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화
전쟁에서 날씨란 매우 중요하다. 첨단 무기를 보유한 현대전에도 날씨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만 지금은 더욱 크게 작용될 수밖에 없었다.
“자순, 올해 가뭄이 심하면 상대적으로 겨울이 되면 더 춥지 않을까?”
“폐하, 역사서에 기록으로 봐서 그렇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수시로 변하는 날씨란 꼭 통계와 같을 수 없지만 일단 평년보다 더 추울 것으로 예상하고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것이 좋겠어.”
“그렇습니다.”
최인범이 날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요서 지방의 특성 때문이다. 요서와 요동 사이에는 대요하와 요하가 있고 그곳은 거대한 늪지대가 하류지역에는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니 겨울이 아니면 진군하기 어렵고 특히 평년보다 춥게 되면 늪지대를 통해 대군이 진격할 여건이 충족된다. 그래서 그것을 대비하려는 것이다.
대진군은 우수한 화력을 지닌 대포가 많고 기마병이 우수해 같은 병사의 수라면 명나라나 몽골군을 충분히 분쇄시킬 수 있다. 그러나 명나라는 인구가 많다는 점으로 적어도 대진국의 몇배나 몇십배에 달하는 병사를 몰고 와 인해전술을 펼칠 것이 분명했다.
고대의 전쟁 상황을 검토하며 적이 공격하던 모든 수단을 검토하고 나름 대비책을 수립하고 나자 최인범은 자신이 직접 서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자순, 일단 기본적인 전략이 수립됐으니 정리해서 각 부처에서 해야 할 준비 사항들을 따로 따로 정리해 놓도록 해.”
“명을 따르겠나이다.”
최인범은 명나라와는 달리 대진국의 전 국민을 전쟁으로 끌어들일 생각이 없었다. 최소한의 병사들을 동원해 적을 격퇴시킬 생각이라 신중하게 검토하는 것이다.
전쟁이 임박했다고 해서 그동안 추진하던 경제 발전을 모두 중단하고 전쟁 준비를 하면 설사 전쟁에서 승리를 해도 반드시 후유증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최인범은 황실 내부부터 계획한 그대로 하나하나 정리할 계획이다.
자꾸 분란을 일으키는 진유향이나 그녀의 오라비인 진명하가 한양에서 오게 되자 만났다.
“대사, 그동안 조선에서 너무 고생했으니 앞으로 건강이나 챙기며 쉬도록 해.”
“알겠습니다.”
진명하는 조선에 있으면서 영향력을 발휘해 챙긴 뇌물이 많았다. 최인범은 그것을 알지만 조선의 조정을 훌러덩 뒤집기 전에는 범죄사실을 입증할 수 없으니 일단 재물에 대해서는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뭔가 협의점이 확실하게 드러나면 그때 조치를 내려야 되겠어.’
진명하를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하고 이어서 아진태의 혼인을 직접 주선했다. 처가도 연고가 있는 가문과 혼인하면 나중에 문제가 발생한다고 판단해 황후에게 지시했다.
“황후, 아진태는 천축국 공주라는 여자들 중에서 선발해 혼인시키도록 하시오.”
“알겠사옵니다.”
“한 명보다는 두 명이 적당해 보이니 그렇게 하시오.”
“예.”
최인범의 지시를 받은 황후인 월녀는 봉황성의 예술학교에 속한 천축국 출신 여자들 중에 가무에 뛰어나고 미색이 출중한 2명을 선발해 아진태와 혼인하도록 했다.
비록 방계지만 황실의 왕자라 황궁에서 결혼식은 진행되었다. 결혼식에 참석한 고위급 관리들은 아진태와 혼인하는 여자들을 보며 다들 놀랐다.
“아까운 여자들인데.”
“아깝다니. 자네 혹시 군부인이 욕심이라도 생긴 건가?”
“욕심은 무슨 이제는 완전히 찬밥 신세로 변한 아진태 왕자에게는 너무 과한 미모라는 거지.”
“자네 생각에는 결국 돼지에 진주 목걸이라는 뜻이군.”
“그런 셈이지.”
진명하가 조선에서 돌아와 공직에서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그러자 진유향의 처지는 추락했다. 또한 그녀의 아들인 아진태는 이제는 칭호만 왕자에 불과하다고 판단됐다. 그래서 권력의 속성상 각료들은 아진태의 혼인식에 참석해서 이렇게 혹평하고 있는 것이다.
진유향은 자신이나 오라버니가 공연한 욕심을 부려 사태가 이리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전과 달리 이제 태왕의 후손이 잉태된 상태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이 태왕의 후계자로 지목되는 일은 포기하게 되었다. 더구나 방계지만 태자 예우를 받는 정강대군이 있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태왕으로 오르지 못할 바에는 미인들을 부인으로 맞이해 한직에서 편하게 사는 것도 좋아.’
최인범은 혼인식이 끝나고 아진태와 같이 북쪽으로 떠나려는 설화를 만나 지시했다.
“황비, 대흥도로 가면 대흥안령산맥을 정밀하게 조사하시오. 우리가 아는 통로 이외에 혹시 다른 통로가 별도로 있을 수 있으니 정확하게 확인해 보시오. 그리고 몽골의 족장인 자마카를 봉황성으로 보내도록 하시오. 물론 은밀하게 보내야 하오.”
“폐하, 제가 떠나면 폐하께서는 심양으로 가실 생각이지요?”
“그렇소.”
“그렇다면 자마카를 심양으로 보내겠사옵니다.”
“알았소. 그렇게 하시오.”
“반드시 아진태의 부인인 군부인을 만나도록 하시오. 그리고 그런 미인이 많다는 점을 넌지시 알려 주시오.”
“넷!”
황실에 정략결혼을 시킬 공주나 옹주가 없고 방계도 없으니 자신에게 보내진 미녀들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몽골 족장인 자마카에게 천축 출신인 미녀들을 보내기로 했다.
설화가 아진태를 대동하고 떠나고 나자 최인범도 떠날 준비를 했다. 전과 달리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니고 본토를 돌아다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은 없으나 조선의 경우는 급하게 처리할 사인이 있을지 몰라 국무총리를 만나 당부했다.
“총리께서는 조선에서 일이 생겨 급하게 처리할 사안이 발생하면 짐에게 연락하지 말고 황후를 만나 결심을 얻어 처리하시오.”
“넷!”
최인범은 새로 900명으로 늘어난 경호요원들 중에 300명만 대동하고 봉황성을 떠나게 되었다. 그와는 별도로 운석으로 만든 특수갑옷을 입은 호위병 100명을 대동했다.
전쟁 준비 상태나 또는 경제 발전 상황을 직접 돌아볼 생각인 최인범은 황궁을 떠나 남쪽으로 이동했다.
“봉황산성의 예술학교를 가자.”
“넷!”
남쪽의 봉황산성으로 향하는 길은 이제 돌과 구은벽돌로 포장된 도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두두두두.
화려한 마차가 같이 이동하고 있었다. 한 대에는 대련으로 가게 되는 소피아 황비가 타고 있고 그녀를 옆에서 보살피는 상궁이나 궁녀들이 타고 있었다. 일부는 많은 짐을 싣고 때로는 빈 마차도 있었다.
후궁 후보자들이 많이 있는 예술학교로 간다고 했다. 그곳에서 10여명의 미녀를 선발해서 같이 이동한다고 했다. 그런 명령을 듣자 소피아가 마차의 문을 살며시 열고 옆에서 말을 타고 가는 태왕에게 물었다.
“폐하, 후궁을 들이려고요?”
“갑자기 왜 후궁은?”
“예술학교에는 후궁이 되기 위해 기다리는 미녀들이 많잖아요.”
“공연한 소리를 하는군. 혹시 서부전선으로 가면 미녀들이 쓸모가 있을지 몰라 데리고 가려는 것이오.”
이미 설화와 약속했기 때문에 미녀들을 데리고 가서 자마카에게 넘겨주려는 것이다.
드디어 남쪽 관문에 다다르자 소피아는 예술학교로 가서 미녀를 선발하고 최인범은 봉황산성으로 가게 되었다. 산성 안에 있는 봉황사에 안치된 왕미령의 위폐라고 보려는 것이다.
봉황사로 이르는 길은 변했다. 전에는 비탈이 심해 마차로 이동이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완만하게 길을 새로 넓혀 놓았다. 마차 길을 따라 이동해 봉황사에 도착했다.
봉황사의 주지는 급하게 나와 합장하며 인사했다.
“폐하, 납골당으로 가시려고요?”
“그렇소.”
최인범은 납골당에 들렸다가 이곳에서 머무는 정강왕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제는 걸어 다니는 정도로 자란 정강대군은 눈이 초롱초롱하고 총명해 보였다.
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시대의 변화로 이제는 망하는 나라의 왕족이다. 상궁의 보살핌으로 잘 자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이야.’
죽은 인종의 간곡한 부탁이 있으니 최인범은 아이의 장래를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왕조시대다 보니 사실 정강대군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물질적인 풍요뿐이다.
“상궁, 혹시 대군이 글을 배우고 있나?”
“예, 천자문을 익히고 있사옵니다.”
“많이 익혔나?”
“예, 조금 익힌 상태이옵니다.”
“벌써 천자문을 익힐 정도면 총명하군.”
정강대군은 반역의 근원으로 변할 수 있으니 높은 벼슬을 시킬 수도 없고 작은 권력도 줄 수 없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어리지만 총명하게 생긴 정강대군의 모습을 바라보니 뭔가 해주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정강대군이 장차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나 고심했다.
‘뭐가 제일 적당할까?’
신중하게 판단할 사안이라 한참을 고심했다. 그러다가 문뜩 떠오르는 좋은 생각이 있었다.
‘됐어, 당장은 어렵지만 그 방법이 있었군.’
좋은 방법이 떠오르자 최인범은 정강대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튼튼하고 지혜롭게 잘 자라라. 장차 네가 할 큰 일이 있으니.”
잠시 뒤에 머리에 고깔을 쓴 민비가 나타나서 매우 두려운 눈으로 정강대군을 품에 안고 가늘게 떨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인 상태로 아들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그녀는 두려움 때문에 손가락이나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이제는 망해버리기 직전의 조선왕국이다. 그런 나라의 왕자로 총명하다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미 권력의 비정함을 체험한 민비다. 그렇기 때문에 태왕이 자신의 아들에게 관심을 표하자 두려운 것이다.
‘겉으로는 호의를 보여도 언제 어찌 변할지 몰라.’
속세의 칠정오욕을 모두 버리고 불문으로 들어 왔지만 아들의 안위만큼은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 두려움이 생기자 별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혹시 환속하라고 하려나?’
조선의 왕후이던 몸으로 재가한다는 것은 죽음 보다 더 무서운 치욕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아들의 목숨을 가지고 환속을 강요한다면 참으로 결정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었다.
잡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민비의 애처로운 모습은 최인범에게는 전혀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두려워 떠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보이네.’
이런 상태로 자신이 그냥 봉황사를 떠나면 민비는 생으로 병이 날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조용히 조금 전에 생각하던 자신의 뜻을 은밀하게 말해 주었다.
“왕자를 잘 기르시오. 나중에 짐이 다시 찾아와 좋은 거처를 정해줄 것이니.”
자세한 설명 없이 이렇게 말하자 두려움에 떨고 있던 민비는 참담한 느낌이 들어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죽음 밖에 없게 생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