도 있었다. 그래서 목각하는 스님들을 모아놓고 뒤에 달린 수차가 돌면 전진하는 모형 배의 모습을 그려주며 지시했다.
“이런 형태로 모형 배를 만드시오.”
“폐하, 어느 정도 크기로?”
“다람쥐를 모형 배에 태워야 되니 영지척으로 2-3자 정도로 만드시오.”
모형 배를 만들어 어려서부터 배와 익숙해지도록 교육할 계획이다. 그리고 옆에서 호위도 하고 왕자에게 무술도 가르쳐줄 스승을 구해주기로 했다.
경호실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해군 장교 출신으로 특공 무술을 익힌 스님이 있는지 구해 봐.”
“넷!”
강사상 비서관에게는 다른 지시를 했다.
“황궁으로 연락해서 황태자시강원을 만들고 태자를 교육시킬 선생들을 보내라고 하고.”
“명을 따르겠나이다.”
아직 태왕의 자손이 없는 상태인데 황태자시강원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었다. 그래서 은근히 걱정이 생긴 강사상은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폐하, 황태자시강원을 벌써 운영하면 나중에 오해가 생겨 문제점이 타나날 수 있사옵니다.”
이런 건의에 최인범은 빙그레 웃으며 답해 주었다.
“비서관은 왜 매사 부정적인 방향으로 판단하나? 장차 태자가 태어나면 여기서 정강태자를 교육시킨 경험이 아주 좋게 활용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러니 좋게 받아들이면 돼.”
“알겠습니다. 소신의 생각이 너무 짧았습니다.”
사실 태왕의 생각은 너무 치밀했다. 과거의 한문 공부 위주의 학습과는 다른 형태의 교육이 필요했다. 미리 실험하듯이 정강대군에게 신식 교육으로 제왕학을 먼저 가르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래도 걱정되는 점은 있어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폐하, 나중에 문제점이 생기면 어쩌시려고요?”
“무슨 문제? 내 소생인 태자와 방계인 정강 태자와 사이에 후계자 문제를 말하나?”
“그렇습니다.”
“강 비서관은 초등학교 사회 교육을 건성으로 배웠군. 이런 글귀가 떠오르지 않나? 세상은 넓고 바다를 통하면 신천지는 무진장 널려 있다는······.”
“아, 그렇군요. 소신이 너무 생각이 짧았습니다.”
최인범은 결국 나중에 분란이 생길 여지가 많은 정강대군은 대진국을 떠나 신천지를 개척하는 지도자로 삼을 계획인 것이다.
그리되면 조선 왕조를 추종하는 무리는 모조리 정강대군과 같이 신천지로 이주시킬 계획이다. 굳이 억지로 그렇게 추방할 생각은 없지만 필요하다면 그런 방법으로 조선의 명맥을 이어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태왕께서 솔방울로 술을 담근다고 하자 스님들도 나서서 파릇파릇한 작은 솔방울을 따서 모았다. 많은 솔방울이 모아지자 지시를 내렸다.
“황궁으로 보내서 지하 창고에 담가 놓으라고 해. 나중에 정강태자가 장성해서 혼인하게 되면 잔치 술로 사용하도록 잘 밀봉해 놓고.”
“넷!”
태왕이 유별나게 정강대군의 미래를 생각하자 솔방울 채취 작업은 지속되었다. 일국의 태자가 혼인하면 잔치에 쓸 술이 많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송진을 많이 채취하면 용도가 아주 많았다. 그래서 추가해서 지시를 내렸다.
“학교의 자연 시간을 이용해 송진을 채취해서 군으로 보내도록 지시해.”
“넷!”
“나중에 채취하려면 강제로 사람을 동원해 말썽이 생기니 지금부터 준비를 철저하게 하도록.”
“명을 따르겠나이다.”
전쟁을 하려면 많은 물품이 필요했다. 그러니 지금부터 전 국민들이 별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재료부터 구해서 비축하기로 했다.
최인범은 봉황사의 스님들에게 이미 다른 사찰에서는 대부분 시행하고 있는 장뇌삼 재배에 대해 알려주었다. 또한 표고버섯이나 송이버섯 재배 기술도 대략 전수했다.
“근처에 농림부 소속의 농산연구소가 있으니 그곳으로 가서 보다 정확한 재배 기술을 배워서 봉황사에서도 재배를 하시오.”
“넷!”
최인범은 이런 지시를 내리다 보니 새로운 구상이 떠올랐다. 연어나 기타 치어를 생산하면 불문(佛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방생하는 행사를 실시하도록 지시했다.
“자연 상태로 놔둬야 하는 거북이나 자라를 일부러 잡았다 놓아주기 보다는 치어를 방사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경제에도 좋고 의미도 있으니 해보시오. 특히 연어는 다시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니 불교의 교리와 잘 부합시켜 시행해 보도록 하시오.”
“넷!”
종교가 정치에 너무 깊이 개입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또한 종교가 재물을 너무 귀하게 여기면 그 또한 큰 문제점이 파생된다.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게 되는 종교라 그것이 정치나 경제와 접하면 좋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자칫하면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는 사악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었다.
최인범은 봉황사에 머물면서 봉황산성의 방어 태세를 점검하거나 또는 간간히 떠오르는 새로운 사실을 황궁으로 연락하며 지내고 있었다.
‘어째 소피아가 오래 걸리네.’
예술학교에서 미녀들을 선발하라고 보냈는데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아 기다리는 중이다. 어차피 그녀가 와야 같이 떠나기 때문에 최인범은 봉황사에서 정강대군과 놀아주며 지내고 있었다.
드디어 모형 배가 만들어져 연못에서 실험하게 되었다. 모형배의 선실에 쳇바퀴 시설이 있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게 해서 뒤에 달린 수차가 돌아가며 전진하게 된다.
사사사삭 사사삭!
다람쥐가 쳇바퀴에 올라 빠르게 달리자 뒤에 달린 수차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자 모형 배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와! 앞으로 간다.”
어린 정강대군은 폴짝폴짝 뛰면서 무척 좋아했다. 어린 아들이 좋아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민비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린 아들에게 좋은 선물을 만들어준 태왕을 슬며시 살폈다.
‘너무 좋은 분이야. 무섭지만 상당히 자상한 분이고.’
민비는 환속하라고 명령하면 죽을 각오로 굳게 결심했었다. 차갑고 매서운 마음이 어느새 봄바람에 얼음이 서서히 녹아들듯이 풀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과는 달리 얼굴에 엷은 분홍빛이 발해졌다.
민비의 마음이 이미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강사상 비서관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태왕께서는 완전히 여자의 마음을 가지고 마구 흔들어 마음대로 조종하는군. 이런 식으로 가다가 보면 민비가 먼저 환속하겠다고 자청하게 생겼어.’
강사상은 이런 현상도 이미 난봉꾼들이 자주 써먹는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왕은 민비에게 마음이 쏠린 것 같았다.
‘어린 아이를 가진 과부를 꼬이려면 먼저 아들을 꼬이라고 하더니 진짜 여자를 너무 잘 꼬이는 분이야.’
이런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태왕께서 어째 그 많은 미녀들을 그대로 놔두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주변 사람이 어찌 생각하던 최인범은 자신의 느낌 그대로 행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