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진유향을 만나 진하게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진유향을 흐트러진 자세로 누워 은근한 말투로 속삭이고 있었다.
“폐하, 조선도 여러 개로 나누어 관리하는 것이 어떤 가요?”
“그게 무슨 뜻이요? 여러 개로 나누다니?”
“식량 생산도 많고 염전도 많아 대진국에게 큰 이득을 주는 전라남도만 따로 대진국에 속하도록 하는 방법도 있지 않나요? 그리고 조선 공주와 아진태를 혼인시키는 것이 좋아 보이는데요.”
“그래야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아진태는 추위에 약하니 따뜻한 남쪽에서 지내는 것이 좋지요.”
최인범은 그녀의 말 때문에 한 가지 의문은 풀렸다. 전라남도 지역에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고 있다고 국가정보원의 보고를 받았다. 진유향의 오빠인 진명하 대사가 조선에서 그런 일을 획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천성은 버리질 못하는군.’
전라남도의 염전을 차지하고 싶어 그런 음모를 진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유향의 말에 최인범은 어이는 없지만 면전에서 뭐라고 답하지는 않았다.
‘자신들의 처지가 이러면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하고 자중하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니 하는 수 없어.’
최인범은 진유향의 처소를 떠나 집무실로 와서 바로 외무장관인 서계를 불렀다.
“외무장관, 조선에 대사로 가있는 진명화를 지금 당장 소환하시오. 대외적으로 이런 사실을 퍼지지 않도록 비밀을 유지 하시오.”
“넷!”
진명하를 소환하고 앞으로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할 생각이다. 비록 감옥으로 보낼 필요까지는 없지만 이제는 권력의 중심에서는 완전히 내칠 계획이다.
‘진명하는 학식도 높고 잔재주가 많으며 머리가 좋으나 더 이상 왕실 주변에 놔두면 점점 진유향이나 아진태 왕자까지 변할 수 있어.’
조선의 무역 대표부 대사는 매우 중요한 자리라 임명을 신중해야 된다. 최인범은 적당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아 서계에게 물었다.
“조선의 대사로 누굴 보내면 좋겠소?”
“폐하, 소신 생각으로는 강사상을 조선의 대사로 보내는 것이 제일 좋다고 판단됩니다. 그는 폐하와 같이 보낸 기간이 오래 되니 폐하의 의중을 가장 잘 헤아려 필요한 행동을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를 조선 대사로 보내도록 하는 것이 좋사옵니다.”
“조선 출신을 보내면 혹시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적인 파벌이 생기지 않겠소?”
“물론 그런 걱정이 있다고 하지만 강 비서관은 감히 그런 이상한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인범은 서계의 건의를 받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옆에 항상 데리고 다니는 비서관으로 척계광과 강사상을 임명한 이유는 나름 명나라와 조선 출신을 공평하게 임용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제는 그런 의미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조선을 별 탈 없이 흡수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조선 출신인 강사상 보다는 척계광이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척계광을 조선의 대사로 보내시오.”
“알겠사옵니다.”
“장관은 명나라 젊은 관료 출신으로 비서관 업무를 수행할 만한 인물을 신중하게 알아보아 추천하시오.”
“넷!”
이런 조치를 내리고 나자 소피아와 설화가 황궁으로 돌아왔다. 황비들이 돌아오면 황후와 혼인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했었다. 그래서 다음날이 되자 황궁에서는 간단한 책봉식이 있었다.
와글 와글.
황궁 안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 왔다. 비록 장 차관급만 초청한다고 했지만 초대된 사람들은 장군들도 많고 민간인으로 큰 회사를 운영하는 기업인들도 오게 되었다.
‘공연히 너무 많은 사람을 불렀어.’
이렇게 생각되지만 이미 초대된 사람을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각료들은 황후에게 잘 보일 좋은 기회라고 판단해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많은 사람을 불렀던 것이다.
멀리 몽골과 접한 대흥도의 목장에서 지내던 아진태도 황궁으로 오게 되었다. 처음으로 황실의 가족인 직계나 방계가 모조리 모이게 되었다.
특히 조선에서 오게 된 민비도 어린 아들인 정강 대군과 같이 참석했다. 이미 속세를 떠나 불문(佛門)으로 들어간 여인이지만 어린 아들의 미래를 생각해 참석한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며 일부 각료들이 수군거렸다.
“폐하께서 민비를 환속시키려고 불렀나?”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
각료들 중에 조선 출신은 환속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명나라 출신은 환속시켜서 비어 있는 황비 자리를 채우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환속하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잖아.”
“그렇지.”
각료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비어 있는 황비 자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치형태의 대진국이라고 하더라도 황비를 배출한 가문은 미래를 보장 받게 된다. 그 때문에 황비 자리가 욕심이 나서 한 자리를 두고 의견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최인범은 그런 각료들의 움직임 때문에 사실 고민이다.
‘전에는 황후 자리를 놓고 의견들이 분분하더니 이제는 남아 있는 황비 자리를 놓고 여러 개의 패로 갈리고 있어.’
인간이란 만족을 모르고 끝없이 욕심이 부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심복인 측근들은 그런 행태에 부하뇌동하지는 않았다.
드디어 행사가 시작되자 다소 소란하던 분위기는 업숙하게 변했다.
째에엥, 쟁! 삐리리리! 빠리!
황궁에서 실로 오랜만에 웅장한 풍악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황후의 책봉식이자 혼인식이 거행되었다. 황실의 공방에서 제작한 황금 인장을 비롯한 보석으로 치장된 화관들이 황후에게 주었다. 이어서 3명의 황비들에게도 신분을 나타내는 인장과 화관을 넘겨주었다.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황후 마마, 천천세.”
“황비 마마, 천천세.”
서류상으로나 실질적으로는 황후와 황비라고 정해 놓았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부인들에게도 신분에 따른 인장을 수여하고 있는 것이다.
정비인 황후와 황비가 3명이다. 그리고 후궁인 빈이 1명으로 모두 5명의 부인을 두게 되었다.
책봉식이 모두 끝나고 나자 간단한 연회가 있었다. 봉황성 근처에 있는 예술 학교에서 오게 된 무희들의 야릇한 춤을 관람하며 최인범은 옆에 앉아 있는 황후에게 슬며시 물었다.
“황후! 유구 공주와 아진태의 혼인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소?”
“폐하, 유구의 공주는 이미 이곳으로 오기 전에 사귀던 정인이 있다는 보고가 정보원을 통해 들어 왔습니다. 그러니 아진태 왕자와의 혼인은 더 이상 추진할 수 없사옵니다.”
“그런 이상한 정보까지 황후가 수집합니까?”
“폐하, 유구 공주가 너무 완강하게 아진태 왕자와 혼인을 거부해 하는 수 없이 정보원을 통해 알아본 것입니다. 그러니 아진태 왕자는 다른 규수와 혼인을 추진해야 되옵니다.”
“알았소. 아패록 추장과 약속한 일이니 꼭 좋은 규수를 주선해서 아진태를 속히 혼인시키도록 추진하시오.”
“예.”
최인범은 인종의 간곡한 유언이 있었다. 그 때문에 민비가 비록 불문으로 출가했지만 황실의 내명부에서 황비와 같은 예우를 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폐하, 그리 되면 정강 대군은 어찌 예우해야 되옵니까?”
“그야 태자와 같은 정도로 예우해야지.”
“알겠사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황실의 방계로 기록되기 때문에 황실에서 태왕의 후계자로 예우를 받는 사안은 아니다. 다만 태왕에게 후손이 없을 경우에는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위치인 것이다.
어찌 되었던 최악의 경우 태왕의 자리를 이을 명분이 있는 왕자가 둘이나 생긴 것이다. 이런 정도로 황실을 구성하니 후계자가 전혀 없던 전보다는 안정된 형태로 변하게 되었다.
최인범은 자순에게 지시를 내렸다.
“조선에서 환관이 왔다니 그들을 황실의 내시부에 속하게 조치하고 그들을 자주 봉황사로 보내서 정강 대군을 살피도록 해.”
“명을 따르겠나이다.”
“궁녀들도 잘 지낼 수 있도록 필요한 재물을 아끼지 말고 보내주고.”
“명심해서 거행하겠사옵니다.”
최인범은 황후 옆에서 벗어나 따로 앉아 있는 세 황비에게 다가갔다. 먼저 아진태와 같이 지내고 있던 설화에게 물었다.
“아진태 왕자의 자질은 어떻소?”
“아주 평범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소? 도청의 업무에서 뭐에 관심을 두고 있소?”
“광산업에 관심을 두고 있사옵니다. 주로 몽골이나 북쪽에 있다는 광산을 개발해 보는 것이 좋다고 판단해서 그런지 그쪽으로 관리들을 보내고 있사옵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평범하지는 않다고 보는데?”
“물론 그렇게 판단할 수 있지만 사실은 아진태의 생각이 아니라 진유향이 보낸 상궁이 뒤에서 조정해서 벌어진 일이니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사옵니다.”
“알았소. 아무튼 이번에 황궁에 왔을 때 아진태는 혼인시켜서 데리고 돌아가시오.”
“예.”
군대에 대한 통솔력이 강한 설화를 북쪽에 계속 머물게 하는 이유는 몽골 때문이다. 최인범은 몽골도 조각을 내서 힘이 약한 세력으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슬며시 처음 거래를 한 자마카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
“황비는 자마카에게 힘을 실어 주시오.”
“예, 계속 지금처럼 그를 통해 무역해서 그가 세력을 확장하도록 하겠습니다.”
몽골에서 대규모로 대가축을 구입하고 군수품 제작을 의뢰하는 형태로 자마카를 키워 주고 있었다. 그러니 자마카 족장을 알탄 칸과 대적할 정도로 세력을 키워주라는 지시다.
이제 명나라가 침공을 확실하게 준비한다고 판단한 최인범은 대련에서 명나라와 무역하며 활동 중인 소피아에게도 지시를 내렸다.
“앞으로 명나라로 무기 판매를 서서히 줄이도록 하시오.”
“넷!”
“그리고 석탄 등 수입량은 대폭 늘리도록 하고.”
“잘 알겠습니다.”
겉으로는 매우 조용하지만 이미 명나라나 대진국은 결전을 앞두고 은밀하게 서로 속이면서 전쟁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다.
이제 황실 자체가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라 지금처럼 조용한 가운데 준비하면 명나라에서 어떤 세력과 연합해 침공을 해오더라도 충분히 대적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기다리다 보면 먼저 지치는 쪽이 움직이게 돼.’
최인범은 집무실에서 주로 자순과 명나라에서 침공해 올 경우를 대비한 전략을 논의하고 있었다. 고대의 역사서를 자세하게 살피다 보면 자연히 명나라를 대적할 좋은 전략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